소설리스트

고황 (75)화 (75/1,004)

75화 가난뱅이 무림맹주

소 승상은 달빛을 받으며 돌아갔다.

그가 돌아간 뒤, 육장봉은 육이를 불러들였다. 나무함 하나를 육이에게 밀어 주더니 말했다.

“이것을…….”

육장봉은 말을 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됐다, 나가거라!”

“예, 장군.”

육이는 몰래 책상 위의 나무함을 훑어보았다. 대충 짐작이 갔다.

‘이 시간이면 월 낭자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반 시진이 지나면 월 낭자는 잠자리에 들 겁니다. 장군께서 월 낭자를 찾아가시려면 빨리 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육이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육십이처럼 멍청이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너무 많이 아는 것도, 너무 많이 말을 하는 것도 좋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편이 잔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더 안전했다.

육이는 조용히 물러가 서재의 문을 살며시 닫았다. 그리고 밖에서 지키고 있던 육육(陸六)과 육칠(陸七)을 데리고 갔다.

모르는 척할 수는 있었지만, 멍청한 척할 수는 없었다. 장군에게 기회를 만들어 줘야 했다.

육장봉은 서재에 앉아 책상 위의 나무함을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무함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평소 습관에 따르면, 그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반 시진 뒤였다. 빨리 움직여서 반 시진 안에 일을 마쳐야만 월령안 때문에 자신의 일상을 흐트러트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일을 잘 처리했다는 소식을 황궁에 전해야, 황제도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폐하께서 편히 쉬지 못하실까 걱정되어 월령안을 만나는 것이지 내가 보고 싶어 가는 게 아니다. 나는 절대로 월령안의 예쁜 얼굴이 보고 싶어 가는 것이 아니다. 난 월령안이 화가 나 있거나, 꾹 참고 있거나, 우쭐거리는 것 외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다.’

육장봉은 말을 타지도, 누구를 대동하지도 않았다. 귀신처럼 몇 번 펄쩍 뛰어오르더니 저택을 빠져나와 길거리에 도착했다.

육이는 홍예문 밖에서 지키고 있다가 밤하늘로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를 보자, 안심된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 장군이 드디어 좀 사람다워지셨네!’

때는 이미 야심한 시각이라 온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육장봉은 자신의 몸을 숨기지도, 실력을 감추지도 않았다. 유령처럼 나는 듯이 길거리를 누비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

길거리의 한 주루(酒樓)의 지붕 위.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육장봉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깜짝 놀라 버럭 소리쳤다.

“맹주님, 조금 전…… 저자가 혹시 마교총교두(魔敎總敎頭) 남상권(藍象權)이 아닐까요?”

“아닐 거다. 그놈은 지금 천 리 밖에 있을 텐데, 어떻게 변경에 나타날 수가 있겠느냐.”

맹주라고 불린 사내도 일어나 앉았다. 그는 육장봉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자는 남상권이 확실했다. 그러나 소육자(小六子)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부인했다.

‘남상권이 지금 변경에 뭐 하러 왔지? 내가 변경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날 훼방 놓으러 왔나?’

“하지만 저 모습은 제가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잘못 보지 않은 게 확실해요.”

남상권 같은 인물은 한 번만 보아도 평생 잊어버리기 힘들었다.

사 년 전, 강호에는 남상권이라는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는 아홉 달이라는 시간 만에 백팔 명이나 되는 사파(邪派)의 우두머리들을 하나하나 처단했다.

그 후, 남상권의 이름은 강호에 널리 퍼져 명문 정파의 수많은 찬양을 받았다. 많은 문파에서는 남상권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뿐이라면 모를까, 한 달 뒤 남상권은 마교를 세우고 마교총교두라고 자칭했다. 그는 강호의 모든 사파를 끌어들여 정보 판매, 무기 판매, 물건 호송 및 사람 호위, 청부 살인 등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고작 삼 년 사이에 마교의 사업은 점점 구색을 갖추어 큰돈을 벌었다. 동시에 명문 정파의 무사들은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워졌다!

물론, 명문 정파의 무사들은 사람을 죽이거나 정보를 파는 짓 등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문파의 부동산 사업이나 강호의 쓰레기, 사파의 악당들을 잡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부동산 수익으로는 겨우 끼니나 때웠을 뿐이다. 그 정도로는 무림 고수로서의 위엄을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부동산이라는 것도 큰 문파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강호인에게는 조상이 남겨 둔 재산조차 없거나, 있더라도 극히 적었다. 대부분 자신의 능력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들은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건을 호송하거나, 고용주를 보호하는 일은 다들 할 수 있었고, 실수하는 경우도 적었다. 부유한 상인이나 관리 모두 그들에게 기꺼이 의뢰했다.

사실 이것도 푼돈 벌이밖에 안 됐다. 진짜 큰돈은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잡아주고 받는 조정의 현상금이나, 각종 큰 문파의 현상금을 받아야 벌 수 있었다. 현상금이 걸려 있지 않더라도, 못된 짓을 저지르는 강호인을 관아로 끌고 가면 큰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전부 남상권이 나타나기 전의 일이었다.

남상권은 사파의 우두머리를 모조리 죽인 뒤, 사파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문파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파의 모든 사업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무림 정파의 정당한 생계 활동도 끊어 놓았다.

사파 사람들은 더는 못된 짓을 저지르지도, 사람을 마구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자 신변 보호를 위해 무림맹 사람들을 고용하는 사람들도 사라졌다. 재산을 호송하는 일에도 평범한 표사(鏢師 – 사람, 재물 등을 전문적으로 호송하는 무사)를 고용하지, 그들 같은 고수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능력이 뛰어난 만큼, 몸값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일 열 받는 일은 따로 있었다. 사파 놈들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으니, 현상금마저 탈 수 없게 되었다!

수입이 없어진 이들은 부동산 사업으로 겨우 입에 풀칠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병기들을 사고, 무림인으로서의 위엄을 떨치고 싶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특히 최근, 이 년 동안은 모아 두었던 돈도 거덜 났다. 많은 무림인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무림맹주 수횡천 역시 요즈음 압박감을 점점 심하게 받고 있었다.

다섯 달 뒤에는 무림대회를 열어야 했다. 그때까지 돈을 구해오지 못한다면, 무림대회를 멋들어지게 개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망신을 당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어쩌면 남상권을 따르는 그 인간들이 무림 맹주가 무능하다고 뒤에서 비웃을지도 몰랐다.

그러한 장면을 떠올릴수록 수횡천은 가슴이 답답해져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돈을 구하지 못하면 무림대회를 열 수 없고, 정파, 사파 모두에게 비웃음거리가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공포에 빠진 수횡천은 주루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몇 초간 머물다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검은 그림자는 지붕 위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림지존 수횡천이 변경엔 무슨 일이지?”

그 소리는 바람에 흩어질 정도로 낮아 들리지 않았다. 그림자는 곧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웬 놈이냐?”

수횡천은 이 조그마한 기척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날려 주루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눈에 보인 것은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들고양이였다. 그놈은 유리 같은 눈망울로 수횡천을 노려보고 있었다.

“또 네놈이구나? 왜? 또 먹이를 찾지 못했냐?”

수횡천이 이 들고양이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앞으로 다가가 들고양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마른 과자 한 조각을 꺼내 주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냄새만 맡고 싫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곧 엉덩이를 수횡천 앞에 들이대더니, 우아한 자태로 멀어져 갔다.

“…….”

* * *

육장봉이 월씨 저택에 왔을 때, 월령안은 목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인이 갑자기 달려와 육장봉이 왔다고 하자, 그녀는 하인이 말을 잘못했거나, 자신이 헛것을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 육 대장군이 오셨다고? 날 만나겠다 하신다고?”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니겠지? 지금은 밤이 맞지? 이 야심한 밤에 육장봉이 찾아와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배상금을 물러 왔나? 그렇다 해도 답지 않은 행동인데?’

“아가씨, 육 장군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녀는 고개를 숙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녀는 아가씨의 반응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방금 그녀가 바깥뜰 하인에게서 육 장군이 아가씨를 뵈러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찬가지로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이 야심한 밤에 육 장군이 아가씨를 찾으러 오다니, 혹시 무슨 일이 생겨서 아가씨께 따지러 온 게 아닐까?’

“무슨 일인지 말은 하더냐?”

월령안은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하녀의 대답을 듣더니,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혀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무리 밤이라 해도, 머리를 풀어헤친 채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손님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육장봉이 제멋대로 야밤에 찾아왔다 해서, 그녀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하녀는 앞으로 다가와 월령안에게 옷을 갈아입혀 주며 말했다.

“아가씨, 육 장군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바깥뜰 사람의 말로는 육 장군의 언행과 기색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손에 나무함을 들고 오셨다는데, 무언가 중요한 물건인 것 같다 합니다.”

‘나무함이라고? 설마 낮에는 남들 보기 부끄러워서 야밤에 배상금을 갚으러 온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육 대장군도 정말 빨리 해결하고 싶으신 모양이군.’

월령안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더는 생각하지 않고 하녀에게 말했다.

“따뜻한 다과를 내어 드리고, 잘 모시라고 해라.”

‘육장봉이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는 만나기만 하면 알게 되겠지. 여기서 허튼 생각을 해서 뭐해?’

월령안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가장 빠른 속도로 서재로 갔다. 그렇다 하더라도 육장봉은 일각이나 지루하게 기다리느라 차를 두 잔이나 비운 후였다.

똑같이 일각을 기다렸음에도, 소 승상의 저택에서는 소씨 가문의 위신을 전혀 봐주지 않고 몸을 일으켜 떠나버렸다. 하지만 월씨 저택에서는 일어나기는커녕 지루해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육 장군,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송구합니다.”

월령안은 들어오자마자, 육장봉에게 사과부터 하며 예를 올렸다. 이미 육장봉의 핀잔을 들을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하인에게 분부해 그녀에게 허리 보호대를 입혀 달라고 했다. 육장봉이 아까처럼 허리를 숙인 월령안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녀의 허리가 노인의 허리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의 괴롭힘은 견디기 힘들었다.

예상과 달리, 육장봉은 상냥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내가 갑자기 온 것이니, 월 낭자도 이만 일어나 앉으시오.”

“육 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육장봉이 어떻게 생각하든, 월령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몸을 일으켰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육장봉이 그의 말을 취소할지도 몰랐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평소 자신이 앉던 상석에 육장봉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인 자신은 마치 남처럼 손님의 자리에 앉아야 했다.

여기가 제집인 것처럼 구는 육장봉의 뻔뻔함에 그녀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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