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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74)화 (74/1,004)

74화 절연장을 쓰시죠

“육 장군, 지금…… 이 편지들은 전부 내 손에 있네.”

소 승상은 나무함 속의 편지들을 손에 쥔 채 흔들어 보였다.

“내가 지금 이것들을 전부 불태워 버리면 자네라고 어쩌겠나?”

“하!”

육장봉은 비웃었다.

“승상께서 수도에서 오랫동안 편안히 지내다 보니, 사람도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잊으셨나 봅니다? 그 북요 귀족이라는 작자를 한번 만나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게…….”

소 승상의 의기양양하던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얼굴을 굳힌 채 물었다.

“육장봉, 유씨는 내가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일세. 유씨가 이미 죽은 상황인데 절연한다고 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나?”

선비로서의 소 승상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게 뻔했다.

“그건 그쪽 사정입니다.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육장봉은 소 승상이 물러서는 것을 보자, 위엄을 거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절연장을 쓰시죠. 소 승상!”

“난 쓰지 않겠네!”

소 승상은 육장봉과 협상을 시도했다.

“육장봉, 자네가 유씨의 시신을 도둑질한 일은 아직 얘기도 시작하지 않았네. 너무 선을 넘지 말게!”

“음, 그럼 저를 고발하십시오.”

육장봉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쿨럭…….”

소 승상은 육장봉의 반응에 말문이 턱 막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어느새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여러 번 쿨럭거리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육장봉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 책상 위의 종잇장을 소 승상 앞으로 돌려놓았다. 또 붓을 골라 그의 손 옆에 두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제 휴식 시간을 더 잡아먹지 마십시오.”

육장봉은 소 승상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소 승상이 그 편지들을 봤으니, 절연장을 남겨 두지 않고는 떠나지 못하리라.

소 승상은 울화가 치밀었다. 육장봉의 손을 쳐내고 종잇장을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손에 든 편지들과 그 내용을 떠올리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씩씩대며 육장봉의 손에서 붓을 빼앗아 들었다. 먹물을 묻힌 뒤, 절연장을 거칠게 휘갈겨 쓰고는 바로 붓을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

“육장봉, 이번 한 번만…… 내가 진 셈 치지! 다음엔 이렇게 좋게 끝나지 못할 줄 알게!”

붓끝에는 아직 먹물이 묻어 있었다. 책상 위로 던져지며 튄 먹물이 육장봉의 옷소매에 떨어졌다.

육장봉이 입술을 끌어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전혀 화내는 기색 없이 여유롭게 인주를 꺼냈다. 상자에서 인주를 꺼내 뚜껑을 열고, 소 승상의 손 옆으로 밀어 주었다.

“소 승상, 지장을 찍으시지요!”

그는 소 승상에게 잔머리를 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육장봉, 해도 해도 정도껏 해야지!”

소 승상은 화가 나 이마의 실핏줄까지 불거졌다. 꽉 움켜쥔 양손을 책상에 올려 두고 윗몸은 앞으로 기울인 채 육장봉과 대치했다.

육장봉은 소 승상의 위협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책상 위의 절연장을 가리키며 차갑게 웃었다.

“소 승상의 글씨체가 훌륭한 건 압니다. 밖에서는 승상의 글씨체를 교본 삼아 연습하는 자도 적지 않은데, 이 절연장은…… 분쟁의 여지가 있겠군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

소 승상은 자신의 얄팍한 꼼수가 육장봉에게 바로 들켜 버리자,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가 났다. 육장봉 같은 무식쟁이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비웃으며 책상 위의 절연장을 들고 흥미진진하게 훑어보았다.

“승상께서는 저처럼 무식한 군인 나부랭이는 문인들의 이런 꼼수를 모를 거로 생각하셨나 봅니다?”

“자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육장봉에게 들켰다 해도, 소 승상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도 부끄러운 일인 줄은 알고 있었으니까.

육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깜빡하고 말씀을 안 드렸군요. 제 스승님은 임연(臨淵) 선생이십니다.”

임연 선생은 선황께서 현 황제의 교육을 위해 친히 모셔온 유명한 스승이었다. 육장봉이 그의 제자라면 높은 학식을 갖춘 것도 당연했다. 소 승상의 꼼수 따위는 육장봉 앞에서 아무 소용없었다.

“오, 그럼 정말 축하할 만한 일이로군.”

소 승상의 얼굴에 순간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곧 침착함을 되찾고 육장봉을 평온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모습이었다.

승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소 승상의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지는 육장봉도 잘 알고 있었다. 더는 말을 섞기 싫어 절연장을 다시 건네주었다.

“소 승상, 얼른 지장을 찍으십시오!”

“육 장군이 역시 일 처리가 주도면밀하구먼.”

소 승상은 이를 악물고 지장을 찍었다. 그리고 절연장을 육장봉에게 던져 주었다.

“이 일은 끝났네. 육 장군이 약속대로 그 증인을 처리하고 일을 마무리하게.”

소 승상은 육장봉이 말한 그 북요 귀족을 잊지 않고 있었다.

“허!”

육장봉은 절연장을 받아 한 번 살펴보고,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챙겨 넣었다. 그러다 소 승상의 말을 듣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소 승상, 뭔가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읊어볼까요?”

그가 언제 소 승상과 약속을 했단 말인가. 이 편지들을 소 승상에게 넘겨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승낙한 게 없었다. 고작 절연장 한 장으로 그에게서 두 가지 이득을 보려는 것은 욕심이 지나쳤다.

“육장봉, 이랬다저랬다 할 텐가?”

소 승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큰소리로 꾸짖었다.

“승상께서 싫으시면 편지는 남겨 두시고, 절연장을 가지고 가십시오. 저는 절대 남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장봉은 굳은 얼굴로, 한 마디 한 마디 가볍게 말했다. 위협적인 단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닦아낸 소 승상의 이마에는 다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이를 악물고 화를 억누르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육 장군, 그 북요 귀족은 누구인가? 좀 알려 주게나.”

‘육장봉은 자기가 아니면, 정말 나한테는 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하나?’

“그럼 무엇과 바꾸실 겁니까?”

육장봉은 몸을 뒤로 젖히고 소 승상을 바라보았다.

“그저 이름일 뿐이잖은가. 이 정도 사정도 안 봐주나? 내 딸이 곧 자네 제수가 되면, 우리 두 집안도 사돈이 되네. 한 가족처럼 친밀하진 않더라도, 우리 소씨 가문에서 망신스러운 일이 생기면 육씨 가문도 난감하지 않겠나? 육 장군이 날 도와주는 게, 결국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게 아니겠나?”

그의 딸이 아무리 부족하다 해도, 황제가 직접 혼사에 관한 성지까지 내려 주는 귀한 아가씨였다. 육씨 가문, 아니 육비우는 거절할 기회조차 없었다.

“소 승상의 따님이 육씨 가문에 시집이나 오고 나서, 사돈이라고 하시지요.”

육장봉은 소 승상이나 육비우나 똑같이 신경 쓰지 않았다. 소 승상은 고작해야 잠시 육비우의 장인 노릇을 하게 된 것뿐이다.

그런데 사정을 봐 달라니, 소 승상도 보통 염치없는 게 아니었다.

“육 장군, 그게 무슨 말인가?”

소 승상은 그의 말에서 육장봉이 소씨 가문과 사돈을 맺지 않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의 딸과 육비우는 황제가 직접 혼사를 내렸다. 만약 두 사람의 혼사를 깨려면, 둘 중 한 사람이 큰 잘못을 저질러야만 했다.

육장봉의 성격상, 육비우가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그가 육씨 가문의 발목을 잡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은 소 승상의 딸이 저질러야만 했다. 육장봉이 딸의 약점을 잡았으니, 그녀의 신세를 망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지?’

육장봉은 소 승상의 물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서랍에서 장부를 꺼내 넘겨주었다.

“아무래도 승상께서는 육비우라는 사위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침 승상의 사위가 밖에서 진 빚이 있는데, 대신 갚아 주시면 되겠군요.”

“이게 뭔가?”

소 승상은 장부를 받아서 펼쳐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잘했군, 잘했어! 역시 내 사위답군. 일을 참 잘했어!”

육비우가 월씨 저택을 부순 사건은 비밀이 아니었지만,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날, 육비우는 호기롭게 쳐들어갔다가 처참하게 줄행랑을 쳤다. 많은 사람이 자세한 내막도 모르거니와, 육씨 가문의 불만을 일으킬까 걱정되어 함부로 소문을 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소 승상은 육비우가 사람을 데리고 월씨 저택을 부순 일을 모르고 있었다.

육장봉은 시선을 약간 떨군 채 말했다.

“승상께서 만족하신다면, 그 잘난 사위 대신 이 돈을 갚으시면 되겠네요.”

오후, 그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월씨 가문에서 빚을 독촉하러 왔었다고 했다. 그들더러 빨리 빚을 갚으라고, 갚지 못하겠으면 차용증이라도 쓰라고 했다.

월령안이 지금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것쯤은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빚으로 꼬투리를 잡아 육장봉을 괴롭히고 있었다.

처음에는 월령안이 정말로 기가 죽어 싸울 의지를 상실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돌아오자마자, 월령안이 이렇게 큰 기쁨을 줄 줄이야. 정말이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돈을 배상하라고 하자, 소 승상은 태도를 싹 바꿨다. 그는 손에 든 장부를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건 육씨 가문의 일인데 내가 왜 배상을 하겠나. 육 장군, 농담이 심하네.”

육장봉에게 더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소 승상은 바로 작별을 고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내 그만 가보겠네.”

“정말 다시 생각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저 십몇만 냥으로 안심(安心)을 사실 수 있는데요.”

육장봉은 무심하게 말했다.

육장봉은 그 북요 귀족의 신분을 소 승상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물론, 이 돈을 낸다면 조금 알려주는 것이야 괜찮긴 했다. 정보를 사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이까짓 사소한 일에, 육 장군이 수고할 것 없네.”

소 승상은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북요 귀족의 이름쯤이야, 육장봉이 말 안 해도 딸에게 물어 알아내면 그만 아닌가? 육장봉은 정말로 자기가 아니면, 이 소희가 일을 끝내지 못할 거로 생각하나?’

“정말 아쉽게 됐습니다.”

육장봉은 말로는 아쉽다고 했지만, 얼굴에는 전혀 그러한 티가 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저도 더는 붙잡지 않겠습니다. 소 승상, 살펴 가십시오.”

“육 장군에게 폐는 그만 끼치고 일어나겠네.”

육장봉에게 자신을 배웅할 뜻이 전혀 없어 보이자, 소 승상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속으로는 무례하다고 욕했지만,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까도 육장봉이 몸을 일으켜 그를 맞이하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배웅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소 승상은 편지함을 들고 육씨 저택을 나섰다. 가마를 타고나서야, 자신이 그 짧은 시간에 육장봉의 일 처리 방식에 적응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닌데.’

이는 오늘 밤 그가 줄곧 육장봉에게 끌려다녔다는 것을 의미했다. 완전히 그의 뜻대로 놀아난 셈이었다. 자신의 모든 대응도 그의 예상대로였다는 말이 된다.

여태껏 소 승상은 태산처럼 꿈쩍 않고 있어도, 모든 관리가 그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은 젊은이 하나에 끌려다니고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소 승상은 얼굴이 굳어진 채 손에 든 편지함을 꽉 움켜쥐었다.

“육장봉, 내가 너를 너무 만만히 봤구나. 이번 한 번은 내가 당했다만, 내가 손해 본 건 아니다!”

‘하지만 절대 다음은 없다! 육장봉은 다시는 내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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