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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73)화 (73/1,004)

73화 교환의 조건

서재에서 하인의 보고를 받은 육장봉은 소 승상이 그랬던 것처럼 화청에서 기다리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사람을 시켜 소 승상을 서재로 불러들였다.

“승상, 장군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밖으로 모시러 나온 육이는 소 승상도 아는 얼굴이었다. 소 승상은 육이를 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희 댁 장군은 내가 찾아오리라고 미리 짐작했나 보구나. 일찌감치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시다?”

그는 육장봉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격으로 자신을 밖에서 기다리게 할 줄 알았다. 예상외로 육장봉은 눈치가 제법 있었다.

“승상, 별말씀을요. 지금은 우리 장군께서 책을 읽으시는 시간입니다. 나리께서 때마침 이 시간에 오셨을 뿐입니다.”

육이는 비굴하지도 건방지지도 않게 말했다.

‘장군이 일부러 준비하고 기다릴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걸.’

“흥!”

또 한 번 체면을 구긴 소 승상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비쳤다. 육이를 비롯한 육씨 저택의 하인들은 하나같이 무술을 익혀서 튼실하고 힘도 셌다. 조금 전 그가 하인을 밀쳤을 때 꿈쩍도 하지 않던 것이 생각나자, 마음속의 울화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무예나 익힌 놈들하고는 실랑이할 수는 없지!’

육씨 저택은 네모반듯했다. 가산이니, 화원이니 하는 것도 없이, 화랑을 가로지르면 끝까지 훤히 보였다. 육이의 안내에 따라 소 승상은 긴 화랑을 지나갔다. 연무장(演武場)과 홍예문을 지나자, 육장봉의 서재가 보였다.

서재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밖을 호위병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육장봉의 친위대 같았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너희 장군은?”

소 승상은 홍예문 아래에 멈춰선 채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내가 직접 방문했는데 마중을 나오지도 않다니. 예의도 모르나?’

“장군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육이는 아주 영특했다. 단번에 소 승상이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소 승상은 그의 장군이 친히 나와서 맞이하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

하지만 소 승상은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했다.

‘장군부에서 거드름을 피우다니. 정말 염치도 없지!’

“흠! 그럼 가지.”

육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소 승상은 체면을 중히 여기다 보니 당장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굳은 얼굴로 서재에 들어갔다.

“승상, 들어가시지요.”

입구에 서 있던 두 호위병이 소 승상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소 승상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턱을 넘어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에는 유리 등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초와 유리를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유리 등갓이 빛을 반사하여 서재는 대낮처럼 환했다.

소 승상은 문턱을 넘었지만, 급히 들어가지 않았다. 문 입구에 잠시 멈춰 서서, 육장봉이 나와 맞이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소 승상은 또 한 번 김이 빠졌다. 육장봉은 손에 두루마리를 든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들어왔는데도, 일어나 맞이하기는커녕 엉덩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 고개만 까딱거리더니 말했다.

“소 승상, 책상 위에 놓인 것부터 읽고 다시 얘기하시지요.”

“그게 뭔가?”

소 승상은 그제야 육장봉의 맞은편 자리에 놓인 나무함을 발견했다. 그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육장봉은 책장을 넘기더니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책을 읽었다. 소 승상이 방문했다고 해서, 읽던 책을 내려놓거나 하지는 않았다.

소 승상은 여태껏 이런 푸대접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황제도 그를 대할 땐 항상 예의를 갖추었다. 사적으로 만날 때에는, 예를 올리기 전에도 황제가 미리 두 팔을 내밀어 부축해 주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정말이지 너무 오만불손했다.

소 승상은 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추밀원 두 관리의 말을 떠올리자, 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이 믿는 구석이 있으니 이토록 겁이 없는 것이겠지. 대체 육장봉이 쥔 패가 무엇일까?’

소 승상은 화를 내며 육장봉의 맞은편에 앉아 나무함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 편지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편지의 봉투에 써진 이름이었다. 소 승상의 딸 이름이 북요의 글자로 적혀 있었다.

여기 오기 전, 자신이 물었을 때 함연이의 어색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약 내 예감이 사실이라면…….’

소 승상은 당황하여 육장봉에게 화났던 것조차 잊어버렸다. 서둘러 나무함 안의 편지들을 꺼내 읽었다. 절반도 읽기 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충 읽은 뒤, 두 번째 편지를 꺼내 들었다. 두 번째 편지를 펼치자마자, 딸의 글씨체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 승상은 딸에게 북요 말과 글을 직접 가르쳤다. 딸이 글을 쓸 때의 소소한 버릇들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버릇들이었다.

“고얀 것!”

소 승상은 욕을 하고 세 번째 편지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한 번 훑어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으며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이게 사실일 리가 없어!”

그는 입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 또 새 편지를 뜯어보았다.

“함연이 얘가…….”

네 번째 편지를 뜯어본 소 승상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기운이 쭉 빠져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내 딸이 어떻게 이런 일들을 저질렀단 말인가?’

소 승상은 입술을 덜덜 떨면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자학이라도 하듯 나무함 안의 편지를 일일이 뜯어서 자세히 읽어 보았다,

나무함 안에는 총 열아홉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전부 그의 딸과 북요의 한 귀족 남자가 주고받은 편지들이었다.

이 편지들을 주고받은 시간 간격은 크지 않았다. 첫 번째 편지는 그녀가 도망치기 전, 그 북요의 귀족이 그녀에게 쓴 것이었다.

편지에는 온통 노골적인 정담뿐이었다. 그 속에는 육장봉을 깔아뭉개는 뜻이 다분했다. 그 북요인은 소함연에게 자신은 신분이 고귀하니, 더 좋은 미래를 줄 수 있다며 함께 도망치자고 꼬드겼다.

소함연의 답장도 똑같이 노골적이었다. 그녀는 육장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를 위해 파혼하고 도망치겠다고 했다. 그와 변방에서 만나기로 약속도 잡았다.

세 번째 편지는 그 전의 편지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쓰였다. 소함연이 변방에 팔려 갔다가 육장봉의 군대에 구출된 뒤에 쓴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함연이 상대방에게 먼저 썼다.

소함연은 편지에서 오는 길이 아주 힘들었고, 그를 아주 그리워한다고 했다. 편지 끝부분에는 육장봉에게 구출되어, 지금은 군대에 있다고 했다. 육장봉이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낼 예정이니, 낭군님이 얼른 구하러 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네 번째 편지는 그 북요 귀족의 답장이었다. 기회를 봐서 구하러 갈 테니 소함연에게 병이 난 척하며 군대에 남아 있으라고 했다. 그녀를 구출한 뒤, 북요의 황제에게 혼사를 내려 달라고 요청하겠다고 했다.

소함연은 상대의 요구대로 군대에 남아 있었다. 군에 머무른 일 년 동안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빈번했다. 북요 귀족은 소함연에게 편지를 많이 썼다. 전부 사모의 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으며,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계획도 들어 있었다.

고작 이 정도였다면 소 승상도 화가 나긴 했겠지만,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편지들이 외부로 유출된다 해도, 기껏해야 소함연의 명성이 바닥을 치고 시집을 못 갈 뿐이었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자신이 함연이를 평생 데리고 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후반부의 편지 몇 통이 큰 문제였다. 전부 북요 귀족이 소함연에게 군대 간부로부터 정보를 몰래 훔쳐보고 알려달라고 구슬리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소함연은 정말 그대로 하고 말았다!

그녀는 북요 귀족의 지시대로 육비우를 꼬드겨 적지 않은 정보를 알아냈다. 그리고 편지로 북요 귀족에게 몽땅 알려주었다.

게다가 군사 정보에 관한 편지는 수십 통이나 되었다.

일 년 뒤, 소함연은 육장봉을 연모하게 되었으니 그 북요 귀족과 연락을 끊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더는 그에게 편지를 쓰지도,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겨우 편지 왕래가 끝났다.

마지막 편지 세 통에서 북요 귀족은 소함연에게 계속해서 정보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하고, 그녀가 군사 정보를 넘겼다고 고발하겠다며 협박했다.

하지만 소함연은 마지막 세 통의 편지를 받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변방에 계속 있지도 못했을 것이고, 돌아와서도 소 승상에게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편지들……”

편지를 전부 읽고 난 소 승상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마치 물에 빠졌다가 구출된 사람 같았다.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진 듯, 손을 덜덜 떨며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 편지 몇 통만으로도 소씨 가문 사람들의 목숨을 전부 앗아갈 수 있었다. 황제가 그를 믿어 준다면 겨우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관직과 명예는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소씨 가문이 완전히 망하겠구나!’

“보아하니, 승상께서는 이 편지들이 진짜임을 파악하셨군요.”

소 승상이 편지 열아홉 통을 읽을 동안 육장봉도 오늘 읽어야 할 책들을 다 읽었다. 그는 금박으로 만든 장검 모양의 책갈피를 꺼내어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렇게 화려하면서도 실용적인 책갈피는 월령안이 준비한 것이 뻔했다.

금박으로 만든 장검은 완전히 육장봉의 능소검(凌霄劍)을 본떠 만든 것이었다. 구리를 섞은 금박은 재질이 단단했고, 작은 검 모양은 독특했다. 심지어 진짜와 똑같이 검을 빼낼 수도 있었다.

육장봉은 한 번 보더니 싫지는 않았는지 계속 쓰고 있었다.

소 승상도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사람이었다. 편지의 내용에 놀라 넋이 반쯤 나갔지만, 곧 냉정함을 되찾았다.

‘이 편지들을 황제가 아닌, 내게 사적으로 보여준 것을 보면 따로 원하는 게 있다는 거겠지.’

유씨의 관이 도둑맞은 사건을 떠올리자, 소 승상도 마음속에 계산이 섰다.

‘이 세상에서 하려고만 들면 해결 못 할 일은 없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고, 자세를 바로 해 앉았다.

“육 대장군, 이 편지들을 무엇과 바꾸고 싶나?”

“소 승상과 계실의 절연장(絶緣狀)을 원합니다!”

육장봉은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원하는 것을 말했다. 애초에 소 승상과 협상할 생각은 없었다.

육장봉이 이 편지들을 가지고 절연장 하나만 요구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관대한 행위였다. 하지만 벼슬자리에 오래 있었던 소 승상은 이런 단도직입적인 담판보다는, 시시콜콜하게 협상하는 쪽이 더 익숙했다.

그래서 그도 육장봉의 요구가 퍽 관대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바로 응낙하지 않고 말했다.

“이 함 속의 편지가 전부라는 걸 내 어찌 알겠는가? 빠뜨린 것이 있다면 어쩔 텐가?”

“그럼 소 승상의 운수가 사나운 것이겠지요.”

육장봉은 양손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몸을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매우 위협적인 자세로 소 승상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소 승상, 전 지금 협상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겁니다. 계실(繼室)과 인연을 끊으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절연장을 쓰시고 그 편지들을 가지고 떠나십시오. 안 하실 거면 그 편지들은 추밀원에 넘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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