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가짜도 진짜가 되겠지요
사실 월령안 어머니의 시신이 이쪽에 있어도 문제였다.
월령안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시신을 돌려받는다고 해도, 황제가 제대로 처리해 주지 못한다면, 결국 시신은 소 승상의 손에 되돌아갈 것이다.
소 승상에게는 후처의 시신을 되찾는다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황제가 탄식했다.
“짐도 계안이가 잘못한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이미 저지른 일을 짐이 어쩌겠느냐?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이번 일을 계기로 월령안에게서 철광산에 대한 소식을 얻을 수만 있다면, 짐도 염치 불고하고 소 승상과 얘기해 보려 했었다. 그런데 너도…….”
황제가 조계안에게 눈을 부릅떠 보이더니 한탄했다.
“고작 이까짓 일을 계안이가 망쳐 버렸구나. 이러면 짐도 소 승상에게 입을 열 수가 없게 되었잖느냐.”
소 승상 계실의 시신을 훔쳤다. 이건 그의 체면을 깎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소 승상의 얼굴을 엉덩이로 깔아뭉갠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시신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황제가 직접 나서서 소 승상에게 원통하겠지만 참아 달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계안은 아무 조건 없이 시신을 월령안에게 돌려주려 했다.
‘만약 소 승상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짐이 뭐라고 해야 할까? 월령안에게 시신을 양보하라고, 무슨 수로 설득하라는 말인가?’
“저…… 아니지, 왜 제 잘못이란 말입니까? 저는 일을 이렇게 키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황형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잖습니까!”
조계안은 절대 이런 누명을 인정할 수 없었다.
육장봉은 무표정하게 조계안을 흘겨보았다.
“벽에도 귀가 있다고 했습니다. 월령안이 어머니의 시신을 되찾으면, 언젠가는 청주로 운구해서 아버지와 합장할 겁니다. 조왕께서는 소 승상이 알지 못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소 승상이 알게 되는 날에는, 후환이 끝이 없을 겁니다.”
“하!”
조계안이 냉소했다.
“소희(蘇熹) 그 영감탱이가 감히 나한테 손쓸 수나 있겠나?”
“그자가 조왕께는 손을 쓰지 못해도, 월령안한테는 할 수 있지요. 조왕, 월령안은 일개 여자 상인일 뿐입니다. 소 승상이 조왕을 어쩌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월령안 부모의 무덤을 파헤쳐서 월령안 어머니의 시신을 가져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정정당당하게!”
육장봉은 월령안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어쩔 수 없이 ‘비굴’하게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 일에서는 월령안이 이성으로 따지든 감정으로 따지든 모조리 불리했다. 소 승상과 대적하면 그녀가 질 것이 뻔했다.
조계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무슨 방법이 있나?”
육장봉이 대답했다.
“우리 군마는 평범하지요. 월령안을 통해 훌륭한 종마를 살까 합니다.”
월령안이 육십이에게 하곡(河曲)의 오추마를 주기로 했다. 육장봉은 이김에 다른 친위대에게도 모두 하곡의 오추마를 줄 생각이었다.
황제는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소 승상 쪽은?”
“신이 해결하겠습니다.”
육장봉은 자신이 떠안기로 했다. 조계안이 해결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그럼 이 일은, 장봉이 네가 수고해야겠다.”
육장봉이 이 뜨거운 감자를 받아 쥐자, 황제는 몰래 한시름을 놓았다.
반면 조계안은 기가 막혀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아니지, 육장봉. 좀 너무한 거 아닌가? 힘들게 시신을 훔친 사람은 나인데, 결국 좋은 일은 네가 한 게 되잖아?”
육장봉이 이 일을 해결하면, 월령안이 얼마나 감격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럼 네가 소 승상을 찾아가든가?”
육장봉이 가차 없이 말했다.
조계안은 말문이 막혔지만,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어. 네가 해.”
그전에는 머리에 열이 올라, 시신을 훔쳐내 월령안을 기쁘게 하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냉정해진 지금, 다시 생각하자 모든 게 분명해졌다.
시신을 훔치는 건 가장 간단한 일이었다. 그가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월령안이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돈만 뿌리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소 승상이 어떻게 시신을 포기하게 할지가 관건이었다.
조계안의 공식적인 신분은 고작 추밀원 부사였다. 그 신분으로 소 승상을 찾아가면, 소 승상은 분명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설령 조왕의 신분으로 찾아간다 해도, 소 승상이 체면을 봐줄지는 미지수였다. 소 승상이 방자하여 조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소 승상 쪽에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이성으로 보나 감정으로 보나, 조계안에게는 아무런 명분이 없었다. 심지어 관을 훔쳐낸 데에서부터 일단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었다.
육장봉이 이 일을 떠안았으니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황제는 육장봉이 후회할까 두려웠다. 한편으로는 조계안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까 두려웠다.
“장봉아, 월령안 어머니의 관은 광원사(廣源寺)에 안치해 두었다. 그 관은 네가 처리할 것이라고 일러두겠다.”
사실, 조계안이 월령안 어머니의 관을 훔쳐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황제도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이미 훔쳐낸 이상 도로 돌려놓자니 조계안의 체면을 깎는 일이고, 황제 자신의 체면도 구기는 일이었다. 그런데 도로 가져가지 않으면, 어떻게 처리할지도 큰 근심거리였다.
만약 소 승상을 설득하지 못하고, 바로 월령안에게 관을 넘겨준다고 해 보자. 소 승상은 기필코 월령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조계안은 월령안을 도운 게 아니라 근심거리만 만들어 준 꼴이 된다.
지금 육장봉이 떠안겠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육장봉은 조계안 쪽을 슬쩍 훑어보고는, 황제에게 말했다.
“이 일은 될수록 빨리 해결하는 게 좋습니다. 신이 당장 소 승상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래. 결론이 나면 늦게라도 입궁해서 짐에게 알려다오. 그럴 틈이 없거든 사람을 시켜 소식을 전해도 된다.”
골치 아픈 문제를 넘겨준 황제는 날 듯이 홀가분했다.
그러나 조계안은 기분이 찜찜했다. 어두운 얼굴빛을 한 채 말없이 한쪽에 서 있었다. 온몸에서 음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육장봉을 보내고 난 황제는 아직도 자신에게 날을 세우는 조계안을 보고는 탄식했다.
“계안아, 이미 해결된 일 아니냐. 왜 또 언짢은 게냐?”
조계안은 냉랭하게 황제를 쳐다보고는 한마디 했다.
“황형, 인자한 군주라는 간판을 오래 달고 있다 보면, 가짜도 진짜가 되겠지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조계안은 황제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자리를 떴다.
‘내가 나서서 소 승상에게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형은 할 수 있잖아? 황형은 자신의 명예를 아끼느라,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하는 것뿐이다.’
황제는 넋이 나간 채로 한참이나 서 있었다.
* * *
궁에서 나간 육장봉은 곧장 소 승상의 저택으로 갔다.
소 승상은 육장봉이 만나러 왔다는 소리에 어리둥절했다. 바로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육 대장군께 나는 일이 바빠 대장군을 만날 시간이 없다 전하거라.”
‘월령안의 편을 들어 내 체면을 구겨 놓더니. 인제 와서 만나자면 만나줄 줄 아나? 육장봉은 대장군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나 되는 줄 아는 모양이군?’
“육 대장군께서 큰아가씨의 일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하인이 낮은 목소리로 전했다.
소 승상은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육 대장군을 바깥 서재로 모시거라.”
‘바깥 서재’라는 단어 하나로, 육장봉에 대한 불만을 엿보기에는 충분했다. 바깥 서재는 소 승상이 친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접대하는 곳이었다.
하인도 그 점을 깨달아, 서둘러 대답하고 나갔다.
육장봉은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바깥 서재로 가서 말없이 기다렸다. 일각이 지나도록 소 승상은 나타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육장봉은 냉소를 흘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지키고 있던 하인이 깜짝 놀라 막고 나섰다.
“대장군, 나리께서 금방 오실 겁니다.”
“필요 없다. 너희 나리께, 할 말이 있으시거든 추밀원에 가서 말씀하시라고 전하거라.”
육장봉은 하인을 밀어내고는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대장군, 대장군…….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나리께서 곧 오십니다.”
하인이 허둥지둥 뒤쫓아갔다. 동시에 가까운 곳에 있는 하인에게 어서 소 승상을 모셔오라고 눈짓했다.
하지만 하인이 아무리 불러도, 육장봉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 바깥 뜰에 이르렀다.
소 승상은 안쪽 서재에서 서예를 하고 있었다. 육장봉을 기다리게 해서 본때를 보여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한 글자도 채 쓰지 못했는데,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와 보고했다.
“나리, 육 대장군께서 가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나리께서 할 말이 있으면 추밀원에 가서 말씀하시라고 했습니다.”
뚝!
먹물 한 방울이 종이 위에 떨어지며 글자를 망쳐 버렸다.
“뭘 그리 허둥대느냐? 육장봉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놀랄 일이냐?”
소 승상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손에 들었던 붓을 붓걸이에 거칠게 걸어 두었다.
“추밀원? 육장봉은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아나? 날 위협해? 내가 진짜 자기를 두려워하는 줄 아는 건가?”
“나리. 저, 저기 육 대장군을 잡아야 할까요?”
하인이 어찌할 바를 몰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잡거라. 내가 곧 나간다고 말해라.”
소 승상은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말했다.
“네, 나리.”
하인이 대답하고 나는 듯이 밖으로 달려갔으나, 안타깝게도 한발 늦고 말았다.
육장봉은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하인이 보고하러 왔을 때, 소 승상은 바깥 서재에 도착해 있었다. 보고를 들은 소 승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사람 하나 잡지도 못하는 네놈들을 어디 쓰란 말이냐?”
“나리, 용서해 주십시오! 나리, 살려주십시오!”
하인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소 승상은 인정사정없이 하인을 걷어찼다.
“일각도 못 기다리다니. 육장봉, 자기가 뭐라고!”
소 승상은 거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빠른 걸음으로 안쪽 서재에 돌아와서 심복을 불렀다.
“육장봉이 오늘 무엇을 했는지 알아 오너라. 그리고 추밀원에 무슨 동태가 있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알아 오너라.”
육장봉은 목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추밀원을 언급했으니, 당연히 추밀원과 연관된 일이 있을 것이다.
“네, 나리!”
심복이 명을 받고 나갔다.
그러나 심복이 돌아오기도 전에, 추밀원에서 공문을 들고 사람을 체포하러 들이닥쳤다.
“추밀원 부사의 명을 받고, 죄인 소함연을 체포하러 왔소이다!”
“무슨 소리냐?”
조금 자리에 앉았던 소 승상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죄인이라고?”
“죄인 소함연은 변방에서 북요인과 밀접하게 왕래하며 적과 내통한 혐의가 있습니다. 소 승상, 이는 부사께서 서명하고 발급한 문서입니다. 보시지요.”
추밀원의 관리들이 정중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태도는 엄격했다. 전혀 사정을 봐줄 기미가 없었다.
“내 딸이 어찌 적과 내통했단 말인가!”
소 승상은 공문을 보지도 않았다.
추밀원에서 집까지 찾아와 사람을 체포할 정도이니, 이 공문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게 분명했다.
“육 장군께서 직접 추밀원에 이 일을 고발하셨습니다. 그리고 증인이든 증거이든 모두 제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승상, 저희는 저희 일을 할 뿐입니다.”
관리들은 조리 있게 설명하는 와중에 그 원인을 슬쩍 털어놓았다.
“육장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