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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69)화 (69/1,004)

69화 월령안이 널 좋아하니까

“내 기억에…… 네가 변방에 도착했을 무렵, 난 곧 출정해야 했었다. 너는 나를 붙잡고, 밑도 끝도 없이 딱 한 마디만 물었지. ‘육장봉, 도대체 승낙하는 거야, 마는 거야?’”

육장봉은 삼 년 전 그날의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었다. 그 한 장면만 기억할 정도로 짧고 바쁜 만남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조계안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으면, 그런 일이 있었던 것마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바빴었다.

육장봉은 잠깐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난 그때 서둘러 출정해야 했어. 그래서 너에게 물었지. 무엇을 승낙해 달라는 거냐고. 넌 편지에 썼다고 했고……. 편지에 뭐라고 썼느냐고 물었을 때, 넌 화를 냈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승낙해 달라고 몰아붙였지. 난 당장 출정해야 했어. 너를 빨리 돌려보내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그러마 하고 대답했었다. 내가 돌아와서 너에게 다시 물으려고 했을 때, 넌 이미 떠나고 없었어.”

“내 편지를 보지 않았다고?”

조계안은 화가 나서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갈며 말했다.

“네 편지를 받기는 했다. 하지만 읽을 틈도 없이 북요인들과 격전을 벌여야 했었지. 나중에 보니 그 편지는 피에 젖어 읽을 수가 없었고. 난 정말로 네가 편지에 뭐라고 썼는지 모른다.”

그 전투는 육장봉이 겪었던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어떻게 시체 더미에서 기어 나와 병영까지 기어 돌아갔는지, 지금까지도 기억할 정도였다.

그 전투를 겪은 뒤 자리에 계속 누워 있어야 했다. 거진 이레가 지나서야 겨우 앉을 수 있었다. 또 열흘 정도를 더 쉬고 나서야 다시 전장에 나갈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조계안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때는 적에게 맞서 출정하느라 바빴었다. 조계안이 왜 왔는지, 또 왜 금방 돌아갔는지 생각해 볼 시간과 여력이 없었다.

육장봉의 말을 듣고 난 조계안의 상태가 안 좋아졌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육장봉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로, 정말로 그 편지를 읽어 보지 않았다고?”

‘지난 삼 년 동안, 부질없이 화냈단 말인가?’

육장봉이 머리를 저었다.

“못 봤다.”

이런 일로 거짓말할 이유도, 거짓말할 필요도 없었다.

“너……!”

조계안은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육장봉의 탓도 아니란 것을 알았다. 혼자 속을 끙끙 앓을 뿐이었다.

“됐어. 너하고 말하고 싶지 않아.”

삼 년 동안 무고한 육장봉을 원망했다. 육장봉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편지에 뭐라고 썼길래?”

육장봉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쓸데없는 말이었어.”

조계안은 손을 저었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제 와서 말해 뭐 하겠어?’

이미 벌어졌고, 지나간 일이었다. 인제 와서 말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조계안이 말하려 하지 않자, 육장봉도 더는 묻지 않았다.

“할 말은 다 했고, 속도 풀렸겠지. 이젠 나가야지. 폐하께서 밖에서 기다리신다.”

“아직 나가선 안 돼!”

조계안은 바로 거절했다.

“폐하께 고집부리지 마. 아무 소용없으니까.”

육장봉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집부리는 게 아니야!”

조계안도 자신을 가지고 화풀이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육장봉이 비웃었다.

“이게 고집부리는 거 아니면, 뭐냐?”

“황형에게 배운 거다.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야.”

조계안은 두 발짝 뒤로 물러나 나무 침대에 걸터앉더니 자조하며 말했다.

“황형이 나를 어느 정도까지 총애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것뿐인데?”

육장봉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월령안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가려고?”

“응.”

조계안은 육장봉이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 여겼다. 물론 황형도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형은 자신이 밀실에서 자학하는 것을 보고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물러서지 않으실 거다.”

육장봉이 냉정하게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그래도 시험해 보고 싶어.”

조계안은 여기까지 말하자, 갑자기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얼굴의 흉터를 가리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들 황형이 날 총애하고 봐준다고 말하지.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어. 황형이 무조건 날 아끼고 오냐오냐한다고. 그래서 모든 것을 황형에게 맞춰 생각하고, 난처하게 하지 않으려고 했어……. 황형이 태평성세의 현명한 군주가 되고 싶어 하니까, 난 암황이 되어 모든 장애물을 처리했어. 황형의 바람을 위해, 난 빛도 보지 못하고, 온몸에 피 칠갑을 해가면서 황형이 하기 싫어하고, 나도 하기 싫은 일들을 해왔었지.”

조계안은 가면을 내려놓고 눈물 어린 미소를 지었다.

“내 형님이니까. 내가 원해서 그 일들을 한 거야. 뭘 더 바라는 것도 없어. 다만 알고 싶을 뿐이야……. 황형의 마음속에서 강산과 사직, 태평성대의 명군이란 이름에 비교했을 때 나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나를 어느 정도까지 총애하고 용인해 줄지 알고 싶어.”

‘삼 년 전 황형은 처음으로 나를 실망하게 했었지. 이번에는? 여전할까?’

육장봉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월령안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오고 싶다면 방법은 여러 가지다. 자학할 필요까지는 없지. 폐하도 그렇게 속 좁은 분이 아니고, 소인배도 아니다. 끝까지 시신을 가지고 월령안을 위협하지는 않으실 거다. 월령안의 수중에 철광산이 없다는 것만 확인하면, 폐하께서도 시신을 월령안에게 돌려줄 거야.”

육장봉은 조계안이 내성적이고 우울한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오늘날에 이를 때까지의 행보를 지켜봐 왔다. 또한, 자신도 조계안과 함께 피바다를, 시체 더미를 뚫고 나왔다. 조계안이 훌륭한 암황이 되기 위해, 황제 수중의 칼이 되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제도 강산이나 사직을 중요시하기는 했지만, 조계안이 자신을 위해 일한 만큼, 진정으로 자책감을 가지고 아껴 주었다.

육장봉은 조계안이 월령안의 일 때문에 황제와 척을 지지 않기를 바랐다. 이는 황제에게도, 조계안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육장봉, 넌 진짜 바보냐, 아니면 바보인 척하는 거냐? 월령안 어머니의 시신을 가지고 협박하는 사람은 나여야 해!”

황제가 어떻게 이처럼 음흉하고 비열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은 암황의 역할이었다.

조계안이 비웃었다.

“그리고 그 철광산이 황형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그래?”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철광산이 있고, 그게 월령안의 수중에 있다고 확신하는 건가?”

육장봉이 이해가 안 되어 물었다.

‘내가 이미 폐하께 가장 합리적인 증거를 보여드렸다. 그런데 왜 믿지를 않으시지?’

황제에게는 월령안의 수중에 철광산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만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진위도 판단하기 어려운 십 년 전의 정보를 근거로, 월령안이 죄를 지었다고 단정하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철광산은 분명히 존재할 거야. 바로 그해, 철광산에 관한 정보 때문에 황숙(皇叔)의 소식이 끊겼거든.”

조계안은 음울한 표정으로 차갑게 조롱했다.

“황숙의 손에 무엇을 쥐고 있었는지는 너도 알겠지. 그분이 암황 영패를 가진 채로 갑자기 실종되었어. 그 바람에 난 지금까지도 암부(暗部)를 온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철광산은 황숙의 행방과 관련이 있어. 월령안은 바로 그 유일한 실마리야. 황형이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는 않을 거야.”

“그럼 삼 년 전, 월령안이 나한테 시집온 것은 돈 버는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겠지. 그렇지?”

갑자기 육장봉의 뇌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왜냐하면, 월령안이 널 좋아하니까! 널 얼마나 좋아했나 하면…… 널 위해 모든 걸 바칠 정도였어. 전선에 병기를 보내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야. 그래도 네게 병기, 군마, 군량 전부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선에 그 모든 걸 보냈어. 그 바람에 월령안이 바보같이 흔적을 남긴 거야. 황형이 월령안을 가만둘 것 같아?”

조계안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기쁜지 슬픈지 모를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삼 년 전, 월령안을 육장봉에게 시집보내지 말아 달라고 황형에게 사정했었다. 그리고 꼭 철광산의 위치를 알아내고, 하루빨리 암위를 깔끔하게 처리하여, 황숙이 심어 놓은 사람들을 파헤치겠다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줄곧 그를 총애하고, 용인하던 황형이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육장봉에게 편지를 보내, 월령안과의 혼사를 거절해 달라고 빌었다. 변경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답신이 없자, 말 여러 필을 죽여 가면서 밤낮으로 전선으로 달려가 육장봉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자신이 원하던 대답을 얻고 다시 길을 재촉해 변경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 월령안은 이미 육씨 가문에 시집을 가, 육장봉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저지하려고 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삼 년 전 그때, 처음으로 비애와 무기력함을 느꼈다. 가장 가까운 황형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친한 친구도 그를 농락했다.

그러나 황형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황형이 한 모든 일은 종사의 안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해서였다. 황제라는 위치에서 보았을 때, 황형은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육장봉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신용이 없다고,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어긴다고.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마저도 원망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육장봉은 애초에 무엇도 약속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장봉은 조계안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변경에 돌아온 뒤, 월령안이 그를 미친 듯이 좋아한다고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았다. 그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많은 걸 희생했다고 말해 주었다.

변경에 돌아온 뒤, 그의 주변 곳곳에는 월령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만나 본 적도 없고, 존재 자체도 모르던 사람이 갑자기 그의 곁에 나타나, 일상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는 거절할 권리조차 없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사람과 일이 모두 월령안과 다양하게 엮여 있었다. 다들 수시로 그녀를 거론하고는 했다.

월령안은 줄곧 그와 아무런 접점이 없었으나, 시시각각 그의 주변에 나타났다. 귀찮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변경에 돌아온 뒤, 월령안과 몇 번은 직접 만났다. 그 몇 번의 만남을 통해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말하듯, 그렇게 푹 빠져들어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육장봉의 눈에 비친 월령안은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가 본 월령안은 남들의 말처럼 그를 그 정도로 깊이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미친 듯이 푹 빠져 있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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