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68)화 (68/1,004)

68화 저버린 약속

육장봉과 조계안은 일찍이 비밀이 없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북요로 갈 때도 둘이 함께 갔었다. 둘 사이에는 서로 못 할 얘기가 없었다. 친분만 놓고 보자면, 육장봉은 황제보다 조계안하고 더 친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조계안이 변했는지, 아니면 그가 변했는지는 몰랐다. 둘 사이는 서먹해졌고, 비밀이 생겼다. 더는 상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방을 해코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육장봉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조계안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향 한 대가 타는 시간은 길면서도 짧았다.

밀실 밖의 육장봉에게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잠깐 정신을 판 사이 시간이 다 되었다.

반면 밀실 안의 조계안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 많은 것을 생각했지만, 여전히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육장봉을 만나기 싫은 한편 나가서 한바탕 두들겨 주고 싶기도 했다.

조계안이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밀실 문을 뚫고 육장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계안, 이제 기회는 없다.”

덜컹!

조계안이 결단을 내리고 밀실에서 걸어 나왔다.

“육장봉, 그만해! 네가 준 기회가 무슨 대수로운 것이라고!”

‘이 세상에서 억울한 사람이 육장봉 하나인가! 내가 훨씬 더 억울하다고!’

퍽!

조계안이 밀실 문을 나서는 순간, 육장봉은 발로 그의 복부를 걷어차 다시 밀실에 처넣었다.

조계안은 그대로 날아가 침대와 부딪히며 넘어졌다. 얼마나 세게 차였는지 부딪힌 낡은 침대가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조계안은 욕을 하고 싶었지만, 그가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육장봉이 따라 들어와서는 밀실의 문을 닫아 버렸다.

달칵!

문이 닫히자, 모든 빛이 차단되며 밀실이 어둠 속에 잠겼다.

조계안은 흠칫하더니 버럭 소리쳤다.

“육장봉, 무슨 짓이냐?”

“여기 있는 게 좋다며? 맘껏 있어! 질리기 전에는 나갈 생각도 하지 마!”

육장봉은 조계안이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두려워하고 공황에 빠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공간에 일각이라도 더 있는 게 고통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계안 본인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남들이 그를 소중히 여겨 주기를 바라서는 안 될 것이다.

“육장봉, 미쳤구나!”

조계안은 배를 움켜잡고, 등 뒤의 침대를 짚으며 천천히 기어 일어났다.

“황형이 날 때리라고 널 불렀나?”

그가 육장봉을 때리기도 전에, 육장봉 쪽에서 먼저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조계안, 화를 자초하는구나. 폐하가 네게 가진 자책감도 언젠가는 모두 거덜 나서 없어질 거다!”

조계안이 자기와 황제의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내 일이야. 너와 무슨 상관이냐?”

조계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냉소했다. 자신이라도 기고만장하고 과격하지 굴지 않았다면, 황형의 그 성격 때문에 그는 진작 답답해서 죽었을 것이다.

“진정 그런 날이 오더라도, 네가 후회하지 않길 원해서 그런다.”

육장봉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조계안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지?’

분명, 자신이 변방에 갈 때까지만 해도 조계안은 멀쩡했었다.

조계안이 피식 웃더니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내가 뭘 후회해. 나를 포기한 너도 후회하지 않는데. 형제쯤은 여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필요 없으면 그냥 버릴 수 있지, 아닌가?”

“무슨 헛소리냐?”

육장봉은 조계안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난 이 년 동안, 조계안은 점점 더 비뚤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텐데! 네가 먼저 형제를 버렸잖아. 인제 와서 날 훈계해? 네가 그럴 자격이나 있어?”

‘형제간의 정을 먼저 뿌리친 건 내가 아니었잖아. 육장봉은 뭘 믿고 내 앞에서 잘난 체하고 당당하게 나오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나를 질책할 자격이 있더라도, 육장봉만은 그럴 자격이 없어!’

“내가 어떻게 형제를 버렸다는 거지? 제대로 말해 봐라.”

육장봉이 정색하며 물었다.

조계안은 코웃음을 치더니 건들건들 말했다.

“네가 말하라면 내가 말해야 하나? 육장봉 네가 뭔데? 신이라도 되나? 모두가 네 발치에 꿇고 네 말을 들어야 해?”

“조계안, 맞을 소리만 골라 하는구나!”

육장봉은 달려들어 조계안의 옷깃을 잡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쳐! 얼굴도 치고, 죽을 때까지 쳐보라고. 내가 죽으면 육 대장군이 신용이 없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될 테니까.”

조계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뻔뻔하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자, 육장봉은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조계안을 풀어 주고 물었다.

“조계안,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그리고 내가 왜 신용이 없어? 내가 언제 형제를 버렸어? 똑똑히 말해 봐.”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조계안에게 무엇을 약속했기에 지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전혀 기억이 없었다. 형제를 버린다는 말을 언제 했단 말인가.

“너, 잊었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어둠에 적응한 조계안은 육장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에는 조소가 어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둠에 적응한 육장봉은 조계안을 마주 보았다. 눈에는 의혹이 깔려 있었다.

“내가 뭘 잊었다는 거야?”

“삼 년 전, 네가 변방에 도착한 지 석 달 되었을 때.”

조계안이 한마디 일깨워 주었다.

육장봉은 어리둥절했다.

“무엇을?”

삼 년 전, 대군을 이끌고 변방에 도착해서부터 북요와 삼 년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 금방 변방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하루에 두 시진도 못 잤다. 눈만 뜨면 전쟁을 치렀고, 눈을 감으면 어떻게 이길까 궁리했다. 심지어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조계안의 미친 짓에 어울릴 여력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조계안을 포기했다고? 삼 년 전…….’

삼 년 전, 조계안이 변방에 온 적이 한 번 있었다. 얼굴만 보았을 뿐, 싸우지도 척을 짓지도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조계안은 왜 미친 듯이 그를 적대하기 시작했을까?

육장봉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자 조계안은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와락 달려들어 육장봉의 옷깃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육장봉, 나를 농락한 걸 잊었다고 할 셈이냐?”

삼 년 내내 되새기며 증오했다. 그런데 육장봉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 힘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기어코 육장봉을 반쯤 죽여 놓을 것이다.

“내가 널 어떻게 농락했다는 거냐? 난 삼 년 전 너와 척을 졌던 적도, 너와 싸운 기억도 없어.”

육장봉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삼 년 전, 단 한 번 만났다.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는데 조계안은 떠나갔다.

그 무렵에는 몸을 둘로 쪼개고 싶을 정도였다. 머릿속에는 온통 전쟁뿐이었다. 변경의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 망할 자식이!”

조계안은 육장봉의 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퍽!

“조금 전에 내가 널 때렸으니, 너의 공격도 한 번은 그냥 받겠다.”

육장봉은 피하지 않고, 조계안의 주먹을 오롯이 받아냈다.

“그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아?”

조계안은 노하여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장봉이 주먹을 막아냈다.

“조계안,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 난 폐하가 아니야. 무조건 널 받아 주지 않는다고. 똑똑히 말할 기회를 주마. 말하기 싫으면, 다시는 입 밖에 꺼내지 마.”

“하! 황형이 날 무조건 받아준다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황형이 정말 무조건 날 받아준다면, 왜 내가 하자는 대로 월령안 어머니의 시신을 그냥 돌려주지 않은 거지? 왜 시신을 가지고 철광산을 내놓으라고 월령안을 협박해? 월령안이 철광산을 내놓게 하려면, 너만 있으면 되잖아? 내가 고생해서 가져온 시신을 가지고, 왜 월령안을 협박하는 건데?”

조계안은 말하면 할수록 울분에 찼다. 말끝에 가서는 거의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육장봉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폐하께서도 따로 뜻이 있으시겠지.”

보아하니, 황제는 육장봉의 조사 결과를 믿지 못하고, 월령안의 수중에 철광산이 있다고 여전히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일이 성가시게 되었다.

“무슨 뜻 말이야! 황형은 네가 난처해질까 봐 나를 난처하게 한 거야! 어제저녁, 내가 월령안 앞에서 얼마나 망신을 당한 줄이나 알아? 매번 말로는 황형이 날 봐준다고 하지. 그런데 왜 자기의 강산 사직을 위해 매번 나를 희생 시키냐고!”

조계안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모두는 조계안이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군다고 생각했다.

‘총애는 무슨 얼어 죽을 총애! 내가 제멋대로 굴었다고? 분명 황형이 먼저 약속을 지키지 않았잖아!’

황제는 분명 소여방의 사생아 건을 만천하에 폭로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돌아서서는 소 승상에게 귀띔해 주어 그를 배신했다. 그 덕분에 조계안은 월령안 앞에서 완전히 체면을 구겼다. 반면 육장봉은 어부지리로 월령안 앞에서 좋은 사람이 되었다.

‘그래, 이 사건은 황형이 변명이라도 했으니 넘어간다고 치자. 그런데 내가 고생해서 빼앗아 온 월령안 어머니의 시신을 가지고, 왜 황형이 이득을 보려고 하지? 게다가 내가 직접 월령안에게 시신을 돌려주지도 못 하게 하잖아!’

“억울해?”

조계안의 원망을 들은 육장봉은 화를 내는 대신 웃고 말았다.

“진짜 억울하고, 울어야 할 사람은 월령안이 아닌가? 너는 월령안을 찾아가서 어머니의 시신을 가지고 모욕했잖아. 네 앞에서 옷을 벗고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면서? 억울해도 월령안이 억울하고, 울어도 월령안이 울어야겠지!”

육장봉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계안이 억울할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월령안은 전혀 울지도 않았고 억울함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조계안이 왜 억울할까?

“월령안이 울긴 뭘 울어? 나보고 기녀를 찾아가라고 쏘아붙이던데! 넌 월령안이 얼마나 독하게 말하는지 몰라서 그래. 그 독설이면 멀쩡한 사람도 중독시킬 수 있을걸!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니까!”

조계안은 화가 나 이를 갈았다. 그러다 갑자기 어투가 바뀌더니 으쓱해서 말했다.

“그런데 월령안은 내 앞에서만 제 본성을 드러내거든. 너희처럼 바깥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웃음꽃을 피우고 온순한 모습만 보이지.”

“조계안, 맞고 싶나?”

오늘 자기 앞에서 단정하게 예의를 지키는 모습만 보였던 월령안의 모습을 떠올린 육장봉은 가슴이 답답했다.

‘월령안은 내 앞에서 여태껏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건가?’

“하하하하하…….”

조계안은 우쭐해서 큰소리로 웃었다.

“육장봉,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날 질투하잖아!”

육장봉이 화가 나서 대꾸했다.

“시시하군!”

인정할 리가 있나.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육장봉이 비아냥거렸다.

“월령안의 독설에 화가 났다고 밀실에 숨어들어 우는 건, 대단한 건가?”

“운 적 없다. 눈이 삐었나. 네 어느 쪽 눈에 내가 우는 모습이 보이더냐?”

‘내가 울었다고?’

조계안은 열 살 이후로는 운 적이 없었다.

“보아하니 괜찮아진 모양이군. 가자, 폐하께서 널 기다리신다.”

육장봉은 조계안과 더는 실랑이하기 싫어 밖으로 나가려 했다. 걸음을 뗐을 때 뒤에서 조계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긴 어딜 가? 기억 안 난다는 한마디로 지나간 모든 것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오늘 우리 한번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자. 삼 년 전 네가 날 농락한 일말이다.”

“삼 년 전, 내가 도대체 널 어떻게 농락했단 말이냐? 난 정말 모르겠다.”

육장봉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싶은 마음을 비치면, 조계안의 성질머리로는 더욱 말해 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과연, 육장봉이 더 캐묻지 않으니, 조계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삼 년 전, 내가 너한테 편지를 보냈어. 그런데 답신이 없어, 직접 변방에 찾아가 대답을 달라고 했어. 그때 넌 분명 나한테 그러마 하고 승낙했었어. 그런데 내가 변경에 돌아와 보니, 모든 게 이미 끝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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