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어제저녁에 벌어진 사건
사람이라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녀는 조금 전에 그의 심사를 넘겨짚어,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만한 말을 고의로 했다. 이에 육장봉이 불쾌함을 느끼고 그녀를 난처하게 한다면, 그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사람이 자신의 위치와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가장 무섭고도 슬픈 일이다.
그녀는 육장봉의 마음속에서 그래도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 잘못을 대신 감당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진짜로 잘못을 인정하는가?”
육장봉이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상판을 세게 두드렸다. 그 둔탁한 소리가 무언의 경고처럼 들렸다.
월령안은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무형의 힘이 그녀의 정수리와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숨도 쉴 수 없었고, 머리를 들 힘조차 없었다.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그러나 다시 한번 땅에 엎드려 육장봉이 바란 대로 비굴하게 사죄했다.
“소녀가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합니다. 대장군께서 벌하여 주십시오!”
‘사람은 자신의 본분과 위치를 똑똑히 알아야 해. 내가 잘못한 거야!’
자신의 영리함만 믿고, 제멋대로 육장봉을 떠보지 말아야 했다. 그가 공당에 나타난 이유는, 어쩌면 그녀의 편을 들어주려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설령 그녀의 편을 들어주려고 왔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작 그 정도를 가지고 육장봉이 그녀를 특별히 여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됐다. 그의 앞에서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됐다.
그녀에게는 그럴 자격도, 지위도 없었다.
육장봉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자선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마음이 내키면 하는 것이고, 싫으면 아무도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육장봉이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도, 그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철저한 오산이었다.
‘육장봉은……. 내가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월령안은 이 순간처럼 냉철했던 적이 없었다. 자신의 처지를 아주 똑똑하게 인지했다.
지난 삼 년 동안, 육씨 가문이라는 간판을 달고, 암암리에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예의를 차려 양보해 주는 것을 누리다 보니, 그만 본분을 잊었고 말았다. 허파에 바람이 들다 못해 간이 부어 육장봉을 떠보기까지 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리라.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육장봉 같은 권력자 앞에서, 그녀 같은 사람들은 벌레나 마찬가지였다. 육장봉 같은 사람이 그녀를 죽이는 건 개미를 눌러 죽이는 것처럼 간단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죽음을 놓고 봐도 그랬다. 범인을 찾아내어 처벌하기는커녕, 해명 한마디 듣지 못했다. 두 사람이 헛되이 죽은 셈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월령안은 슬펐지만, 그 감정에 젖어 들지는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아주 냉철했다.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합니다.”
월령안은 분노도, 불만도 없었다. 육장봉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서 한마디, 한마디 잘못을 인정했다.
“대장군, 벌하여 주십시오.”
한마디 할 때마다, 머릿속이 더없이 맑아지고 냉정해졌다. 한 번 더 자신의 처지와 지위를 재확인했다. 또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분석하고, 다시는 실수해서는 안 된다고 한 번 더 일깨웠다.
“일어나시오!”
육장봉은 그의 발치에 꿇어앉아 잘못을 인정하는 월령안을 보았다. 전혀 기쁘지도, 통쾌하지도 않았다.
확실히 화가 나기는 했다. 월령안은 분명 자신을 보고서도 제멋대로 훌쩍 가 버린 데다가, 오해의 여지를 남기는 말로 그를 망신 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고 나서 미련 없이 버리는 행동에 화가 났다.
사실 월령안이 자신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도록 호된 맛을 한번 보여 주려고 하기는 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비굴하게 발치에 꿇어앉아 거듭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청하는 모습을 보자, 조금도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월령안 같은 아가씨는 그녀의 붉은 치마처럼 자유롭게 휘날리고, 세상을 밝히는 햇빛처럼 찬란하게 빛나야 했다.
지금처럼 빛을 잃고, 삶에 찌들어,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이어서는 안 됐다. 설령 자신의 앞에서라 해도.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쪽에 머리를 숙이고 겸손하게 묵묵히 서 있었다.
육장봉은 그녀를 제대로 사람 취급을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동등하게 마주 본 적이 없었다. 육장봉 앞에서 그녀는 아무 지위도 없는 일개 여자 상인일 뿐이었다. 그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존재였다.
물론 육장봉과 동등하게 대화할 자격도 없었다.
그리고 육장봉은 조금 전, 그녀에게 이 모든 이치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그녀가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월령안의 겸손한 자세와 지나친 조심스러움은 육장봉을 불쾌하게 했다.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월령안,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대장군.”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예를 올리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다만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앉지 않고, 공손하게 의자 끝에 겨우 걸치고 앉았다.
사실 월령안의 신분이라면 육장봉 앞에서 이런 자세로 앉는 게 정상이었다. 월령안뿐만 아니라, 매 원외처럼 황궁에 뒷배를 두고 있는 대상인도 그의 앞에서는 앉을 생각조차 못했다. 설령 육장봉이 자리를 권해도 지금의 월령안처럼, 앉는 듯 마는 듯한 자세로 앉아야 했다.
상인뿐만 아니라 하급 관리도 육장봉 앞에서는 모두 이러한 자세로 앉아야 했다. 사실상 그는 평소에 이런 자세를 많이 보다 보니 예삿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 월령안이 이렇게 비굴한 자세로 눈앞에 앉아 있으니 왠지 화가 났다.
‘이번에도 일부러 연기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놀란 건가?’
육장봉은 월령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불만의 흔적을 찾아보려 애썼다. 그런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적어도 그녀가 지금 어깃장을 놓는 것이지 겁을 먹지는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그럴싸한 겸손뿐이었다.
월령안은 지금 어깃장을 놓거나, 시위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월령안은…….’
군대의 장군들도 자신이 화를 내면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다리가 풀린다. 이를 생각하자 육장봉은 더는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월령안은 진짜로 죄를 받아들인 상태였다.
“월령안…….”
육장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조를 늦추고, 최대한 말투를 부드럽게 하려 했다.
“소녀, 듣고 있습니다.”
월령안이 머리를 숙인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당신……!”
육장봉의 눈썹이 더욱 일그러졌다. 지금 월령안은 아무리 보아도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불쾌해진 육장봉은 또다시 노기를 띠고 말했다.
“됐소. 내가 몇 가지 물을 테니, 사실대로 대답하시오.”
“네, 대장군.”
월령안은 여전히 온순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육장봉은 이러한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언짢아, 차라리 외면하고 말을 이어 갔다.
“어제저녁, 조계안이 찾아왔었소?”
궁에 돌아가면 반드시 조계안과 확실하게 따져 볼 심산이었다.
만약 조계안이 사고를 치지 않았다면, 모두 앞에서 월령안 때문에 체면을 잃을 일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월령안 앞에서 억울한 취급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 맞습니다!”
철광산에 관해 묻지 않자, 월령안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광산에 대한 일만 아니라면, 육장봉이 무얼 말해도 두렵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방자하게 권력으로 내리눌러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법을 지키는 좋은 상인이었다. 법도, 규정도 위반한 일이 없었다. 육장봉이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어제저녁, 무슨 이야기를 했소?”
도대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조계안은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미친 듯이 황제의 침궁으로 쳐들어가 기물을 한바탕 부숴 버렸을까.
그러고 나서 조계안은 밀실에 틀어박혀 버렸다. 아무도 보려 하지 않고, 누가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 밀실은 조계안이 어릴 적에 생활하던 곳이었다. 희미한 빛이 들 뿐, 맨 침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그 작은 밀실에 갇혔다. 그리고 육 년을 꼬박 밀실에서 지내야 했다. 조계안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조계안은 그곳에서 나온 뒤에도 오랫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햇빛도, 사람도 두려워했다.
나중에는 햇빛도, 사람들에게도 천천히 적응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것은 겉모습뿐이었다.
밀실에서 나온 뒤, 조계안은 병을 얻게 되었다.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초조해하고 긴장하다 못해 공포에 떨었다. 온몸에 경련이 일어 무력해지고는 했다.
나중에 그는 선대 암황(暗皇)의 선택을 받아, 새로운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잔혹한 훈련 끝에, 그러한 부작용들을 극복하고 보통 사람처럼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육장봉과 황제는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조계안이 모든 것을 극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의 병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절대 밀폐된 공간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매번 밀폐된 공간에서 나올 때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그런데 그러한 조계안이 월령안과 만나고 난 뒤 밀실에 틀어박혔다. 그것도 어린 시절의 악몽을 가져다준 그 밀실이었다.
황제는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조계안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밀실 안에서 문을 잠가 버렸다. 아무도 열지 못 하게 하고, 나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황제는 하는 수 없이 성 밖에 있던 육장봉을 다급히 불러들였다. 그리고 당장 월령안을 찾아가 엊저녁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월령안이 계안이에게 무슨 말을 한 거냐? 도대체 왜 계안이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밀실에 틀어박혔단 말이냐?’
황제의 명령을 받았으니, 육장봉도 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까 순천부 밖에서 분명 자신이 기다리는 줄 뻔히 알면서도, 월령안이 훌쩍 가 버리자 화가 나고 말았다. 그녀를 너무 오래 기다리는 바람에 인내심을 잃은 터였다.
그러나 월령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육장봉이 어제저녁 일을 묻자, 그녀는 눈을 들어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눈에 가득했던 조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월령안은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사실 그대로 육장봉에게 들려주었다.
“어제저녁, 조 대인이 갑자기 저의 서재에 나타났어요. 아주 힘들어 보였는데 제게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바로 승낙하지 않고 질문을 했어요.
조 대인 말로는, 제 어머니의 시신을 가져왔으니, 저와 맞바꾸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를 원하는지, 제 몸을 요구하는지를 물었어요. 조 대인은 저한테 옷을 벗으라고, 검사부터 하자고 했고요.”
여기까지 말하면서도, 월령안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반면 육장봉의 안색은 더없이 나빠졌다. 친위대도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하나같이 귀가 먹은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