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석류군
오늘은 순천부에서 제과점 사건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월령안은 가게 주인으로서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수척한 얼굴로 순천부에 갔다가는, 지은 죄가 있어 초조해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도 이 꼴로 나갈 수는 없었다. 예리한 노인이 월령안이 간밤에 제대로 자지 못한 걸 한눈에 알아챌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캐물을 게 뻔했다.
그녀는 노인을 속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속이고 싶지도,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홀로 버텨낼 수 있는 일이라면, 남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 설령 털어놓는다 해도 걱정만 끼칠 뿐, 자신의 괴로움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러니 노인까지 우울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월령안은 아침 식사를 하고, 하녀에게 화사하게 화장을 해 달라고 했다. 분으로 창백함을, 연지로 수척함을 가렸다. 또 눈썹 먹으로 눈썹을 가볍게 그리도록 했다. 눈꼬리는 살짝 올려, 눈매를 또렷하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하녀는 월령안의 요구를 듣고 세심하게 화장을 했다. 잠시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다 되었습니다!”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뜨고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느라 눈망울을 살짝 굴렸다.
순간, 거울 속의 사람이 되살아난 듯했다. 눈망울에 생기가 돌며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났다. 유난히 아름다운 두 눈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월령안은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바로 그녀가 원하던 효과였다. 월령안은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로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려는 약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재판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령 진다 해도,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어야 했다. 재판의 결과와는 별개로,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했다.
월령안은 얼굴의 화장에 맞추어, 과감한 모양의 화사한 치마로 갈아입었다. 치장을 마치고 나오자, 시중을 들던 하녀도 깜짝 놀랐다.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월령안은 가볍게 웃고 말없이 입구로 천천히 걸어갔다.
끼익.
문이 열리자 그녀의 머리 위로 햇살이 부서졌다. 눈 부신 빛 때문에 그녀의 이목구비와 자태가 흐릿하게 보였다. 마치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월령안은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건물 밖의 햇빛에 적응되고 나서야 앞마당으로 걸어갔다.
노인은 앞뜰의 화청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월령안이 빛을 등지고 화청로 들어오자 노인은 웃으며 놀려주었다.
“어디서 오신 선녀인가?”
“예쁜가요?”
월령안은 화청에 들어선 후 노인 앞에서 빙그르르 돌면서 그늘 없이 활짝 웃었다. 속상해서 밤을 지새운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 화사했다.
월령안은 그런 사람이었다. 혼자 버텨낼 수 있다면, 절대 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했다.
“뒤얽힌 용이 비단옷이 되고, 싸우는 봉황이 무늬로 깃들었네. 부용(芙蓉 - 연한 홍색의 꽃) 같은 미인이 석류로 치마를 해 입었구나(交龍成錦鬪鳳紋, 芙蓉爲帶石榴裙). 령안아, 이 석류군(石榴裙 – 붉은 치마, 당나라 시기 젊은 여인들이 즐겨 입음)을 입으니까 당나라 전성기의 미인 같구나. 양 귀비가 살아 돌아와도 너보단 못할 거다.”
노인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월령안은 활짝 웃었다. 치마가 더럽혀질까 걱정되지도 않는지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쓸데없이 허풍은 왜 떠세요. 집안 식구끼리 대충 칭찬 한마디 하면 되는 걸 가지고요.”
노인은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 그래. 대충 칭찬한 거다. 나중에 네 가게에다 석류 색깔 비단을 많이 준비해 두라고 해라. 내 장담하는데, 네가 오늘 이러고 나간다면 변경의 젊은 처자들이 꼭 석류군 하나씩 장만하려 들 거다.”
월령안은 원하기만 하면 변경의 유행을 불러일으킬 만한 능력이 있었다. 어쨌든 돈만 있으면 못 해낼 것이 없는 법이니까.
“영감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진작에 준비해 두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 이 옷을 입지도 않았어요. 이건 예전에 준비해 둔 건데…….”
월령안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요. 그런 얘기는 해서 뭐 해요.”
이 치마는 육장봉과 함께 연회에 나가기 위해 일찌감치 준비해 둔 것이었다.
육장봉이 승전해서 돌아오기만 하면 그의 아내로서, 연회에 함께 참석하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의 체면을 깎고 싶지 않았다. 육장봉의 아내는 아름다워야 했다. 게다가 그녀가 예쁘게 입고 다녀야 시선을 끌어서 유행을 이끌 수 있었다. 유행을 만들어 내야 가게의 석류색 비단을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예상했지만, 육 부인이라는 신분으로 육장봉의 곁에 설 기회는 없으리라는 것만은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자신을 예쁘게 꾸밀 능력이 있었다. 버림받은 여인처럼 처량한 꼴을 하고 다니지 않을 수 있었다.
월령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흔들었다. 말투도, 얼굴의 미소도 그대로였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하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노인은 그 짧은 망설임 속에서 그녀의 아픈 마음과 허탈함을 잡아냈다.
그러나 월령안이 남의 위로를 받으며 살아갈 만큼 연약하지 않다는 것은 노인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당사자가 더는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 하지 않으니, 노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았다.
노인은 못 본 척하고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얘야, 우리는 오늘 공당(公堂 - 관청 또는 법정의 대청)에 당당하게 나가서 멋지게 이길 거다. 그 자식들에게 우리 령안이가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렴.”
노인이 말한 ‘그 자식들’에는 육장봉도 포함되어 있었다.
월령안은 홀가분하게 말했다.
“물증은 진작에 준비해 두었고, 증인들도 다 모아 놨어요. 영감님은 집에서 좋은 소식만 기다리세요.”
남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비웃으려고 벼르는 사람들, 이 일을 빌미로 그녀의 기를 억누르려는 사람들도 곧 사라질 것이다.
“그럼 됐다. 얼른 가 보거라. 난 집에서 좋은 소식을 기다릴 테니.”
노인은 월령안의 팔을 다독거리며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네, 저 갈게요.”
월령안은 시간을 보더니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노인에게 인사를 한 뒤, 하녀를 거느리고 집을 나섰다.
월령안에게 대갓집 규수의 가녀림 따위는 없었다. 대신 빠르고 힘찬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딜 때마다 활기와 생기가 넘쳤다.
시원시원한 걸음에 따라 붉은 석류군이 나풀나풀 흩날렸다. 그 모습이 마치 빨갛게 불타는 저녁놀처럼 아름다워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노인은 점점 멀어져 가는 월령안을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세상 사람들은 육장봉이 현세의 영웅이고, 전공을 숱하게 세운 대장군이라는 것만 안다. 그러나 월령안도 자신만의 전장에서는 육장봉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몰랐다.
세상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서인지, 또는 스스로를 너무 높이 평가해서인지, 남자들은 여인이 자신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개 여성 상인보다 못하다는 사실은 더더욱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저택 밖에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월령안이 나오는 모습을 보자 마부는 얼른 앞에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아가씨.”
“예의 차릴 것 없다. 가자.”
월령안은 하녀의 부축도 받지 않고, 발판을 밟고 마차에 훌쩍 올랐다.
붉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리며 월령안의 뒤에서 완벽한 곡선을 그렸다.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치맛자락이 떨어져 내리자, 공작새가 꽁지를 활짝 펼친 듯 행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어머, 아까…… 그거 봤어? 저 여자가 입은 치마 정말 예쁘더라.”
마침 이웃집에서는 한 아가씨가 문을 나서던 참이었다.
그 아가씨는 월령안의 앞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그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뒷모습과 휘날리는 붉은 치맛자락만 보았을 뿐이다.
그 아가씨의 하녀가 훑어보고 나서 서둘러 말했다.
“저도 봤어요……. 저 아가씨가 입은 옷이 정말 예쁘네요. 하지만 우리 아가씨가 입으시면 더 아름다우실 것 같아요. 아가씨는 피부도 하얗고 기품이 있으니까, 저 붉은 치마는 아가씨께 제일 잘 어울릴 거예요.”
“그래? 그럼 우리 금수각(錦繡閣)에 가 보자꾸나. 적당한 천이 있으면 치마 한 벌 지을 만한 천을 사 와야겠어.”
하녀의 말을 듣고도 아가씨는 표정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눈에서는 우쭐거림이 묻어났다. 속으로는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월령안은 몰랐지만, 그녀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도 전부터 변경 아가씨의 눈길을 끌었다.
* * *
마부는 마차를 몰아 바로 순천부로 갔다.
거리에 나서자 사람도, 마차도 많았다. 월씨 가문은 평범한 가문이라, 마차도 아주 평범하게 푸른 유포(油布)를 씌웠을 뿐이었다. 거리에서 관리나 귀인의 마차를 만나면 피해 가야 했다.
그래서 월령안은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천부에 도착했을 때는 재판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이때, 순천부윤 유칙(劉則)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제과점을 고발한 농사꾼도 와 있었다. 제과점의 사장도 공당에서 무릎 꿇고 있었다.
공당 밖에서는 구경꾼이 많이 몰려와 있었다.
인명이 걸린 만큼, 이 사건이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과 일도 많았다. 재판 시작 전부터 청탁하러 오는 사람들도 범상치 않았다. 심지어 순천부윤의 아들에게까지 청탁이 들어갔다.
작은 사건 하나가 변경의 여러 귀인을 놀라게 했다. 순천부윤 유칙은 이 사건의 내막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공개 재판을 결정했다. 순천부윤의 공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누구의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황제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판이 열리기 전, 붉은 석류군을 입은 월령안이 사람들의 시선을 뚫고 당돌하게 들어왔다. 그녀의 등장은 모두의 이목을 확 끌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유 대인도 월령안을 보자 눈앞이 환해지는 듯했다.
물론 다른 뜻은 없었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니 순수하게 놀랐을 뿐이었다.
“송구합니다. 대인, 제가 늦었습니다.”
월령안은 공당에 들어서며 유 대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 대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문득 추밀원에서 사람을 보낸 일이 생각났다. 또 황제도 그를 불러서 이 사건에 관해 물었고, 소 승상의 아들과 그의 아들에 관해서도 물었었다.
유 대인은 순간 불쾌해졌다.
‘월령안 이 여인은 도대체 켕기는 것이 얼마나 많기에, 권세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압력을 넣었단 말인가?’
유칙은 부임한 삼 년 동안, 선한 사람을 무고하게 벌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자부했다. 물론 그 누구와도 타협한 적도 없었다.
‘제아무리 월령안의 수완이 뛰어나도, 아무리 많은 사람을 찾아가 내게 압력을 가해도 소용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유 대인은 월령안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일개 여인이 공당에 출석하면서 이처럼 눈에 띄는 복장을 한 모습이 유난히 거슬렸다.
탁!
유 대인이 경당목(驚堂木 – 옛날 판관이 재판을 진행할 때 사용하던 작은 목판. 이를 책상에 내리쳐 죄인에게 경고함)을 내리치고 엄하게 말했다.
“건방진 여인이로고! 얼른 꿇어앉지 못할까!”
그는 오늘 이 월씨 가문의 주인에게 확실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잘잘못은 진실에 따라 가려지는 것이지, 권력으로 간섭할 수는 없는 법. 일개 상인의 수완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 앞에선 먹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