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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8)화 (48/1,004)

48화 명세서대로 배상해 주세요

월령안은 육비우의 하반신을 훑어보았다. 육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지만, 짐짓 강한 척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머리를 집에 두고 나왔단 거냐?”

“드디어 말귀를 알아듣는군!”

월령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어요. 육 도련님! 돌려 말하면 못 알아들을 것 같으니까, 대놓고 말하죠. 육 도련님은 출신도 고귀하고 가문의 권세도 대단하니, 우리 집을 부숴도 난 말릴 배짱이 없어요. 도련님 기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부수라고요…….”

월령안의 말을 듣자, 육비우의 얼굴에는 바로 우쭐대는 기색이 나타났다.

‘이럴 줄 알았지. 월령안이 쫄았구먼!’

그런데 월령안이 갑자기 말을 돌렸다.

“하지만! 여기는 변경이고 법으로 다스리는 곳이에요. 우리 집 물건을 부쉈으면 배상을 해야죠! 이건 황제 폐하 앞에서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이치거든요. 내가 겁먹을 줄 알아요?”

“내가…….”

육비우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딱 한 글자 내뱉었을 때, 월령안이 말을 끊었다.

“돈이 없어 배상 못 한다는 말은 하지 마시죠. 육 도련님, 내 말 못 들었어요? 난 댁과 소함연을 맺어달라고 황제 폐하를 설득할 수 있으니까, 그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설득할 수도 있어요. 댁이 정말 소함연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면, 고분고분하게 배상하는 게 좋을 거예요. 동전 한 푼이라도 부족하면 소함연과 혼인하지 못하게 손을 쓸 테니까.”

월령안에게 거듭 협박을 받자, 육비우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월령안,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기껏해야 장사치 주제에, 황궁이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지? 황제 폐하를 설득해 성지를 내렸다니, 허풍도 정도껏 쳐야지."

‘월령안은 분명 날 겁주려고 허풍을 치는 거야. 믿으면 내가 바보게?’

“육 도련님, 보아하니…… 빚 받으러 간 사람들이 너무 봐줬나 보네.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걸 보니까 말이야.”

월령안은 가볍게 웃고 손을 들어 집사를 불렀다.

“집사, 육 도련님이 얼마나 부쉈는지 계산해 보아라.”

“예, 아가씨.”

집사는 허리춤에서 주판을 꺼내 들고 육비우의 앞에서 주판알을 튕기며 숫자를 불렀다.

“대문 한 짝이 십만 냥이요, 태호에서 난 기석(奇石)이 칠천오백 냥, 유리창 아홉 짝이 총 사천오백 냥, 소주(蘇州)에서 운반해온 상록수 세 그루가 총 삼백육십오 냥…….”

집사는 번개 같은 속도로 주판알을 탁탁 튕기며 맑은 소리를 냈다. 가볍고 또렷한 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육비우의 귀에는 목숨을 노리는 저주같이 들렸다.

육비우의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절대로 월씨 가문의 집사가 총액을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해! 일단 총액을 말해 버리면 반드시 물어내야 할 거야!’

“멍하니 뭣들 하고 있어? 빨리 안 가?”

육비우는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을 불러 도망쳤다.

“가자고! 빨리 가!”

육비우가 데려온 병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손에 든 몽둥이도 내던지고 나는 듯 도망쳤다. 그들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도합…….”

총액을 부르려던 집사는 육비우 일행이 악귀에게 쫓기듯 줄행랑을 치는 모습을 보았다.

“아가씨, 이…….”

집사는 주판알을 튕기던 손을 멈췄다. 자신이 본 광경을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육 도련님은 왜 저리 겁쟁이일까?’

“뛰어 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내 집을 부숴 놓고 튀면 끝날 줄 알아? 이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어.”

월령안은 냉소를 지었다.

‘육비우는 도망치면 끝이라고 생각하나? 내 집을 이렇게 부숴 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가버리면 그만이게? 날 너무 호구로 봤네. 너무 만만하게 봤어.’

“가서 관아에 신고해! 관아에서 현장에 와 보시라 하고, 자네는 명세서를 다시 정리해서 성 밖의 군영에 가져가서 육 대장군께 전달해 달라고 하게.”

월령안은 육씨 가문의 넷째 집안이 어떤 상황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육비우는 육씨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라는 신분을 앞세우고 다녔지만, 듣기는 좋았지만 사실상 가난뱅이였다. 절름발이 육에게 한 번 털렸으니, 넷째 집안은 백 냥도 마련하기 힘들 터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육비우에게 배상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목표는 육장봉이었다.

‘나보고 꼼수가 많다며? 그럼 그 꼼수가 얼마나 많은지 제대로 보여주겠어. 고작 말 한마디로 내 조야옥사자를 가지려 하다니, 꿈 깨시지!’

“아가씨, 만약 육 장군께 전해 주지 않겠다면 어쩌죠?”

집사는 걱정스레 물었다. 육 장군의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잘 대해 줄 리가 없었다.

“괜찮다. 관아도 있잖아? 관아에서 사람이 오면 기록을 해달라고 해. 우리 집에서 부순 물건들을 전부 기록해 둬. 만약 육 장군께 건네주려는 사람이 없다면, 관아를 통해서 전해 달라고 하면 그만이야.”

월령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육장봉에게 물건을 전해 줄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단지 그에게 수작을 부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집사는 이 두 가지 방법이 전부 통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더는 말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월씨 가문의 저택은 황성 바로 밑에 위치해 치안이 아주 좋았다. 신고하자마자 관아에서 관졸들을 보내왔다.

관졸들은 너덜너덜하게 부서진 저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건…… 도둑이 들었나?”

아무리 간이 부어도 벌건 대낮에 이렇게까지 행패를 저지를 수는 없다.

“육씨 가문의 그 비우 도련님이 기분이 좋지 않아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부순 겁니다.”

집사도 체면 따위는 상관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일은 감출 것이 못 되었다.

육비우가 사람들을 데리고 쳐들어올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전부 다 지켜보았다. 창피하다고 감춘다고 해서 감춰질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육비우가 사람을 데리고 쳐들어와 평민 백성을 괴롭혔으니, 망신을 당하더라도 육씨 가문이 당하는 것이었다. 월씨 가문 집사가 숨길 까닭이 없었다.

월씨 가문은 원래 육씨 가문의 세력에 한참 못 미쳤다.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자네들 이건 정말…….”

관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동정의 눈빛으로 집사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건 사적인 일이니 관아에 고발할 것까진 없지 않나?”

“나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들이 나리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아가씨께서는 나리께서 현장을 한번 보시고 월씨 저택의 손해가 얼마인지 입증하기만 해 달라 하십니다.”

다른 것들은 그들이 알아서 할 예정이었다.

“이게 소용이 있겠나?”

관졸들이 의아해서 물었다. 집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리, 걱정하지 마세요. 육 대장군께서는 항상 공정하고 사심이 없으셨잖습니까. 우리 월씨 가문도 그렇게 대해 주시겠지요.”

“하긴…… 육 장군이 계시는데.”

관졸들은 그 말을 듣자 월씨 가문의 계획을 눈치챘다. 마음속으로는 월씨 가문의 이러한 수단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두 가문은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제삼자는 끼어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졸들은 집사의 뜻대로 현장을 둘러본 뒤, 월씨 저택의 손실을 기록했다. 그 기록은 집사가 정리한 명세서와 같았다. 단지 관졸들의 기록에는 금액이 적혀 있지 않았다.

“기록을 두 부로 만들 테니, 한 부는 자네들이 보관하게. 문제가 있나 살펴보고 없으면 서명을 하게.”

관졸들은 기록을 마치자 한 부를 베껴 주며 집사에게 서명하도록 했다.

“나리, 감사합니다.”

집사는 읽어 보고 나서 서명을 했다. 관졸들도 도장을 찍고, 한 부는 보관하고 한 부는 집사에게 주었다.

일을 마치자 관졸들도 미적거리지 않고, 주는 은전도 마다하며 바로 떠났다.

이 월씨 저택은 보름도 되지 않아 대문이 두 번이나 부서졌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딱한 일이었다.

‘이런 돈은 받아 봤자 난감하지…….’

집사는 관졸들을 배웅한 뒤, 명세서와 관아의 도장이 찍힌 기록을 가지고 성 밖으로 나갔다.

육장봉이 군영에 있는지는 집사도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육씨 저택이 비어 있으니 물건을 성 밖의 군영에 가져다줄 수밖에 없었다.

집사는 기대를 품지 않았다. 그저 월령안의 명령에 따라 한번 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히자, 뜻밖에도 병사는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그를 육 대장군에게 안내해 주었다.

‘이렇게나 순조로울 줄이야? 육 장군이 마침 군영에 있는 데다가, 나를 만나 준다고?’

집사는 어리둥절하다가 육장봉을 만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공손하게 예를 행하고, 육장봉이 입을 열기 전에 자신이 온 목적을 먼저 밝혔다. 그리고 관아의 도장이 찍힌 기록과 그가 만든 가격 명세서를 넘겨주었다.

“육 장군, 이것들은 비우 공자님께서 망가뜨린 물건들입니다. 소인이 이미 관아에 신고해 기록을 받아왔습니다. 육 장군께서 직접 조사해 보셔도 됩니다. 또 이것은 저희가 정리한 명세서입니다. 위에 비우 공자님 손에 망가진 물품의 가격들을 표시해 놓았습니다. 비우 공자님께 사실을 확인하시고 다름이 없다면 가격대로 배상해 주시길 바랍니다.”

집사는 그래도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었지만, 육장봉 앞에서 이런 말을 하자니 목소리가 떨렸다.

오기 전에는 육장봉이 그를 만나 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전에 준비한 것도 전혀 없다 보니, 말을 제대로 했는지도 자신이 없었다. 집사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마음속으로는 아가씨의 말을 믿지 않고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너희 아가씨는?”

육장봉이 명세서를 훑어보며 말했다.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아가씨는…… 댁에서 몸조리 중이십니다.”

집사는 조금 현기증이 나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몸조리?”

육장봉이 되물었다.

“예, 예……. 아가씨가 며칠 전부터 몸이 편찮으셨습니다.”

집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아프다고? 언제부터?”

육장봉이 또 물었다.

집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앞서 말한 내용이 너무 많아, 인제 와서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월령안이 아팠던 일은 비밀도 아니었다. 육장봉이 물으니 집사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우리 아가씨께서 병이 난 지 거의 닷새가 됩니다. 그전에는 줄곧 고열에 시달리시다가 요새 좀 좋아지셨습니다.”

‘닷새? 그럼 내가 월령안을 찾아갔던 그날, 월령안이 이미 아픈 상태였다고?’

그 당시 월령안은 기운이 펄펄해 보여 아픈 사람 같지는 않았다.

‘혹시…… 나 때문에 병든 건 아니겠지?’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리고 차갑게 말했다.

“됐다! 너희 아가씨께 육씨 가문에서 가격대로 배상한다고 해라.”

“예?”

집사는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자 또다시 아찔해졌다.

“어……. 알겠습니다!”

‘조금 전에 육 대장군이 가격대로 배상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무려 십만 냥이 넘는 액수인데!

그나마 육비우가 데려온 사람들이 문짝을 하나만 부순 게 다행이었다. 두 짝 다 망가뜨렸더라면 아가씨는 이십만 냥을 불렀을 것이다.

‘아가씨가 대놓고 사기를 치는데, 육 장군도 뻔히 아시면서 왜 배상하시겠다고 하지?’

집사는 얼떨떨했다. 군영 밖으로 나와 저택으로 돌아가 월령안에게 보고할 때까지도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육 장군이 이렇게 쉽게 넘어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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