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47)화 (47/1,004)

47화 돈을 빌렸으면 갚아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겉으로는 허약해 보였지만 그녀의 모습은 세월에 닳아버린 듯 평온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육비우가 사람들을 데리고 집을 부수고 있었다. 화를 내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태평하게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육비우는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껴, 더는 부수라고 명령하지 못했다. 월령안의 평온한 표정을 보자 순간 기가 꺾이며 당황했다.

“월령안, 나, 나보고 부수라고?”

‘월령안이 이렇게도 쉬운 사람이었던가?’

지난번 육씨 저택에서의 월령안은 무척이나 표독스러웠다. 그때의 그녀는 전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에 빚을 받아낼 때도, 단순히 그의 집을 전부 비워버린 정도가 아니었다. 육씨 넷째 집안의 명성도 바닥을 치게 해, 사람마다 그들을 비웃었다.

이 이틀간 집에서 줄곧 상처를 치료했기에 망정이었다. 그 전에 집 밖으로 나갔다가는 틀림없이 크게 비웃음을 당했으리라.

그의 여동생도 요즘은 아예 문밖을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가자마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할 게 뻔해 창피하다고 했다.

육비우가 이처럼 멍청한 질문을 하자 월령안은 웃고 말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육비우의 사람들이 망가뜨린 입구의 대문을 가리키며 기분 좋게 말했다.

“며칠 전, 소씨 가문의 집사가 우리 집 대문을 망가뜨리고 문 한 짝당 십만 냥을 배상해 줬거든요. 우리 저택의 대문은 무려 이십만 냥이예요. 이건 소 승상도 인정하신 거예요. 비우 도련님도 돌아가서 돈을 보내는 걸 잊지 마시죠.”

“이따위 문짝이 십만 냥이나 한다고? 월령안, 차라리 강도질을 하지 그래?”

이 말을 듣자 육비우는 순간 당황했다. 얼굴을 붉히며 큰소리로 욕을 했다. 지금은 돈 얘기만 들어도 겁이 났다.

지난번 월령안이 빚을 받아오라며 사람을 보냈을 때, 그는 갚지 않았다. 그래도 별다른 소리가 없길래 그녀가 겁을 먹고 그냥 넘어가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튿날 오후, 건달 한 무리가 그의 집 밖에 죽치고 앉더니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는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건달 무리는 흰 천에 혈서로 ‘돈 갚아라’라고 써서 들고 있었다.

육비우는 호원에게 그놈들을 쫓아내라고 했다. 하지만 털끝 건드리지도 못했는데 이 건달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육씨 가문 도련님이 세력을 믿고 사람을 괴롭힌다!’

‘돈을 빌려 놓고 갚지도 않으면서 사람을 팬다!’

그는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육장봉에게 하인을 보내 부탁했지만, 그의 넷째 형님은 이 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관아의 사람을 부르려 했다.

관아에서 나오면 이 건달들을 내쫓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쫓겨난 그들은 혈서가 쓰인 흰 천을 들고 거리에서 큰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그는 다시 관아로 찾아갔다. 관아에서는 관졸을 보내기는 했지만,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육 도련님, 저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빚을 받아내는 자들입니다. 댁의 마님께서 직접 쓰신 차용증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장소가 길거리라서 저희도 쫓아낼 명분이 없습니다.”

육비우는 화가 나서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 와중에 상처가 덧나고 말았다.

그는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의원이 치료를 끝냈을 무렵, 일이 더 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변경 전체에 그의 어머니가 돈을 갚지 않았다느니, 육 도련님이 세력만 믿고 백성을 괴롭힌다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는 것이다.

그는 화가 나서 피를 토할 뻔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넷째 형님을 찾아갔는데 형님은 딱 한 마디만 했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

하지만 그의 집에 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실 월령안이 육씨 가문과 대놓고 맞설 정도로 간이 클 줄 몰랐다.

또 이틀을 끌었다. 월령안도 이만하면 그만둘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그 소문들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나중에는 육씨 가문의 이부인과 삼부인이 나서서 넷째 집안의 곳간을 털어서라도 빚을 갚자고 했다. 하지만 곳간은 텅텅 비어 있었고, 몇 푼 되지도 않는 가구만 약간 남아 있었다.

결국 별수 없이 넷째 집안의 집에 있는 장식품과 재산을 전부 처분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그러모아 겨우 오만 냥을 마련해 갚았다.

이렇게 되니 넷째 집안은 완전히 거덜이 났다.

육비우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월령안이 자신의 체면을 전부 깎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집안마저 거덜 냈다. 지금으로서는 소씨 가문에게 보낼 예물 비용도 마련하기 힘들었다.

집에서 이틀 정도 상처를 치료하니 겨우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육장봉이 집을 비우자, 참지 못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쳐들어온 것이었다.

‘월령안이 내 체면도 전부 구기고 우리 집안 재산까지 거덜 냈겠다! 쓴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변경에서 누가 날 사람 취급이나 하겠어?’

육비우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다. 월령안을 험악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월령안, 돈에 미친 모양이구나! 문 한 짝이 십만 냥이라니, 차라리 강도질을 하라고!”

“강도질은 법에 어긋나죠. 그리고…… 강도질로는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없거든요.”

월령안은 육비우의 겁먹은 모습을 보자 참지 못하고 비웃었다. 돼지 족발처럼 칭칭 처맨 손을 들어 옆에 있는 돌을 가리켰다.

“태호석(太湖石 – 조경용으로 자주 사용되는 중국 타이후호에서 나는 돌)인데…… 그때 내가 배 한 척에 실을 만큼을 샀었죠. 운임까지 칠천오백 냥이 들더군요. 유리창도 주씨 가문의 것을 산 거예요. 주씨 가문에서는 황실에 전문으로 납품하는데, 창문만 한 유리는 한 장에 오백 냥은 줘야 해요. 비우 도련님, 도련님네 사람들이 내 유리를 몇 장이나 깼죠?”

“허, 깼으면 깬 거지. 왜, 나한테 감히 배상이라도 받아내게?”

육비우는 몇백 냥이니 몇천 냥이니 하는 말을 듣자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설마 월령안이 정말 배상하라고 하겠어? 아, 아니겠지!’

그는 육씨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고, 월령안은 일개 여자 상인일뿐이었다.

‘감히 나한테 배상하라니! 무슨 배짱으로 나와 척을 지겠어? 분명 나를 겁주려고 하는 말일 거야. 절대로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돼!’

“소씨 가문 사람들도 내 문을 부수니까 배상해 주던걸요. 비우 도련님이 도련님의 장인어른보다 더 대단한가요?”

월령안이 부드럽게 웃자 육비우의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월령안이 아무래도 좀 수상한데…….’

갑자기 사람을 데리고 월씨 저택을 부수러 온 것이 후회되었다. 게다가 사전에 적당한 이유를 생각해 두지 않은 게 더욱 후회되었다. 월령안에게 괜스레 약점을 잡혀 버린 꼴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후회로 묻어두고, 육비우는 여전히 강경한 말투로 말했다.

“월령안, 오늘 여기서 말해 두는데, 너희 집은 내가 부쉈다! 돈은? 난 없어! 나더러 배상하라고? 어림없지!”

월령안은 전혀 화내지 않고 활짝 웃었다.

“비우 도련님, 여기는 월씨 저택이지 당신네 육씨 저택이 아니에요. 여기서 당신을 봐줄 사람은 없어요. 돈도 없으면서 사람을 데리고 집을 부수러 왔다고요? 배상할 돈이 없어요? 육 씨 도련님, 날 하루 이틀 봤어요?”

‘육비우가 나한테 아직 덜 당했나 보네?’

아무래도 그녀가 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린 도련님에게 인간의 도리를 제대로 가르쳐 줘야 할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툭하면 쳐들어와 문을 부술 테니 말이다.

“흥, 월령안, 네가 감히 날 어쩔 건데?”

육비우는 조마조마했지만, 여전히 입으로는 강한 척했다. 월령안 앞에서 약한 티를 내려 하지 않았다.

“비우 도련님 말씀이 맞아요, 내가 그쪽을 어찌할 순 없지만…… 이 세상에 널린 게 사람인데, 도련님을 혼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겠죠.”

월령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육비우를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도련님과 소함연의 혼인 성지가 왜 내려졌는지 알기나 해요?”

‘이렇게 멍청해서야. 육씨 가문처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보호받았기 망정이지 다른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몇 번이고 죽었을 걸.’

“설마 네가 부탁해서 받은 건 아니겠지?”

월령안이 왜 갑자기 그와 소함연의 혼사를 들먹이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월령안을 비꼬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으니까.

예상밖으로 월령안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안됐지만, 그게 맞아요.”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육비우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월령안을 흘겨보았다.

그는 월령안이 음흉하고 호락호락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멍청하지 않았다.

‘월령안이 어떤 신분이라고? 아직도 주제 파악이 안 되나?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자기가 나와 함연이의 혼사 성지를 받아냈다는 걸까? 진짜 뻔뻔하긴!’

“생각해 보세요. 나 말고 또 누가 치정에 빠진 두 사람을 묶어 줬겠어요?”

월령안은 말을 하며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육비우는 육장봉이 아니었다. 존중할 필요가 없었다. 이 멍청한 자식은 존중할 가치도 없었다.

육비우는 순간 어리둥절해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연신 고개를 저었다.

“난 안 믿어!”

“믿을 필요 없어요. 그저 알려주는 거예요. 내가 황제 폐하께 혼사를 내려달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성지를 거두어 달라고도 할 수 있겠죠. 어때요?”

육장봉이 그녀더러 온통 요령만 피우고, 남의 마음을 이용하는 재주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그에게 어떤 게 꼼수인지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육장봉을 어찌할 순 없어도, 그의 어리석은 사촌 동생 하나 처리 못 할 이유가 없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육비우는 이를 악물었지만, 마음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엉덩이의 상처도 점점 더 아파져 왔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소함연과 그렇게도 혼인하고 싶어요?”

“당연하지!”

삼 년 전, 변방에서 함연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반했다.

“소함연이 좋아하는 사람이 육장봉이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육비우를 바라보는 월령안의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치 육비우를 통해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는 사랑에 눈이 먼 어리석은 인간은 늘 넘쳐났다.

“월령안, 이간질 그만해! 함연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나와 함연이의 삼 년간의 사랑은 네가 몇 마디 말로 갈라놓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육비우는 자신감에 차서 말했다.

“그렇다면 댁과 소함연을 맺어주죠. 열심히 사랑의 꽃을 피워보라고요.”

육비우 같은 인간은 정말 멍청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 멍청해서 말도 섞기 싫었다. 말을 해 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게 뻔했다.

월령안은 아직 몸이 허약해서, 몇 마디 했을 뿐인데도 기운이 빠졌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손잡이에 왼쪽 팔꿈치를 올려놓아 머리를 받치더니 나른하게 말했다.

“육 도련님, 우리 집을 부수러 왔다면서요? 계속할 거예요? 이제 그만할 거면 사람을 시켜 명세서를 주라고 할게요.”

“무슨 명세서?”

육비우는 눈빛이 번뜩였다. 속으로는 짐작하고 있었다. 아까 눌러 두었던 후회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월령안에게 또 속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가면 되지 않으려나?’

“우리 집을 부숴 놓고, 배상을 안 하겠다고 우기면 안 해도 되는 줄 알아요? 육비우, 댁이 그렇게 잘났어요?”

월령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배상하지 않겠다면 날 어쩔 건데?”

육비우는 고집불통이었다. 가슴을 한껏 내밀며 센 척 말했다.

“허…….”

월령안은 냉소를 지었다.

“육 대장군이 때린 건 당신 엉덩이가 아니라 머리였나 보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