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45)화 (45/1,004)

45화 자해와 고육지책

병 때문에 월령안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기운과 청량감이 줄어든 대신 무기력함이 더해졌다.

노인은 가볍게 한숨을 짓고는 먼저 말을 꺼냈다.

“큰일을 벌이려고 하는 건 아니다. 육장봉을 좀 혼내 주려고 했을 뿐이지.”

사실은 육장봉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친위대 열두 명이 육장봉을 항상 지키고 있었고, 본인도 무예가 뛰어났다. 그리고 노인의 밑에도 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며칠간 육장봉을 답답하게 만들 정도였다.

“제가 병이 났는데 왜 육장봉을 혼내 줘요? 육장봉 때문에 병이 난 것도 아니잖아요. 영감님, 그건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거예요.”

월령안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얼굴에는 웃음꽃을 피웠다. 노인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자신을 편들어 주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그놈 때문에 병이 난 게 아니라고. 그럼 손바닥의 상처는 웬일이냐?”

노인은 월령안이 감정 문제에서 도피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넌 내가 직접 가르쳤다. 날 속일 수 있을 줄 아느냐?’

“이거 말이에요?”

월령안은 붕대로 둘둘 감싸 족발처럼 된 양손을 내밀었다. 순간 적당한 변명이 생각나지 않아 얼버무렸다.

“고육지책일 뿐이에요.”

“고육지책?”

노인의 얼굴에 놀라움이 비쳤다.

월령안은 아직 열이 내리지 않아 머리가 팽팽 돌아가지 않았다. 더 많은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노인을 서둘러 안심시키려고 아무 이유나 갖다 둘러댔다.

“물론이죠! 육장봉이 변경에 돌아와서 제가 삼 년 동안 자신을 위해 한 일들을 알았거든요. 지금은 저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만약 자기 때문에 자해까지 한 걸 알면, 그 사람 성격에 분명 나를 조금이라도 더 보살펴 줄 거예요.”

말을 하는 동안 월령안 자신조차도 설득 당했다. 어투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변했다.

“영감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육씨 저택을 떠나자마자, 바깥사람들은 저를 마음대로 짓밟으려 했어요. 저를 사람 취급도 안 했죠. 일전의 소씨 가문의 일도 육장봉이 제 뒤를 받쳐 주지 않았다면, 배상은커녕 제가 몸 성히 돌아올 수나 있었겠어요?”

여기까지 말하고 난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조하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제 알았어요. 수도에는 권력자들이 득실거리잖아요. 우리 같은 백성들은 쉽게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하지만 나중에 우리는 다시 변경으로 돌아와야만 하는데, 여기에 발을 붙이려면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해요. 따로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유 없이 저를 도와주지는 않을 거예요.

육장봉은 다르잖아요. 그래도 한때 부부였는데요. 이 틈에 저에 대한 죄책감을 깊어지게 만들면, 육장봉을 잘 꼬드겨서 뒷배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훨씬 살기 편해질걸요.”

노인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령안아, 너 진심이냐? 자해한 게, 단지 육장봉에게 죄책감을 더해 주기 위해서라고?”

그녀의 말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열이 나서 의식이 없을 때조차 육장봉을 불러 대던 그녀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에요. 맨 처음엔 마음이 너무 아팠는데, 남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통증을 이용해 정신을 차리느라 그랬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사실이든 아니든, 노인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아시잖아요. 제가 언제 손해를 본 적이 있나요? 육장봉 때문에 본 손해를 대놓고 만회할 수 없는데, 뒤로나마 본전을 찾지도 못하게 하면 전 갑갑해서 죽을 거예요. 좌우지간 손은 이미 상했으니,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이익을 챙겨야 속이 풀리죠.”

월령안은 다짐했다. 예전에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상관없다. 노인이 옛 부하들과 연락해 과거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접게 하려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했다.

단지, 생각할수록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내가 자해공갈까지 하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기분이네.’

그러나 노인의 살의를 없애기 위해서는, 끝까지 바보짓을 해야만 했다.

월령안의 일리 있는 말은 그녀 자신까지 설득할 정도였다. 노인도 일순간 진위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나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추궁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월령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어떻게 생각했던지, 입 밖으로 뱉어낸 이상 반드시 실행할 것이다.

장사꾼은 간사해서 앞문으로는 호랑이를 막고 뒷문으로는 승냥이를 불러들인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대상인이라면 모두 신용을 중요시했다.

월령안은 지금까지 줄곧 대상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했다.

신용을 중시하고, 말한 건 반드시 실행한다.

이는 월령안이 줄곧 지켜온 기준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농담으로 한 말이라도, 일단 그녀가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진담이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평가한다. 자기가 실천하지 못하면 남도 실천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노인은 월령안이 딱했다. 그녀는 제대로 앉지도 못하면서 자신에게 변명했다. 비록 자신을 위로하려 임시로 생각해 낸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믿어 주기로 했다.

월령안이 더는 걱정하지 않도록, 노인은 그녀 앞에서 맹세했다.

“알겠다. 육장봉의 일은 네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라. 다시는 간섭하지 않으마.”

노인도 살날이 많지 남지 않았다. 월령안을 잠시 보호할 수는 있더라도 평생을 보호할 수는 없었다. 손을 놓기 싫어도, 놓아야만 했다.

노인의 얘기를 듣고 나자, 월령안은 온몸이 가뿐해지는 듯했다. 넌지시 떠보듯 물었다.

“제가 그래도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인데, 옛 부하들과 연락하는 방법을 알려 줄 생각은 없으세요?”

노인이 육장봉을 괴롭힐까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 때문에 겨우 벗어난 과거의 진흙탕 속의 생활로 되돌아가 자유를 잃을까 두려웠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했다. 노인마저 자신을 위해 희생할까 두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설탕물과 죽이 다 됐을 텐데, 가져오거든 잘 챙겨 먹거라.”

노인은 월령안이 별다른 이상이 없자, 더는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한마디 당부하고 돌아갔다.

“아……. 난 왜 음식을 먹겠다고 했지?”

월령안은 붕대 감은 양손을 바라보며 울부짖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이니 꿇어앉아서라도 먹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입맛이 하나도 없지만, 설탕물과 죽을 억지로 먹었다. 하녀에게 약도 설옥고로 바꿔 바르도록 분부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서 날 밝을 무렵이 되어서야 비몽사몽 잠이 들었다.

* * *

병이 들 때는 산사태처럼 닥쳐오지만, 나을 때는 실을 뽑듯 더디기만 한 법.

평소의 월령안은 생기가 넘쳐 바쁘게 돌아다니곤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일단 병에 걸리자 제대로 앓아눕고 말았다. 열이 내리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쓴 약을 한 사발 한 사발, 거의 미각을 잃을 때까지 들이켜고 나서야 겨우 열이 내렸다.

열이 내리고 나자, 솜방망이처럼 풀린 사지에도 조금씩 힘이 생겨났다. 그러자 노인 몰래 서재에 가서 쌓인 잡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월씨 가문에는 그녀 하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이 자기만을 바라보고 사는데, 도저히 오래 몸져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며칠간 쌓인 장부를 보고 난 월령안이 하인을 불러 물었다.

“제과점 사건은 언제 재판한다고 하더냐?”

“순천부에서 사흘 뒤에 재판이 열린다고 합니다.”

평소에 월령안은 기본 방향만 잡을 뿐, 구체적인 사무는 전부 아랫사람들에게 맡겼다. 그래서 그녀가 몸져누웠어도 모든 일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증인과 증거는 모두 찾아 두었느냐? 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증인으로 나서기로 한 게 확실해?”

월령안은 일전에 제과점을 새로 점검했다. 입출고된 모든 물품을 검토하고 식자재 공급상과 며칠간의 구매자들과 일일이 연락했다.

원래는 그녀가 직접 나서서 제과점 측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 하지만 반쯤 하고 나서 몸져눕는 통에 나머지는 아랫사람에게 맡겨야만 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전부 잘 처리했습니다. 게다가 예상 밖으로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저희가 찾아가서 말하자마자 대뜸 동의하더군요. 생화를 공급해 주는 매기(梅記)에서는 우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승낙했어요. 그러면서 관아에서 자기네 꽃밭을 조사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하인은 이 일을 말하면서 저도 모르게 뿌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자고로 백성은 관아, 그리고 송사에 휘말리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일반인들이 송사, 특히 인명에 관한 송사에 휘말리면, 자기와 상관없는 일은 피하기 마련이었다.

특히 상인이라면 인명과 관계된 송사에 증인으로 나서기를 꺼렸다. 이런 일은 자칫하면 화를 부르기 때문이다.

월령안이 소유하고 있는 제과점에 사고가 생겼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면 누군가 월령안을 겨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에 끼어들면 누구든지 곤란해진다.

과자를 구매한 단골손님들이야 어느 시간에 과자를 샀다는 걸 말하는 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거리에서 목격했을 사람도 많다 보니 관아에서 부르면 거절할 수도 없고, 거짓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재료 공급상들은 달랐다. 거래 장부에 적혀 있다고 해도, 그냥 어느 날, 어떤 재료를 얼마만큼 공급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의 가게에서 그들이 제공한 원재료만을 사용했다고 보장할 수는 없었다.

특히, 과자를 먹고 사람이 죽었으니, 재료 공급상들이 발뺌하려고 월령안을 한 번 더 짓밟지나 않으면 감사할 일이었다. 그녀를 위해 증인으로 나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은 잘못하면 화를 자초하기에 십상이었다. 만약 월령안이 발뺌하려고 도리어 그들의 원재료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그들 자신이 화를 입는 일이었다.

월령안도 그 공급상들을 증인으로 내세우기는 힘들거나,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비 방안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사흘 동안 앓고 일어났더니, 일이 성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보고했다.

‘이건 아무래도 상식을 벗어난 일이야!’

월령안은 하인보다 멀리 내다보고 다방면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기뻐지기는커녕 걱정부터 앞섰다. 예사로운 일이 아닌 만큼 분명 이상한 점이 있을 터였다.

‘아니면, 누군가 날 함정에 빠뜨리려는 건가?’

월령안의 얼굴이 더럭 굳어졌다.

“넌 며칠 동안 다른 일은 관두고, 당장 매기의 주인이 최근에 무슨 일로,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보거라.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히 알아야겠다. 매기 말고도 증인으로 나서는 다른 가게들에 대해서도 모두 알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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