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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4)화 (44/1,004)

44화 월령안의 병

월령안은 말로는 육장봉을 내려놓았다 했다. 이 며칠간 얼굴에서는 슬픈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노인은 육장봉에게 잔뜩 상처받은 그녀가 이제는 그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앓아누운 걸 보니, 아직 그를 포기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육장봉에 대한 집념은 내려놓았지만, 마음속 오빠에 대한 집념은 아직 그대로였다.

“고집불통 같은 계집애!”

노인은 연신 오빠를 되뇌는 월령안을 지켜보느라 가슴이 미어졌다.

노인도 알고 있었다. 당시의 월령안이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죽음, 가정 파탄, 어머니의 재가 등 연이은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육장봉의 공이 크기는 했다.

노인도 육장봉이 적절한 때 나타난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잃은 고통에 집착하는 대신 육장봉에게 관심을 가지며 슬픔 속에서 헤매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 몇 해 동안, 그녀가 육장봉을 위해 한 일들은 십 년 전의 은혜를 갚고도 남았다.

“너를 잊은 놈인데, 그런 놈을 기억해 뭐 하냐?”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이마에 올린 수건이 뜨거워지면 금방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 옆에 있는 하인보다 더 세심하게 보살폈다.

그때 갑자기 월령안이 노인의 손을 껴안았다. 어쩌다 이런 습관이 들었는지, 손으로 잡은 게 아니라 팔로 껴안았다. 양손을 꼭 쥔 탓에 노인이 손을 빼내려 해도 빼낼 수 없었다.

노인은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런데 손을 빼기도 전에 월령안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무서워요. 오라버니, 아버지, 절 버리지 마세요.”

이를 듣는 순간, 노인은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육장봉을 부르는 것보다 이 두 사람을 부르는 것이 더 가슴 아팠다.

차라리 육장봉을 잊지 않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 적어도 육장봉은 산 사람이니 기대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월령안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노인의 손을 안은 채,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부르고 나자 또 흐느끼며 말했다.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어머니의 말씀을 어기고…… 결국 청주로 돌아가야 해요.

어머니, 제가 불효녀예요. 어머니……!”

노인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월령안은 월씨 가문의 유일한 주인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그녀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듯, 하늘이 무너져도 떠받칠 기세였다.

그녀는 이혼당했을 때도 청주에 가서 범씨 가문과 싸우라고 강요를 당했을 때도 일말의 나약함조차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별일 아닌 것처럼 굴었기에, 모두 그녀의 나이와 성별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고작 열여덟 살의 아가씨였다. 대갓집이라면 열여덟 살 난 아가씨는 아직도 규방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응석받이 노릇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일을 너무 많이 겪었고, 걸맞지 않은 짐들을 너무 많이 져야만 했다.

그녀가 아직 소녀라는 사실을 모두가 잊고 있었다.

월령안이 앓아눕고 나서야 나약함과 무기력함을 내비치는 것을 보자, 노인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착한 녀석, 어서 일어나렴……. 네가 일어나거든…… 내가 육장봉 그 망할 놈을 한바탕 때려 주마. 누가 그놈더러 사리 분별도 못 하고, 남을 괴롭히라더냐.”

안타깝게도 노인이 더 많은 역성을 들어 주기도 전에, 총관 어멈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왔다.

“어르신, 의원을 모셔왔습니다.”

“의원님, 어서 봐 주시오. 우리 손녀가 어찌 된 거요?”

의원이 왔다는 소리에 노인이 서둘러 손을 빼고 의원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의원은 가까이 다가가 월령안의 열이 오른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표정이 무거워졌다. 자리에 앉아서 진맥하더니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이건 외상으로 인한 염증이 화병을 불러온 것입니다.”

“외상?”

의원의 말을 들은 노인이 총관 어멈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가씨가 다쳤느냐?”

‘어째서 그런 소리를 못 들었지?’

“아가씨 몸에서…… 상처를 보지 못했는데요.”

총관 어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시 월령안을 한참 훑어보았으나 상처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가서…….”

노인이 월령안의 시중을 드는 하녀를 부르려 할 때였다. 의원이 월령안의 손가락을 펴서 피범벅이 된 손바닥의 상처를 드러내었다.

“이, 이 상처는…….”

노인은 그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눈에 알아차렸다. 아까 그녀가 왜 손을 잡지 않고 팔을 껴안았는지, 왜 여태껏 주먹 쥔 손을 풀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이 멍청한 녀석, 아직도 체면이 문제더냐!”

‘얼마나 슬프고 화가 났으면, 손바닥을 이렇게 후벼 파고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을꼬.’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조심하느라,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은 것이었다.

의원도 눈치가 빨랐다. 환자 본인이 상처를 냈다는 것을 알아보자 더는 묻지 않았다. 의료함을 열고 상처를 깨끗이 닦아 내어 치료해 주었다.

손바닥의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복해서 후벼 판 탓에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의원은 약을 바르고 붕대로 여러 겹을 감싼 다음 당부했다.

“아가씨의 피부가 약하니 여기서 더 상하면 안 됩니다. 며칠간은 계속 붕대를 감고 물을 묻히지 마십시오. 특히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덧나면 큰일 납니다.”

의원은 변경 사람이었다. 이틀 전, 육장봉이 월령안을 내친 일은 온 성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의원은 월씨 저택에 오자, 묻지 않아도 월령안의 신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알겠소이다. 꼭 조심하겠소.”

이제 노인은 월령안에게 더는 뭐라지 않았다. 다만 손바닥의 상처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시큰시큰 아파 왔다. 이 모든 사달의 장본인인 육장봉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인은 원래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에 제자를 가르칠 때는, 죽음이 닥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조계안의 얼굴에 남은,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도 그가 만든 것이었다.

그때의 조계안은 아직 어렸고, 포동포동하고 새하얀 모습이 사랑스러웠지만, 노인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런데 남들에게는 그토록 모질게 대할 수 있으면서도, 어찌 된 영문인지 유독 월령안에게는 모질게 굴지 못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가슴이 아파 못 견딜 정도였다. 그런데 자해까지 한 걸 보게 되다니.

노인은 마음속에서 살의가 피어올랐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우선 의원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방 안에서 월령안을 한참 지키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사람들 앞에서는 평범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는 표정이 싹 변했다. 그는 바퀴 의자를 몰아 내실로 들어가 침대 널빤지를 뜯어내더니, 아래쪽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열었다.

상자 속에는 용이 새겨진 검은색 영패 하나와 신호탄 세 개가 들어 있었다.

노인은 상자 속의 물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곧 주저 없이 영패와 신호탄 하나를 꺼냈다. 나머지 신호탄 두 개는 원래대로 넣어두었다.

그는 영패와 신호탄을 들고 뜰로 나왔다. 검푸른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육장봉, 내 제자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더냐!”

신호탄을 꺼내든 노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 불을 붙이려는 순간, 월령안의 거처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란 노인은 신호탄을 터트려 옛 부하를 부를 생각을 잠시 접었다. 품속에 신호탄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월령안의 거처를 향해 서둘러 바퀴 의자를 움직였다.

“령안이는 어찌 되었느냐?”

노인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허겁지겁 뛰어나오는 하인과 맞닥뜨렸다.

“어르신, 아가씨가 피를 토하셨습니다.”

노인의 모습을 보자 하인은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피를 토해?”

노인은 깜짝 놀란 나머지 하인의 도움 없이 바퀴 의자로 문턱을 넘었다.

노인이 들어섰을 무렵에는 방 안의 핏자국은 말끔히 청소되었다. 월령안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있었다.

월령안의 얼굴에는 여전히 달뜬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게다가 흰색 잠옷을 입고 있어 병색이 완연했다. 나약하고 가냘파 보였지만, 오히려 정신은 맑아진 모양이었다.

노인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월령안은 웃음부터 지어 보이며 짐짓 경쾌하게 말했다.

“영감님, 왜 오셨어요? 다들 참, 별거 아닌 일을 가지고 호들갑 떨기는. 전 괜찮아요.”

“피를 토했잖느냐!”

노인이 성이 나, 이를 악물었다.

“이제 고작 열여덟 살짜리가 피를 토하다니! 어린 나이에 피를 토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수명이 단축됐다는 뜻이야!”

노인은 여태껏 월령안처럼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 녀석 때문에 항상 애가 타는구나. 이래서야 죽어도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겠어! 마음 놓고 죽을 수도 없겠구먼? 애물단지 같은 녀석!’

“어혈일 뿐인걸요. 토하고 나면 몸에 좋대요.”

월령안은 사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그래도 노인을 달래려고, 몸은 불편해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애교를 부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다 컸는데, 제 몸 하나 돌보지 못하겠어요?”

그녀는 피를 토하는 게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몰랐다. 다만 줄곧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힘들기만 했는데, 피를 토하고 나니 되레 시원해진 것 같았다.

“네가 네 몸을 잘 건사했으면, 난 진작 마음 푹 놓고 죽었을 거다.”

지난 이 년 간, 그가 아픈 몸을 끌고 죽을힘을 다해 버틴 것은 바로 월령안 때문이었다.

원래는 몇 년 만 버티면 육장봉이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설령 그가 월령안을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책임감과 육씨 가문의 권세가 있으니 그녀의 평온한 삶을 보장해 주리라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육장봉은 전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육장봉이 더욱 죽일 놈 같았다.

노인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순간 살의가 일었으나 곧 사라졌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지 못했지만, 월령안만은 그 눈빛을 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하인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어멈, 배가 고파. 설탕물도 마시고 싶고, 흰죽도 먹고 싶어.”

“아가씨, 드디어 입맛이 돌아왔네요. 하늘에 감사할 일이네요. 제가 금방 끓여드릴게요.”

총관 어멈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확 떠올랐다. 그녀는 양손을 합장하여 하늘에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재빨리 나갔다.

월령안은 하녀도 자연스럽게 쫓아버렸다.

“설옥고를 가져와라. 다시 약을 발라 주렴.”

하녀가 나가고 나자 방 안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노인은 어리석지 않았다. 월령안의 행동을 보더니 탄식했다.

“얘야, 뭘 하려는 거냐?”

“영감님, 그건 제가 여쭤보려던 거예요. 뭘 하시려고 그러세요?”

월령안은 열이 다 떨어지지 않아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침대 기둥에 기대어 앉아 무기력하게 물었다.

“적당히 하마. 넌 상관하지 말거라.”

영리한 월령안은 이미 눈치를 챘다. 노인은 그녀가 말릴까 봐 두루뭉술하게 넘겨버리려 했다.

그러나 열이 심하게 난다고 해서 머리까지 멍청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더 묻지도, 설득하려고도 하지도 않았다. 다만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

“영감님, 예전 같은 생활은 싫다고 하셨잖아요. 저를 제자로 삼은 것도 과거를 잊기 위해서고요. 앞으로는 오직 저 월령안의 사부로서만 살아가실 거라고 했었죠. 제게 가족이라고는 영감님밖에 없어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저를 생각해 주시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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