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육장봉, 꼴도 보기 싫어
심민은 억지로 웃는 월령안을 보자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을 찾으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와 신분을 떠올리고는 나지막하게 한마디만 건넸다.
“월 낭자, 건강하세요.”
“네. 심 오라버니. 살펴 가세요.”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부드럽고 단정한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심민도 그녀의 미소에 아무 뜻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육장봉이 문까지 걸어가서 뒤돌아보니, 월령안은 심민에게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완전히 혼을 뺏긴 듯한 심민의 모습이 더욱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순간 묘하고 낯선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육장봉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기도 전에 얼굴부터 어두워지더니 냉기를 내뿜으며 소리쳤다.
“멍하니 뭘 하느냐? 얼른 따라나서지 못할까?”
심민은 깜짝 놀라 달콤한 백일몽을 접었다. 사과하고서는 얼른 육장봉을 따라나섰다.
육장봉은 마음속의 울화 때문에 발걸음이 급하고 빨라졌다. 막일을 하던 심민조차 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거의 뜀박질을 해야만 했다.
두 사람은 아주 빠른 걸음으로 월씨 저택을 나섰다.
저택의 하인은 눈치 빠르게 육장봉에게 말을 끌어다 주었다. 육장봉은 말에 오르려던 순간, 천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든 조야옥사자 한 쌍이 있다고 했던 월령안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 집의 조야옥사자 한 쌍은 어디 있냐?”
육장봉이 차갑게 물었다.
하인은 잠깐 어리둥절하더니 서둘러 대답했다.
“마구간에 있습니다.”
육장봉은 만족스럽게 머리를 끄덕였다.
“너희 아가씨께 전해라. 심씨 가문 일은 내가 대신 깔끔하게 처리할 테니, 대신 조야옥사자 한 쌍을 달라고. 말들을 잘 관리하고 있으라고 해라. 만약 내 말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다가는 쓴맛을 보여주겠다.”
“…?”
하인은 어안이 벙벙하여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육 대장군이 아가씨한테 대놓고 물건을 요구한 건가? 이, 이런 적이 있었나.’
육장봉은 줄곧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이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모든 것을 알아서 갖다 바쳤기 때문이다.
육 대장군이 아가씨한테 먼저 물건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조야옥사자 한 쌍은 원래 아가씨가 육 대장군과 그녀 자신을 위해 준비했던 것이었다.
“뭘 꾸물거리는 게냐? 어서 빨리 전하지 못할까.”
육장봉이 하인에게 눈총을 쏘았다. 하인은 저택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그는 그제야 기분이 좀 풀리는 듯싶었다.
그리고 혼자 외롭게 서 있는 심민을 흘깃 바라보더니, 말을 탈 줄 아는지를 물었다. 심민이 모른다고 하자 암위를 불러냈다.
“저자를 군영으로 보내라.”
심민을 데리고 나오긴 했지만, 육씨 저택에 머무르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집은 아무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심민을 군영으로 보내는 것도 결국 월령안의 낯을 봐서였다.
심민은 안전한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게다가 눈치가 무딘 사람도 아니었다. 육 대장군이 자신에게 불만이 많은 것을 알아차리고, 아무 말없이 암위를 고분고분 따라갔다.
심민을 보내고 나서야 육장봉은 말에 올라탔다. 채찍질하여 떠나려는 순간, 그제야 오늘 월령안을 찾아온 목적이 심민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인제 와서…….’
육장봉은 굳게 닫힌 월씨 저택의 대문을 보고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일의 경중도 구분 못 하고, 찾아온 이유까지 잊는 날이 오다니.”
월령안이라는 여자는 그와 상극이었다.
* * *
육장봉이 떠난 뒤 월령안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리 위에 꼭 쥔 두 주먹을 올리고는, 멍하니 앞쪽만 바라보며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
슬픔에 빠졌다기보다는 순전히 지쳐서였다.
육장봉처럼 영리하기 그지없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조금 전에 끝난 접전에서 지칠 대로 지친 월령안은 한 발짝도 움직이기 싫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안색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육장봉을 상대하는 게 상업계의 능구렁이들과 담판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드네. 저 인간이 몇 번만 더 왔다간 내 수명이 몇 년은 단축될 거야. 날 괴롭히지 못하게 피해 다니는 게 좋겠어.
맞다. 철광산 사건도 아직 해결이 안 됐지. 육장봉이 또 날 괴롭히러 올 거야. 진짜 꼴도 보기 싫어!”
월령안은 너무 힘이 들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혼잣말을 몇 마디 주절대고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때였다. 바깥 뜰의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아, 아가씨……!”
“웬일이냐?”
월령안이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월씨 가문이 명문은 아니라도 나름의 가법이 있는 집안이었다.
아까 육장봉이 들어올 때, 하인이 미처 통보하지 못한 건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육장봉은 아무나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데 지금은 또 무슨 일이 있길래, 바깥 뜰을 담당하는 남자 하인이 그녀의 코앞까지 달려왔을까.
월령안은 얼굴에 언짢은 기색을 비치며 냉소를 머금었다. 화를 내지는 않았으나 위엄이 엿보였다.
하인은 깜짝 놀라 흠칫하더니 서둘러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유, 육 대장군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씨 가문 일을 처리하면, 조야옥사자 한 쌍을 대가로 달라고요. 그리고 또…… 아무 탈 없이 말들을 잘 보살피라고 하셨습니다.”
“하!”
월령안은 화가 나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육 대장군이 나한테 공공연히 뇌물을 요구했다고?”
하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그가 경망스럽게 행동한 이유가 육장봉 때문임을 알자, 그녀는 하인을 더는 괴롭히지 않고 손을 들어 보였다.
“알겠다. 물러가거라.”
“감사합니다. 아가씨.”
하인은 잠시도 미적거리지 않고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월령안은 심기가 불편하다 보니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누르려 손을 들어 보니, 손바닥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미간을 찡그리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주먹으로 이마를 두어 번 눌러 통증을 완화하고 나서 집사를 불러들였다.
“아가씨.”
집사가 재빨리 와서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육씨 가문의 빚을 어서 받아오라고 절름발이 육을 재촉하거라. 그리고 만약 일을 더 크게 벌일 수 있다면, 나한테 일 할을 적게 줘도 된다고 해.”
‘육장봉이 자신은 바깥사람들의 말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지? 어디, 육씨 가문 전체가 연연하지 않는지, 한번 지켜보겠어.’
그러나 곧 자기한테 잘 대해 주었던 이부인과 삼부인이 떠올랐다. 잠깐 주저하다가 문턱을 넘어서려는 집사를 불러 세웠다.
“육씨 넷째 집안이라고 콕 집어서 말해야 한다. 다른 세 집안은 건드리면 안 된다.”
육씨 가문의 둘째, 셋째 아가씨도 적은 나이가 아니었으나 줄곧 혼삿길이 평탄하지 못했다. 이제 육장봉이 돌아오고, 육씨 가문의 명망도 올라갔으니 혼삿길도 훤할 것이다.
그 두 아가씨는 성격이 차분하고 온후했다. 평소에도 그녀와 가깝게 지냈으며, 지난 삼 년 동안 그녀를 적지 않게 도와주었다. 그런 그녀들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구정물이 둘째, 셋째 집안까지 튀게 해서는 안 되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는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았다. 즉시 대답하고는 물러갔다.
“걱정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구나.”
월령안은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주먹으로 머리를 띄엄띄엄 눌러주었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가 의자에서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하인이 이를 발견하고 다가와 살펴보았을 때는, 이미 반 시진이 지난 뒤였다.
하인이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긴 했으나, 머리가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켰지만, 몸살이 났는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월령안은 충분히 쉬지 못한 탓이라고만 여겼다.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방에 돌아가 한숨 더 자려고 했다.
하지만 잠자리에 든 그녀는 깨어나지 못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하녀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들어가 보았다. 월령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온몸이 불덩이였다. 이마를 짚어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하녀는 깜짝 놀라 노인에게 허둥지둥 뛰어갔다.
“어르신, 큰일 났어요. 아가씨가 온몸이 불덩이 같아요.”
“웬일이냐? 갑자기 웬 열이 난다는 게야?”
방 안에서 혼자 바둑을 두던 노인은 깜짝 놀라 바둑알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바둑알을 주울 새도 없이 바퀴 의자를 움직여 월령안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하녀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아가씨께서 피곤하시다고, 방에 가서 쉬겠다고 하셨어요. 아가씨가 쉬시거나 일을 보실 때는, 옆에 사람이 있는 걸 싫어하시잖아요. 저도 감히 더 묻지 못했죠.
그런데 저녁이 다 되어도 아가씨가 일어나지를 않는 거예요. 혹시 아가씨께서 낮잠을 많이 주무시면 저녁에 잠을 설칠까 걱정되어 깨우러 갔어요. 밖에서 여러 번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들어가 보았는데 힘들어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어요. 등불을 들어 살펴보니 아가씨께서 열이 나셨는지 얼굴이 온통 새빨개지셨더라고요.”
하녀는 울먹거리면서도 조리 있게 대답했다.
“그럼 한참 전부터 병이 났던 게 아니냐! 너희는 어떻게 시중을 든 거냐? 아가씨가 아팠는데 그걸 이제야 알아봤다고?”
이야기를 듣고 난 노인은 화가 치밀어 하녀를 노려보았다.
평소 바퀴 의자에 앉아, 갈 날이 당장인 것처럼 굴던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얼마나 무섭던지, 하녀는 다리가 풀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노인은 그런 하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월령안의 방으로 바퀴 의자를 몰아갔다.
다행히 집안을 돌보는 총관 어멈이 그나마 유능했다. 월령안이 열이 나는 것을 알자 당장 냉찜질을 해 주는 한편 다급하게 의원을 불렀다.
“어르신!”
총관 어멈이 서둘러 다가와 노인에게 예를 행하고는, 묻기도 전에 미리 대답했다.
“어르신, 아가씨께서 열이 많이 나서 혼수상태입니다.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니 열이 난 지 꽤 된 거 같아 의원을 불렀습니다. 아마 곧 도착할 겁니다.”
“얘도 참, 사람 속을 끓이는구나.”
노인은 총관 어멈의 말을 듣고서도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직접 월령안을 보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월령안의 작은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의식도 없으면서 무언가 되뇌고 있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가까이 다가가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가까이 다가간 노인은 월령안이 무력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싹이는 입술 모양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대강 알아채자, 그녀의 무기력함에 화가 났다.
“이 녀석은 진짜…… 사람을 말려 죽일 셈이구나.”
노인은 월령안을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지만, 그 불쌍한 모습에 또 모질게 대하지는 못했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화가 나, 그녀의 미간을 콕 찌르며 중얼거렸다.
“내가 어쩌다 너처럼 앞뒤가 꽉 막힌 제자를 두었을꼬. 너도 참……. 평생을 그놈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셈이냐.”
“오빠……!
오빠, 무서워요.
오빠, 왜 저를 못 본 척해요. 저 무서워요……!”
월령안은 꿈속의 그를 부르고 있었다.
십 년 전,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시체를 가져다주고, 그녀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던 그 오라버니를. 그 육장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