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42)화 (42/1,004)

42화 눈을 더럽혀서 죄송하네요

육장봉의 거대한 몸집이 그녀의 앞에 선 순간, 모든 빛을 차단했다.

커다란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웠다.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했지만, 바로 의자에 부딪혔다.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와 억지로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아첨해서 환심을 사고, 눈에는 이해득실 뿐이지. 이익을 위해서라면 체면도 버리지. 월령안, 당신이 나쁜 속셈을 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잔뜩 엄포만 놓고 풀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육장봉 특유의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월령안은 어지럽지도, 정신이 혼미해지지도 않았다. 육장봉을 힐끗 보더니 눈을 감고 쓴웃음을 지었다.

“속셈이 있었다는 건 인정해요. 아첨해서 환심을 사고, 눈에는 오직 이해득실뿐인 것도 다 인정해요. 그런데…….”

월령안은 안간힘을 다해 가볍게 말을 이었다.

“제가 상인 집안 출신인 걸 잊으셨나 봐요? 전 사람을 만나면 사람의 말을 하고, 귀신을 만나면 귀신의 말을 해요. 만나면 웃음부터 짓고, 잘못이 있든 없든 먼저 사과부터 하죠. 아부하고, 영합하고……. 당신같이 높은 관리 자제분들이 하찮게 여기는 일들을, 전 모조리 해요.

이게 바로 제 본능이자 생존법이에요. 제가 꼼수 부릴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당신에게 꼼수를 부리려는 생각도 없어요.”

육장봉에게 유일하게 꼼수를 썼을 때는, 과거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육장봉은 말문을 닫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육장봉에게 달콤한 미소를 날리며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보세요. 육 대장군께서는 저를 이렇게 모욕하지만, 전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귀빈 대접을 해 드리잖아요?”

“…….”

“이건 꼼수를 부리려는 게 아니고, 상황 판단을 잘하는 거예요. 제가 육 대장군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되잖아요. 육씨 가문에서는 절 많은 사람 앞에서 내쫓았죠. 제 체면 따윈 안중에도 없고, 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요. 그래도 육씨 가문 사람들을 만나면, 저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웃어야 해요.

왜냐고요? 육씨 가문의 노여움을 산 결과, 그리고 그 보복까지 전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말할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하고, 어투도 점점 더 경쾌해졌다.

“저는 육 대장군과는…… 대장군 주변의 모두와는 다르답니다. 출신도 비천한데 고결한 체, 잘난 체할 밑천이 어디 있겠어요? 안하무인에 제 마음대로 굴 자격이 있기나 하겠어요? 제가…….”

“그만! 월령안!”

육장봉이 말을 끊어 버렸다.

“당신 마음속에서 내가 그토록 옹졸한 사람이었소? 내가 싫으면 그냥 싫어하고, 날 보고 웃기 싫으면 웃지 마시오. 그까짓 걸 두고 보복할 정도로 속이 좁진 않으니까.”

월령안은 되레 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고귀하신 육 대장군은…… 인간 세상의 고통을 모르시는군요. 대장군께서 어떤 분이신데요? 하늘의 별이고, 달이어서 미처 바라보지도 못할 분이시잖아요.

저는요? 땅을 덮은 흙이고, 길가의 들풀이에요. 이 변경에서 조금이라도 지체 있는 사람이면 다 저를 짓밟을 수 있죠. 제가 대장군께 불손하게 굴더라도, 대장군께서는 굳이 무얼 할 필요가 없으세요. 대장군께, 육씨 가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람들이 대신 손을 쓸 거고요. 아예 절 밟아 죽이려 할 거예요.”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월령안이 말하는, 인간 세상의 고통을 모르는 대갓집 도련님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비천한 사람은 없어요. 자존감, 자부심, 체면 모든 걸 버리고 남들의 비웃음과 모욕을 인내하려는 사람도 없어요. 가능하다면 저도 도도하게, 고결하게, 제멋대로 살고 싶네요. 할 수만 있었다면 대장군께서 이혼장을 주었다고 말할 때, 뺨을 철썩 후려갈기고, ‘그대 마음속에 제가 없다니 저도 마음 접으리다’ 하고 말했을 거예요.

당신 사촌 동생이 저를 육씨 저택에서 내쫓을 때, 친정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데리고 가서 뒤집어 놓고, ‘당신네 육씨 가문 따위 내 눈에 차지도 않아’라고 할 수 있었으면 속이나마 시원했겠네요. 저도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고작해야 연지나 옷에 신경 쓰면서, 다른 아가씨보다 잘나 보이려고 애쓰는 귀한 집 응석받이 아가씨였으면 좋겠다고요. 그런데, 대장군께서 한번 말씀해 보세요, 제가 그럴 수나 있었을까요?”

이런 말을 쏟아낼 때조차 월령안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커다랗게 뜬 눈에도 웃음기가 엿보였다.

“보세요. 이렇게 상심했어도 저는 육 대장군 앞에서 감히 울고불고도 못 하잖아요. 눈앞에 뻔히 있는데도 뺨 한번 시원하게 후려갈기지 못하잖아요. 전 온통 이해타산뿐이고 인심을 이용하기 좋아하는 상인이에요. 죄송하네요, 육 대장군의 눈을 더럽혀서. 육씨 가문을 더럽혀서.”

월령안은 웃는 낯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마음속 씁쓸함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굴러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여전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남은 삶 동안 육 대장군과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더는 대장군의 눈을 더럽히지 않고, 더는…….”

“월령안, 사과하겠소!”

육장봉이 또다시 그녀의 말을 끊어 버렸다. 그의 깊은 눈동자는 심연 같아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하.”

월령안은 피식 웃고는 가뿐하게 말했다.

“농담하지 마세요. 저한테 무슨 사과를 하세요. 육 대장군 탓도 아닌데. 혹 대장군 같은 명문자제들 눈에는 제가 가련해 보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 자신이 가련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저도 부잣집에서 태어났고, 절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었고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에게 물건 취급을 당해 팔려가는 여자애들보다 훨씬 낫죠.”

월령안은 대수롭지 않게 얼굴의 눈물을 닦아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세상일이란 게, 무언가를 얻으려면 포기부터 해야죠. 제가 장사를 하면서 이익을 얻으려면 억지웃음도 짓고, 사람들에게 아첨도 하는 게 당연하죠. 육 대장군의 눈에는 제가 기개도 없고 하찮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전 제가 비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때는 똑같이 몸을 높일 수 있지만, 도움을 청하려면 똑같이 몸을 낮춰야 하죠. 누구든 남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는, 다 똑같이 아부하고 영합해야 해요. 누가 누구보다 더 고귀할 수는 없어요.”

월령안은 자신을 위로하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 깨끗했다. 사서 고민하고 걱정하는 기색도 없었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지도 않았다. 고결한 체, 잘난 체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나약하지도, 알랑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여유롭고 자신감에 넘쳤다.

그녀는 평온했다.

이제까지 육장봉은 큰길에서 목숨이나 규칙 따위는 던져 버리고 사람들 속에서 뛰쳐나왔던 그녀, 그리고 온몸에 가시를 곤두세우고 날카롭게 사람을 몰아붙이며 득실만 따지던 그녀가 진정한 월령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자신이 월령안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육장봉이 아는 월령안은, 그녀가 보여 주려고 했던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면 조계안이 알려 주었거나, 자신이 상상해 낸 월령안이었다. 모두 단편적이고 편견에 물든 모습이었다.

지금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월령안의 모습일 것이다.

생동감이 넘치는 영리한 아가씨였다.

월령안은 그의 인지를 뛰어넘을 정도로 영리했다. 그리고 훌륭했다.

조계안이 무엇 때문에 형제간의 정도 뒤로 하고, 자신과 월령안을 떼어 놓으려고 수작을 부렸는지 불현듯 이해가 될 정도였다.

월령안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모든 일에 똑 부러지고, 눈부시지만 겸손하고, 세상 물정을 꿰뚫고 있지만, 그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나 훌륭했다.

‘훌륭하다 못해…….’

순간 육장봉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감정을 애써 짓눌렀다. 그러나 평온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 훌륭해.”

손바닥에 느껴지는 부드럽고 낯선 감촉에 육장봉은 형언할 수 없는 희열감에 휩싸였다. 참지 못하고 다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자신의 머리를 만지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순간 깜짝 놀라 멈칫했다.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는 당장 한 걸음 물러서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월령안이 쌀쌀맞게 말했다.

“육 대장군, 무례하시군요! 저는 상인 출신이지, 기루 출신이 아닙니다. 기루의 기녀라 한들, 기예만 팔고 몸을 팔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대장군께서 존중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부드러운 감촉이 사라지는 순간, 육 대장군은 아쉬운 감정이 앞섰다. 그러나 월령안이 불쾌한 표정을 짓자, 부드럽게 변명했다.

“난 다만…….”

월령안은 들어 주려 하지 않았다. 살짝 치솟은 눈에 분노를 띤 채 엄숙하게 말했다.

“육 대장군께서 무슨 뜻으로 그러셨는지 저나 주변 사람 모두가 신경 쓰지 않아요. 단지 대장군의 행동만 볼 뿐이죠.”

성이 나서 씩씩대는 월령안의 모습이 육장봉에게는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그는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헛기침을 하더니 사과했다.

“미안하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소.”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은 없을 테니까요. 앞으로 육 대장군이 보이면, 대장군의 눈을 더럽히지 않게 제가 피해 다닐 거니까요. 이만,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를 보면 피해 다니겠다는 약속에 대해, 월령안은 조금도 후회도 하지 않았다.

끊어야 할 때 끊어내지 못하면 어지러워진다. 이젠 끊어야 할 때가 되었다.

육장봉이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월령안,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소.”

‘내가 언제 눈앞에 있으면 내 눈을 더럽힌다고 말한 적이 있나? 이 여자는 영리하게 굴어야 할 때는 정작 어리바리하게 구는군.’

“육 대장군, 살펴 가세요.”

월령안은 가슴 앞에 양손을 포개고 예를 올렸다.

“됐소!”

육장봉은 월령안이 자신과 거리를 두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월령안이 자신을 만나면 피해 갈지 말지는, 그녀가 아니라 그가 결정할 문제였다.

육장봉이 훌쩍 자리를 떴다. 심민은 육장봉과 월령안을 번갈아 보다가 그녀를 위로해 주려 했다. 그런데 입을 열려는 순간, 월령안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오라버니, 육 대장군은 믿음직한 분이에요. 저분이 이 월령안의 남편으로서는 불합격이지만, 다른 방면으로는 아주 좋은 분이에요. 저분 옆에 있으면 오라버니한테도 이득이 될 거예요.”

이 말은 치켜세우려는 것도, 아첨하려는 것도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사실, 앞서 육장봉을 칭찬했던 말에도 다른 뜻은 없었다.

모두 입을 모아 육장봉을 아낌없이 칭찬했다. 그녀는 육장봉이 무정하다고 여겼지만, 육장봉은 그녀에게만 무정했을 뿐이다.

그는 위로는 군주에게 충성하고, 아래로는 부하에게 의리를 지켰으며, 친구나 형제에게도 정이 깊었다.

육장봉은 신하로서, 주인으로서, 형제로서는 전부 합격이었다. 다만 월령안의 남편으로서는 불합격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육장봉이 아니라 그녀의 잘못으로 보일 것이다.

일개 상인 집안의 딸이 뻔뻔하게 육장봉을 넘보지 않았다면, 버림도 안 받았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육장봉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 있는 쪽은 늘 월령안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