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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1)화 (41/1,004)

41화 증거를 내놓으시죠

육장봉은 너무 예리했다. 그의 앞에서 월령안의 꼼수는 금방 읽히고 말았다.

물론 절대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육장봉을 이용하려는 속셈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육장봉이 자신의 의도를 따라줘야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본인이 내 뜻대로 해 주고서, 인제 와서는 날 탓하다니. 참 할 말이 없네.’

“요령도 참 좋아. 영리한 머리를 모두 남을 이용하는 데 써먹는군.”

육장봉은 입으로는 나무랐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월령안은 얼굴빛이 어두워지더니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

“제가 남을 어떻게 이용했는데요? 누구를 이용했나요?”

육장봉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본인이 더 잘 알지 않소?”

조계안은 소여방의 사생아 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조계안이 아직도 황제를 만나려 하지 않는 이유는, 월령안 앞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아서가 분명했다.

조계안 그 인간은 원래 오만하고 괴팍했다. 월령안의 조건을 수락하고도 해결하지 못했으니 제 발이 저리고 기가 한풀 꺾였을 게 뻔했다.

‘아마 월령안 앞에서 체면을 잃었다고 생각하겠지.’

이런 상황에서 월령안이 심씨 가문의 범죄 증거를 조계안에게 넘겼다고 해 보자. 조계안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일을 아주 완벽하게 해치울 것이다. 만약 심씨 가문의 죄가 열 가지라면, 조계안은 열두 가지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

월령안의 마음은 한 번도 물러진 적이 없었다. 사람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가차 없었다.

“제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육장봉의 눈을 마주하자, 월령안은 살짝 뜨끔하긴 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육장봉과 대치했다.

“제가 비록 일개 여자 상인이라 지위가 낮다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모함하시면 안 되죠. 저를 질책하시기 전에 증거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증거 하나 없이 저더러 요령을 피운다느니, 사람을 이용한다고 하세요? 제가 육 대장군을 이용했나요? 제가 육 대장군을 해코지한 적 있나요? 무슨 근거로 저를 질책하세요? 당신이 뭘 알기나 하나요?”

처음에는 화난 시늉만 하려 했다. 그런데 말하다 보니 마음이 알 수 없이 쓰리고 눈물이 차올랐다.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무심결에 한 한마디가 내 일생을 망칠 수도 있단 걸 모른다고? 오늘 육장봉이 한 말들이 밖으로 전해지면, 앞으로 변경에서 발을 붙일 수나 있을까?’

온통 요령만 부리고, 사람을 이용하기를 일삼는 여인과 누가 거래를 하려 들겠는가. 그녀와 교제하려는 사람도, 친구가 되려는 사람도, 장사를 하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 아무 가치도 없다면, 월씨 가문의 여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육장봉은 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모르나? 내가 자기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래? 날 한 번 망신 준 거로도 모자라, 꼭 시궁창에 빠뜨려서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나?’

월령안은 육장봉을 노려보며 양손을 꽉 쥐고 손톱으로 손바닥의 상처를 헤집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서야 통증 때문에 흘러나오려던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육장봉, 너무하잖아!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

입성하기도 전, 그녀를 만나보지도 않고 내쳤을 때보다 더 미웠다.

‘아무리 정이 없어도 그렇지, 삼 년 동안 부부였는데, 사소한 의리조차 없는 게 말이 돼? 나를 이렇게 대하면서 미안하지도 않나?’

월령안은 이를 악물고서야 육장봉에게 버럭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있었다. 흐느낌도 겨우 참아냈다.

마치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기세가 된 월령안을 보며,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왜? 내가 뭐라 하면 안 되나?”

‘사고를 칠 배짱은 있는데, 험한 소리를 들을 배짱은 없나?’

“농담도 잘하시네요. 높으신 대장군께서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신다는데, 일개 여자 상인인 저는 그냥 참을 수밖에요.”

월령안은 차가운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그거 아세요? 말로 사람도 죽일 수 있어요. 언젠가 이 월령안이 죽으면, 분명 육 대장군의 세 치 혀 때문일 거예요.”

월령안은 원래 육장봉과 말을 오래 섞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내려다보는 자세로 자신을 질책하며, 입만 열면 온갖 죄명까지 씌워대는 남자를 도저히 참아 줄 수가 없었다.

‘육장봉, 당신이 뭔데?’

“당신,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요?”

육장봉이 피식 웃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소녀는 다만 육 대장군께서 절 공정하게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월령안은 화사한 얼굴에 굳은 결의를 내비쳤다. 육장봉을 차갑게 쏘아보는 두 눈에는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외톨이 늑대가 맹수와 맞닥뜨렸을 때, 궁지에 몰려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모습과 흡사했다.

이러한 월령안을 바라보는 육장봉의 눈망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월령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지와 전의는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에게서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변경 같은 향락의 도시에서 이렇게 강한 여자가 나올 줄이야.

‘월령안은 역시 월씨 가문 사람답다고 해야 하나?’

육장봉은 마음속의 감탄을 억눌렀다. 월령안의 기세에 아무 영향도 받지 못한 듯 담담하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공정하게 대해 주면 되겠소?”

월령안의 기세는 강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앞에서는 늑대 무리를 금방 벗어난 새끼 늑대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도 그의 눈에는 아기 재롱으로만 보였다.

월령안이 매몰차게 말했다.

“저보고 온통 요령뿐이고, 사람을 이용한다고 하시는데 증거는 있으세요?”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은 모양인데, 좋아! 그럼 증거를 내놓아야지! 증거가 없으면 나한테 머리를 숙여 사과해야 할 거야!’

육장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증거라? 뭘 했는지는 자신이 더 잘 알 텐데?”

과연 금방 젖을 뗀 새끼 늑대일 뿐이었다.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휘둘러도 위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예쁘장하고 기세도 제법이라 싫어할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서릿발이 선 얼굴로 육장봉과 오만하게 대치했다.

“제가 뭘 했는데요? 전 모르겠네요! 육 장군께서 가르침을 주시죠.”

‘능력 있으면 증거를 내놓으시지. 어디 증거를 내놓을 수 있는지나 보자!’

“월령안, 세상 사람들이 다 바보인 줄 아나? 억지를 부려도 소용없소, 알겠소?”

월령안이 남을 이용했는지, 요령을 피웠는지는 그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말을 듣고 제 발이 저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월령안이다.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냉소를 지었다.

“전 모든 일에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알아요. 증거도 없이 육 대장군께서 절 이렇게까지 질책하시다뇨. 여쭤볼 수밖에 없네요. 제가 육 대장군과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렇게까지 절 모함하세요?”

“월령안, 적당히 하시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를 재며 증거를 요구하다니, 정말로 영리한 여우였다.

육장봉이 아니라 다른 여느 남자였다면, 월령안이 이처럼 당당하게 질책하고 나섰을 때 괜히 제 발이 저려 기가 죽었을 것이다. 조계안이 소여방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월령안 앞에서 계속 물러섰던 것처럼 말이다.

“그건 아세요? 헛소문을 내는 건 입만 벌리면 끝나지만, 그 소문을 수습하려면 다리가 부러지게 뛰어다녀야 해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내일…… 육 대장군에게는 남색 취향이 있다고, 온 변경 사람들이 알게 할 수 있어요.”

월령안은 갑자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내가 신경이나 쓸 거 같소?”

육장봉도 씩 웃어 보였다.

드디어 깨달았다. 월령안이라는 어린 여자가 어떻게 변경에 발을 붙일 수 있었는지, 어떻게 황제의 눈에 들게 되었는지.

월령안은 보통 양갓집 규수가 아니었다. 온순하고 단정하기만을 교육받은 귀족 아가씨는 더더욱 아니었다.

월령안은 새끼 늑대였다. 아직 어리지만, 이미 예리한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는 파괴력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을 대처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당신!”

월령안은 화가 치밀어 마구 지껄였다.

“그럼 전 당신이 사내구실 못 한다고 소문낼 거예요!”

“맘대로 하시오. 나는 괜찮으니까.”

육장봉은 얼굴의 냉기를 점차 거두고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월령안은 기뻐하는 대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당신이 신경을 쓰는 사람이나, 일 같은 게 있기나 해요?”

육장봉은 대답하는 대신 월령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고요한 눈망울이 소리 없이 대답해 주었다.

“알겠어요.”

월령안은 불현듯 미소를 지었다. 육장봉에게 공수를 하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육 대장군.”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녀는 육장봉의 상대가 안 되는 게 사실이었다.

월령안은 마음속의 무력감을 감추고 육장봉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세인들은 육장봉이 진실하고 성실하다고 칭찬했다. 반면 그녀의 눈에 육장봉은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사람이었다.

‘이 남자는 마음이란 게 없어. 그런 사람이 내 생사 따위를 염두에나 두겠어?’

육장봉은 월령안이 냉정해지자 차분하게 말했다.

“여긴 월씨 저택이잖소. 당신 사람들만 있을 텐데. 자기 사람을 못 믿는 거요, 아니면 저자를 못 믿는 거요?”

육장봉이 심민을 곁눈질했다.

월령안은 어리둥절하다가 육장봉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해명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예리한 눈빛에 살짝 주눅까지 들었다.

‘역시 영리하군.’

육장봉은 눈을 살짝 내리깔아 흡족함을 감추고는, 냉랭하게 충고했다.

“일 처리가 충동적이고 독선적이군. 이렇게 구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라오.”

“알겠어요.”

월령안은 얼굴이 두껍긴 했지만,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육장봉은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처럼 아무런 약점이 없는 남자는 그녀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 열 받아 죽겠네!’

“됐소. 사람은 내가 데려가지.”

월령안이 된통 당하고 얌전해지자, 육장봉도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심민에게 뒤따르라고 손짓했다.

심민은 움직이지 않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오늘 줄곧 육장봉에게 압도당하고 계속 손해를 보아 속이 답답했다. 그러나 육장봉이 심민을 데려가면, 자기에게나 심민에게나 모두 유익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심민이 그녀를 바라보자, 월령안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심 오라버니, 걱정하지 말고 육 대장군을 따라가세요. 육 대장군은 당대의 영웅으로, 진실하고 성실한 분이에요. 오라버니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

“월 낭자, 몸조심하세요.”

심민이 살갑게 말했다.

월령안이 대답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육장봉이 걸어오더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둘의 시선을 차단해 버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둘만이 들을 수 있도록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월령안, 이러고도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다고?”

“저…… 전 안 그랬는데요.”

월령안의 기억에 따르면, 둘이 이처럼 가까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얼굴이 붉어지지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지도 않았다. 부끄러워 어쩔 바를 모르면서도 기대감에 젖어 드는 건 더욱 아니었다. 오로지 압박감과 답답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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