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자기가 이 집 주인이라도 된 듯
육장봉은 황제에게 조계안을 찾으러 간다고 했다. 하지만 궁을 나서자마자 말을 몰아서 간 곳은 월씨 저택이었다.
월씨 저택의 대문은 며칠 전 소씨 가문 사람들이 부숴 놓은 바람에 새 대문으로 바뀌었다. 일부러 낡아 보이게 손을 보았으나, 한눈에도 기둥이나 들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육장봉은 저도 몰래 눈썹을 찡그렸다.
‘사람은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않는 법이거늘.’
소씨 가문이 월씨 가문의 대문을 부순 것은 월령안의 체면을 짓밟은 정도가 아니라 짓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 폐하 앞에서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했군.’
소씨 가문 사람들은 소 승상을 등에 업고 날뛰다시피 했다.
육장봉은 말에 앉은 채 대문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말에서 내리지도, 떠나지도 않았다.
작은 문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지기는 육장봉이 곧 떠날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가 말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왔다.
문지기는 소홀할 수 없어, 문을 열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대장군!”
월씨 저택의 규모는 작지 않았다. 그러나 지체 높은 가문의 저택은 아닌지라 정문이니, 곁문이니 하는 게 따로 없었다. 오직 평범한 대문짝 두 개뿐이었다. 평소 월령안도 대문으로 출입했다. 대문이 열리면 작은 화원이 훤히 보였다.
“주인 아가씨는?”
육장봉은 문턱을 넘어 바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신이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문지기는 깜짝 놀라 재빨리 쫓아갔다.
“대장군, 소인이 당장 들어가서 오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육 장군께서 왜 이렇게 예의가 없으실까. 어찌 자기 집처럼 아무 말도 없이 바로 안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육장봉은 가타부타 말없이 앞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월씨 저택은 평범한 집이라 구조가 복잡하지도 않았다. 이미 한 번 와 봤던 터라 길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리가 길어 보폭이 크고 일정했으며, 걸음을 내디딜 때도 거침없었다.
문지기는 한 발짝이라도 앞서가서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육장봉의 뒤를 쫓기에도 바빠 그럴 틈이 없었다.
앞뜰을 관리하던 하인이 육장봉을 보고 월령안에게 서둘러 알렸을 때, 그는 벌써 화청(花廳) 밖에 도착했다.
화청에서는 월령안이 심민과 한창 이야기 중이었다. 아니, 사실상 증거를 이미 믿음직한 사람에게 건넸으니 한시름 놓으라고 심민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하인과 육장봉이 거의 동시에 화청에 나타났다.
“아가씨……!”
땀 범벅이 된 하인은 월령안에게 알리려 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모습을 보자, 바로 그녀에게 손을 휘저었다.
하인이 옆으로 비켜서자 월령안은 앞으로 나서며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육 대장군.”
월령안은 두 손을 맞잡고 살짝 허리를 굽힘으로써 남자의 예를 올렸다.
“육, 육 장군?”
심민도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원래 입고 있던 낡은 옷차림이었다. 그래도 표정에서는 지나친 조심성과 어색함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고, 많이 대범해진 듯했다.
그러나 월령안의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기서 육 대장군을 만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육 대장군이 월 낭자를 버린 지 얼마 안 됐는데? 왜 여기에 왔지? 무슨 이상한 일이 있나?’
심민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육장봉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예는 거두시오.”
월령안은 몸을 일으키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탁 터놓고 과감하게 물었다.
“여기까지 왕림하시다니,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지요?”
월령안은 ‘중요한 일’이라는 말을 아주 천천히 발음하며 말꼬리까지 길게 늘어트렸다. 약간 조소를 띤 것 같기도, 일말의 애틋함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심민은 제 생각이 지나쳤다고 여겼다. 그런데 육장봉의 말이 들려왔다.
“그 이상한 말투는 뭐요?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소?”
“농담도 참. 소녀가 무슨 배짱이 있어 육 대장군께 그러겠어요.”
월령안은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표정에서는 경계심과 신중함이 엿보였다.
그녀는 저번에 육장봉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웃음을 머금고 예의 바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를 화청에 들이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과는 달리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억지로 웃는 게 티가 나서, 보기 불편할 정도였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녀를 담담히 훑어보더니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월령안이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그녀를 둘러 가더니 윗자리를 떡하니 차지했다.
‘내가 들어오려는데,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여기 앉는데, 당신 동의를 거쳐야 한다고? 이 여자도 참 순진하군.’
‘이 인간이 진짜?’
육장봉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곁을 지나치자, 월령안은 화가 났다.
‘자기가 아주 이 집 주인인 줄 아네?’
월령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씩씩거리며 옷소매를 떨치며 몸을 돌렸다가 더 기가 막힌 광경을 목격했다.
육장봉은 자기가 이 집 주인이라도 된 듯 이미 윗자리에 보란 듯이 앉아 있었다.
월령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억지스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육장봉의 오른편 아랫자리에 앉았다.
육장봉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사람들 앞에서 쫓아낼 수도, 불쾌감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참아야 한다!’
“자네가 심씨 가문의 자제인가?”
육장봉이 심민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그 무심한 눈길로 보아 심민을 하찮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네, 소인 심민이라 합니다.”
심민은 육장봉의 기세에 압도당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앞, 특히 월령안이 보는 앞에서 주눅 들고 싶지는 않았다.
심민은 마음속의 불안감과 긴장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대범한 자태로 육장봉에게 공수하며 예를 행했다.
비록 상인 가문 출신이지만 올바르게 처신해 왔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니 남보다 비천할 이유도 없었다.
“흥, 나이도 적지 않은데, 일 처리가 경박하고 경중을 모르는군.”
육장봉은 심민의 체면을 손톱만큼도 봐주지 않고, 본인 앞에서 훈계했다.
“장군님……!”
심민은 가슴이 철렁하며 양손이 떨렸다. 혀끝을 힘껏 깨물고서야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장군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자네가 월령안을 얼마나 큰 위험에 빠뜨렸는지 아나?”
육장봉이 월령안을 슬쩍 스쳐보며 물었다. 그가 오길 다행이었다.
‘내가 오지 않았으면, 월령안은 심민을 자기 처소에 숨기려 했나?’
“소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민은 육장봉의 위압감에 맞섰다. 그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온몸의 힘을 다해 숙이고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흥!”
그러나 육장봉의 무심한 눈길 한 번에도 심민은 다리가 풀릴 뻔했다. 순간 멍해 있다가 겨우 냉정함을 되찾았다.
‘내가 왜 그랬지? 왜 육 대장군과 기 싸움을 하려고 했지?’
심민은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이 왜 그랬는지 원인을 찾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더없이 맑았다. 이성은 자신이 육 대장군과 기 싸움을 할 깜냥이 안 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반면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억지로 육장봉을 응시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울림이 있었다.
‘이번에 숙이고 들어가면, 아마 평생 후회할 거야.’
그래서 육 장군과 대치할 깜냥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두려움을 억누르고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육장봉은 심민의 두려움과 허세를 알아차렸으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월령안에게로 옮겨 갔다.
“심씨 가문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면, 악랄한 심씨 가문이 당신을 가만 놔둘 것 같은가?”
심씨 가문이 막다른 길에 내몰리면, 이판사판 물귀신 작전으로 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심민뿐만 아니라, 심민을 거두어 준 월령안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심씨 가문의 가주는 정도라는 것을 모르는 상인이었다.
심민은 내심 당황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장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심씨 가문 사건의 재판이 시작되면, 전 심씨 가문이 제 어머니를 해쳤다고 고발할 겁니다. 그리고 월 낭자 댁에서 오래 머무르지도 않을 거고, 월 낭자를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을 겁니다.”
월령안은 고운 눈썹을 살짝 구겼다. 그리고 육장봉의 기세에 눌려 식은땀을 흘리는 심민의 모습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육 대장군, 심 오라버니를 처소에 머무르게 한 건 제 생각이에요. 오라버니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 남자, 오지랖이 너무 넓은 거 아니야? 여긴 내 집이지, 당신네 육씨 저택이 아니거든! 가주랍시고 지위나 권세를 휘두르고 싶으면 육씨 저택에나 가서 할 일이지, 왜 내 앞에서 이래?’
“왜지? 증거를 나에게 보냈잖소. 내가 물어보는 것도 안 된다는 거요?”
육장봉은 목소리가 바로 차가워졌다.
월령안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냉기 품은 눈을 의젓하게 응시했다. 그의 위압감을 무시하고 대답했다.
“육 대장군, 오해하신 듯합니다. 그 증거들은 전해 달라고 부탁드렸지, 대장군께 보낸 건 아닙니다.”
“내가 역참(驛站 - 고대의 문서를 전달하거나 관리들에게 숙박, 보급, 말을 제공하는 장소)으로 보이는가?”
육장봉이 왼손을 탁자 위에 얹더니 세게 내리쳤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그가 화난 상태임을 알 것이다.
월령안도 육장봉에 대해서는 남들 눈에 보이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의 사소한 행동이나 습관 같은 건 아무것도 몰랐다.
물론 알았다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지금은 육장봉을 보기만 해도 불쾌했다. 육장봉이 불쾌해하면 오히려 기쁠 지경이었다.
월령안이 몸을 일으켜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그럼 그 증거를 돌려주시지요.”
육장봉의 말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당신, 나를 뭐로 보는 거요?”
‘보내고 싶으면 보내고, 도로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고. 아주 제멋대로군!’
그는 월령안을 일깨워 주기로 했다. 모두가 그녀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받아 주지는 않는 것을 알아야 했다.
월령안이 미소를 거두고 엄숙하게 되물었다.
“그럼 어떡하시려고요?”
“증거는 내가 받았으니 심민도 내가 데려가겠소.”
육장봉이 차갑게 말했다.
“이 사건을 다루는 곳은 순천부입니다. 대장군의 직책에는 그런 업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월령안이 또다시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러나 그 미소에서는 호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월령안, 적당히 하시오. 그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소?”
‘내가 심민을 데려가면 월령안의 뜻대로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나?’
월령안이 이득을 봤다고 우쭐해 하자, 육장봉은 경고하듯 쓱 노려보고 한마디 했다. 월령안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정중하면서도 거리감을 잃지 않으며 설명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신 겁니다. 전 정말로 장군께 부탁만 드린 것입니다. 조 대인께 증거를 전달해 달라고요. 제가 아는 사람 중, 관직이 가장 높은 분은 대장군이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