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아직 할 말이 남았다
황제는 소 승상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거의 쫓아내다시피 하여 돌려보냈다. 물론 소 승상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소 승상은 육장봉을 황제와 독대하게 남겨두려니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저리 나오니, 아무리 낯가죽이 두꺼워도 더는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불안감과 걱정을 지닌 채 자리를 떠야만 했다.
떠나기 전, 소 승상은 잊지 않고 육장봉에게 협박에 가까운 눈길을 보냈다.
‘육장봉, 황제 앞에서 내 뒷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육장봉은 대군을 거느리고 있고, 많은 공을 세웠다. 그것만으로도 그 공이 높아 황제의 지위를 흔들고, 역심을 품었다는 죄명을 덮어씌울 수 있었다.
육장봉이 사실상 그런 마음을 가졌는지, 황제가 지금 그걸 믿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황제의 마음에 불신의 씨앗을 심어 놓기만 하면 됐다.
씨앗을 뿌린 다음 시시때때로 물을 주고 흙을 골라준다면,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소 승상은 자신의 은밀한 눈빛을 육장봉만 보았다고 생각했다. 사실 황제는 윗자리에 앉아 모든 걸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육장봉이 얼굴에 조소를 띠자, 황제 쪽이 조금 낯이 가려울 지경이었다.
소 승상이 자리를 뜬 뒤, 황제는 멋쩍게 한마디 했다.
“저 노인네가 날이 갈수록 노망이 느는구나. 장봉아, 네가 참으려무나.”
육장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폐하의 신하입니다. 폐하께서 쓸 만하시면 그만입니다.”
소 승상이 지금처럼 날뛰는 것도, 결국 황제의 총애가 불러온 결과였다. 그가 다른 사람 앞에서 황제의 체면을 구겨도, 황제 본인이 개의치 않는데, 육장봉 자기가 뭐라고 고까워하겠는가?
“전에는 저러지 않았는데, 짐이 나중에 잘 타이르마.”
황제는 육장봉이 말한 세 가지 사건을 떠올리자 저도 몰래 탄식하고 말았다.
‘소 승상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지? 아니면, 지금까지 짐이 소 승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건 아닐까?’
인제 와서 그걸 따져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 승상을 이 자리에 올린 사람이 바로 그였다. 애초에 도움도 많이 받았다. 소 승상 본인이 화를 자초하지 않는다면, 황제로서도 그의 편안한 노후는 보장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소 승상이 도를 넘으면 더는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황제는 곧 소 승상의 일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농담조로 육장봉에게 물었다.
“장봉아, 단지 월령안의 편을 들자고 짐을 찾아온 건 아닐 텐데?”
“신은 사실대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육장봉은 결코 월령안을 위해서라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소씨 가문은 일개 집사마저 안하무인일 정도로 전횡을 일삼았다. 남들은 승상이라는 신분에 눌려, 황제에게 감히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긴!”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월령안과 만난 적도 별로 없잖느냐. 설령 삼 년을 함께 지냈다고 해도, 네가 월령안 편을 들 리가 만무하지.”
육장봉은 줄곧 열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는 그의 눈과 마음에 들 만한 사람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황제를 넌지시 바라보고는 침묵을 지켰다.
확실히 월령안과 만난 적은 몇 번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자는 주변에 수시로 나타났다.
경성에 돌아온 뒤, 무슨 일을 하든 ‘월령안’이라는 세 글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 세끼는 물론, 평소에 쓰는 이불, 베개, 종이와 붓까지 전부 월령안이 신경을 써서 고른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의 마음에 꼭 들었다.
하물며 그는 자질구레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월령안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지도 않았다.
지난 삼 년 동안, 월령안은 실제로 육씨 저택에서 살았다. 그녀의 흔적을 아무리 말끔히 지운다 한들, 그녀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지우지는 못한다.
게다가 그는 월령안과 원한을 맺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무의미하게 오기를 부릴 필요도 없었다.
육장봉은 월령안에 대해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 황제가 입을 열기 전에 화제를 바꾸었다.
“폐하, 지난 삼 년 동안 전선에 보내온 병기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오? 무언가 알아낸 게 있느냐?”
공무를 얘기하자, 황제는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저희 쪽 사람들이 조사한 결과, 병기는 금나라 공부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표기나 가공 기술 모두 출처를 알아보기 힘들도록 인위적으로 손을 본 듯합니다.”
육장봉은 아무 감정도 띠지 않고 말했다. 반면 속으로는 월령안에 대해 탄복하고 있었다.
아무리 월령안을 도와 숨겨 주려고 해도, 그녀 본인이 허술했다면 그로서도 처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장에서야 육장봉 자신의 한마디면 끝이라고 하지만, 딴마음을 먹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육장봉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를 끌어내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월령안은 치밀했다. 전선에 보낸 병기들의 진위 판별을 어렵게 해 두었다. 그러다 보니 금나라 병기를 완벽하기 모방하지 못한 부분도 결국에는 출처를 숨기기 위해 고의로 고친 것처럼 보였다.
“금나라에서 났다고?”
황제는 미간을 구겼다.
“확신하느냐?”
‘설마 월령안의 수중에는 정말로 철광산이 없단 말인가?’
“제가 거느린 장인들이 확인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을까 싶어, 삼 년 동안 받은 병기 가운데서 백 점을 골라 변경에 보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공부에서 재차 확인하라고 하십시오.”
육장봉은 자신이 거느린 두 장인이 판정할 수 없는 문제를, 공부의 얼간이들이 판별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의문을 품는다고 해도, 유 선생과 조 선생의 결론이 먼저이기에 누구도 감히 자신의 의문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할 것이다.
유 선생과 조 선생은 이름난 장인이었다. 그 두 사람이 내린 판단에 대해, 다른 장인들은 따르기만 할 뿐 의문이 있어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혹시 말했다가 틀리기라도 하면 조롱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수준을 의심받기 때문이었다.
공부 사람들은 하나같이 관직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폭로하겠는가?
“그 병기들이, 진짜 월령안 본인이 만들어 낸 거 아니더냐?”
황제는 여전히 미심쩍어 거듭 물었다.
육장봉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전 사실만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월령안 수중에 철광산이 있는지를 조사하는 건, 조왕의 일입니다.”
“계안이 그놈은……!”
조계안의 얘기에 황제는 볼멘소리를 했다.
“그놈이 왜 그리 성질을 부리는 게냐? 기껏해야 소여방의 일이 제 뜻대로 안 됐을 뿐이 아니냐? 그걸 가지고 며칠이나 짐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
황제는 속상하고 답답하여 연신 불만을 토로했다.
“짐이 몇 번이나 설명했는지 모른다. 소여방의 사생아 건은 그자가 풍류스럽고, 덕이 부족한 것만 증명할 뿐이라고. 짐이 등요(橙瑤)를 그자에게 시집보낼 마음을 접은 게, 소여방에게는 가장 큰 벌이 아니냐. 이 일을 폭로한들 소씨 가문 체면이 구겨질 뿐이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게다가 소 승상도 원로 대신인데, 짐도 어느 정도는 체면을 봐 줘야 할 게 아니냐. 소 승상이 안팎으로 모든 걸 잃게 할 순 없으니 말이다.”
“폐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황제의 말을 듣고 난 육장봉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황제의 이번 일 처리는 훌륭했다. 소 승상은 체면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조계안은 월령안 앞에서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말았다.
‘오만방자하고 체면에 목숨을 거는 조계안이 지금쯤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려나? 게다가 월령안 앞에서는 또 얼마나 제 발이 저렸겠어!’
육장봉마저 조계안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육장봉은 이참에 월령안을 찾아가, 심씨 가문의 증거는 자신이 이미 순천부에 넘겼다고 알려 줄 생각이었다. 이 사건에 자신이 관여한 이상, 피해자들에게 반드시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조계안은 어떤 꼴이 될까.
육장봉은 냉소를 지었다.
* * *
황제는 소여방의 일을 조계안의 뜻대로 해 주지 않았다. 조계안은 황제에게 한바탕 분풀이를 하고 궁을 나가더니 며칠 동안이나 입궁하지 않았다. 황제가 사람을 보내 여러 번 청했지만, 그는 여전히 쌀쌀맞았다.
황제는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
처음에는 황제도 조계안이 철부지도 아니고 자신의 애로 사항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 언짢다는 티를 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조계안이 황제의 눈치를 살피기는커녕 황제 본인이 조계안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이제 황제는 더는 조계안에게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체면도 던져버리고 조계안에게 사과를 하려 했으나, 정작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육장봉이 찾아왔다. 자신의 불만도 들어주고, 조계안도 대신 찾아 줄 터이니, 그보다 더 좋은 상대가 없었다.
육장봉은 이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지겹기만 했다. 그래도 조계안이 억울하게 손해를 봤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이윽고 육장봉은 황제의 불만을 그만 듣기로 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일으키자, 황제가 붙잡고 놓지 않았다.
“장봉아, 네 형은 속이 상하단다. 황제 노릇을 하느라 정말 외톨이가 되었단 말이다. 너까지 이 형을 모른 체하면, 이 형은 말할 사람조차 없다.”
“폐하,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육장봉은 황제의 구슬림에 넘어가지 않았다. 손목을 빼내 황제를 떨쳐 냈다.
“짐은 물러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황제가 한 발 나서며 길을 막고서, 불쾌해서 말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단 말이다.”
며칠간이나 참았다. 오늘은 육장봉이 싫든 좋든 다 들어줘야만 했다. 육장봉이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고, 누가 조계안을 찾아다 주겠는가.
“신이 궁을 나가서 조왕을 찾아보겠습니다.”
육장봉이 냉랭하게 말했다.
황제는 귀가 번쩍 띄였다. 더는 잡지 않고 곧장 길을 비켜 주었다.
“장봉아, 계안이를 보면 꼭 전해라. 짐이 더는 탓하지 않을 테니, 어서 궁으로 돌아오라 해라.”
“폐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육장봉이 되물었다.
“흠흠…….”
황제는 입술을 가리고 헛기침을 하더니 어색해하며 다시 말했다.
“그 뭐냐, 계안이한테 전해 다오. 짐이 잘못했으니 화를 풀라고. 이번에는 짐이 잘 처리하지 못한 거라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 약속한다고 전해 다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이 폐하의 말씀을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단, 언제 전해 줄지는 육장봉 본인의 기분에 달렸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는, 황제의 간절한 기대를 안고서 궁을 나섰다.
육장봉이 궁을 나선 뒤, 황제는 나랏일을 볼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대신 몇을 만나보았다. 그 와중에 틈틈이 내관에게 물었다.
“대장군이 나간 지 얼마나 되었냐?”
“폐하, 대장군께서 나가신 지 반 시진이 되었습니다.”
내관은 황제가 무얼 기다리는지 알기에, 웃음을 머금고 조용조용 대답했다.
“반 시진밖에 안 됐다니.”
황제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바짝 정신을 차리고 계속하여 사무를 보았다. 하지만 반 시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황제는 또 물었다.
이 질문은 그날 내내 되풀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