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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6)화 (36/1,004)

36화 조계안에게 전해 주세요

별장을 지으려고 땅과 산을 빼앗고, 한창 밭에 자라는 새싹을 짓밟아, 농부들을 핍박하여 헐값에 땅을 팔게 했다.

‘관아에서 명의를 변경하고, 수속만 완벽하면, 심씨 가문은 아무 잘못도 없고, 법을 어기지도 않았다고 생각한 건가?’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 벌을 내리지 않은 게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심씨 가문에서는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만 됐다. 그만 가서 일 보거라.”

하인에게 분부하고 나서, 월령안은 구두 진술과 실물 증거가 있는 것들을 뽑아 집사에게 건네주었다.

“이 증거들을……. 아니, 잠깐…….”

월령안은 증거를 건네려던 손을 멈칫했다. 순간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살짝 비껴갔다.

문득 자기가 일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음을 느꼈다. 그제야 조계안의 연락 방식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처음의 계획은 심민이 증거를 내놓으면, 그걸 가지고 직접 조계안을 찾아가려 했다.

조계안은 소여방의 사생아 건을 약속대로 처리하지 못했기에 그녀에게 빚을 진 셈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심씨 가문의 범죄 증거를 들고 찾아가 도움을 청하면 조계안은 아예 거절할 수 없었다. 설령 조계안이 거절한다고 해도, 그가 비밀을 지켜 소씨 가문에게는 알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

모든 것을 잘 계획했고, 일도 착착 진행되었다. 그런데 딱 하나를 빼먹고 말았다.

‘조계안한테는 어떻게 연락해야 하지!’

지금까지 조계안이 일방적으로 찾아오다 보니, 정작 이쪽에서는 그에게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진짜…….”

월령안은 이마를 탁, 치며 내밀었던 증거를 거두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집사가 의아해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월령안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집사에게 자신의 허술한 면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 멍청한 짓을!’

사실 추밀원을 거쳐 조계안에게 연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소 승상이 눈치챌 게 뻔했다.

소 승상, 또는 소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지금, 그녀가 행동을 취하면 사람을 보내 조사할 게 분명했다. 일단 조사하면, 심민이 그녀의 처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터였다. 그러면 그녀의 의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심씨 가문이 사전에 정보를 얻고, 흔적을 지우면서 방어에 나선다면 일이 꼬일 게 분명했다.

집사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럼 아가씨, 이 물건은…… 어디로 전해야 하나요?”

“보내. 저기…….”

월령안은 마음속이 씁쓸해졌다. 잠깐 주저하다가 명령했다.

“육장봉에게 전해!”

곪은 상처를 제대로 터트리지 않으면 영원히 아물지 않는다.

육장봉이 자신을 내쳤다지만, 잘못도 없는 그녀 쪽에서 피할 이유는 없었다.

“육 대장군께요?”

집사가 의아해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쪽지를 써서 안에 넣어두마. 육장봉이 쪽지를 보면 알아챌 거야.”

딴 사람은 몰라도 육장봉은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물건을 육씨 저택에 보내도 소씨 가문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어제도 물건을 보냈으니까.

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육장봉에게 육비우의 빚을 독촉한다고만 여길 것이다.

“네, 아가씨.”

집사는 공손하게 한쪽에 서서 그녀가 쪽지를 쓸 때까지 기다렸다.

월령안은 하인이 가져온 나무함에 쪽지와 증거들을 함께 넣어 봉하고, 상자에 달린 비밀 자물쇠로 잠갔다.

이런 나무함은 계륵 같은 존재였다. 일단 자물쇠를 잠그면 나무함을 부숴야만 안에 든 물건을 꺼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나무함을 많이 만들게 했다. 중요한 물건을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이 엿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집사는 나무함을 건네받고 월령안에게 공수한 뒤, 재빨리 밖으로 나섰다.

* * *

육장봉이 서재에 도착해, 누적된 공무를 처리하기도 전이었다. 호위병이 나무함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장군, 월씨 가문 하인이 가져온 것입니다. 월 낭자가 반드시 장군께서 직접 보셔야 하는 중요한 물건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월령안이?”

육장봉은 잠시 공무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힐끗 보았다.

“가져오너라.”

친위군에게서 나무함을 건네받은 육장봉은 보자마자 냉소를 지었다.

“또 환심을 사려는 건가.”

이러한 나무함을 지난 삼 년 동안, 매달 하나씩 받았다. 안에는 월령안이 그에게 쓴 편지가 들어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열어본 적은 없었다. 늘 암위에게 던져 주어 처리하게 했다.

‘이건 이번 달치 편지인가? 특별히 사람을 시켜 직접 내 앞으로 보낸 걸 보면, 혹시 아직도 나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했나?’

육장봉이 호위병에게 대수롭지 않게 던져 주면서 분부했다.

“가져가서 처리하거라.”

“장군, 월 낭자는 그렇게 막무가내인 분이 아닙니다. 혹시 진짜로 중요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 열어 보시죠?”

호위병은 이혼장을 받고도 따지지 않고 깨끗하게 물러서던 월령안을 떠올렸다. 잠깐 주저하다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어 주었다.

“네가 한번 보아라.”

육장봉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호위병은 잠시 주춤했다. 힐끔 바라보니 육장봉이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비수를 꺼내 나무함을 쪼갰다.

나무함이 쪼개지자 맨 위에 놓인 쪽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죄송하지만, 이 증거들을 조계안 앞으로 전해주세요.」

낙관은 월령안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장군, 보십시오…….”

친위군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나무함을 육장봉 앞에 그대로 바쳤다.

육장봉이 눈을 들어 쪽지를 확인했다.

“조계안?”

‘월령안이 뭘 하려는 거지? 자기가 먼저 조계안을 찾다니? 조계안한테 아직 덜 당했나?’

육장봉은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불쾌감이 들었다. 그는 쪽지를 꺼내더니 마구 구겨서 한쪽 구석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나무함 속의 증거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심씨 가문의 범죄 증거라?”

육장봉은 한 번 훑어보았다. 차가운 눈동자에 슬며시 웃음기를 머금었다.

‘과연 속이 좁고 뒤끝이 긴 여인이야! 소여방이 자기 가게의 사장을 건드리니, 바로 소여방의 측근을 잡으려 들다니. 진짜 반 푼어치의 손해도 보려 하지 않는군.

하지만 일 처리는 깔끔해. 더러운 수단으로 남을 모함하는 게 아니고, 소씨 가문이 손을 쓰지도 못하게 공개적으로 복수를 하겠다는 거군.

그런데 왜 하필 조계안에게 넘겨주라는 거지? 내가 조계안보다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육장봉은 갑자기 정체불명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조계안을 끌어내 한바탕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탁!

육장봉은 순간 얼굴을 굳혔다. 자료들을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던지고 싸늘하게 명령했다.

“육이(陸二), 이 증거들을 순천부윤에게 전해라. 그리고 내 뜻도 함께 전해라. 이 일은 백성들의 권리와 이익에 관한 문제이니,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당장 사람을 보내 조사하라고 해라. 만약 거기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엄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어느 누가 사정을 봐 달라고 부탁해도, 들어주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해 두어라. 알겠느냐?”

‘월령안, 그 어리석은 여자는 조계안을 찾아 뭘 어쩌겠다는 건가?

나 육장봉의 아내였으니, 이혼했다고는 해도 무슨 일이 생기면 찾아오면 될 게 아닌가. 다른 사내를 찾아 도움을 청하는 건 무슨 뜻인가? 사람들이 알면 이 육장봉을 무능하다고 할 게 아닌가?

그리고 이런 일쯤은 내가 입만 열면 처리할 수 있는 것인데, 하필 조계안 그 미치광이를 찾다니. 뭐 하자는 짓이야?’

조계안과 거래하면, 월령안이 아무리 영리해도 손해를 보지 않는 정도가 최선이다. 어떤 이익도 챙기지 못할 것이다.

“네, 장군.”

육이는 고개를 숙여 눈에 스쳤던 웃음기를 감추었다.

‘아무래도 조계안, 조 대인이 장군에게는 상당히 불만스러운 존재인 듯싶네. 이거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러나 육이는 감히 아무 내색도 하지 못했다. 나무함을 받아 들고 물러가려고 한 발 떼었는데, 육장봉이 무심한 듯 물었다.

“참, 예전의…… 그 상자들은?”

삼 년 동안, 월령안은 자그마치 서른여섯 통의 서신을 보내왔었다.

‘어쩌면 그중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가 있었는데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육장봉은 괜히 가슴이 답답했다.

“암위가 모두 처리했습니다.”

육이는 작게 대답하면서도, 죄송스러운 마음에 자책감까지 들었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들이 너무 지나쳤다.

변방에 있을 적, 육이는 자신들이 암위들과 함께 월 낭자가 장군에게 보낸 편지를 놀림거리로 삼고 내기까지 했던 일을 떠올렸다.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장군이 월 낭자를 좋아하든지, 그녀와 함께 있을지는 그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월 낭자가 장군에게 보낸 편지를 제멋대로 뜯어보고 비웃는 한편, 그녀를 놀림거리, 내기 대상으로 삼은 건 잘못이었다.

육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육장봉의 눈에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유감스러움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육장봉은 가볍게 탄식하고는 손을 저었다.

“처리했으면 됐다. 그만 나가봐라.”

“네, 장군.”

육이는 자책감 때문에, 육장봉을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자신이 수상하다는 것을 장군이 알아차릴까 두려웠다. 또 편지에 대해 캐물을까 더욱 두려웠다.

육이가 나가고 나서, 육장봉은 공문을 다시 꺼내 들었으나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월령안이 삼 년 동안 보낸 서른여섯 통의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적혔을까?’

그는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갑자기 호기심이 생기고, 무척 알고 싶었다.

탁!

육장봉은 공문을 탁자 위에 던져버리고, 초조해서 혼잣말했다.

“보기나 하고 던졌어야 했는데. 나에게 보낸 거니, 당연히 난 읽을 자격이 있어.”

애석하게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세월은 되돌릴 수 없다. 편지는 이미 처리됐다. 보고 싶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무를 볼 심사가 없어진 육장봉은 더는 골치 아픈 공문서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등받이에 기댄 채 양손을 팔걸이에 올리고는 불렀다.

“암일(暗一)!”

“네!”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싼 암위가 조용히 나타났다. 마치 코앞에서 적과 맞닥뜨린 듯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평소였으면 분명 암위의 미심쩍은 낌새를 알아차렸을 육장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붕 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암위의 수상한 거동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전선에 있는 병기들의 내력을 알아냈느냐?”

“장군께 아룁니다. 병기들은 모두 봉하여 보존했습니다. 군중 장인의 말에 따르면 병기의 출처가 금(金)나라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금나라 공부(工部)의 표기가 있기는 하나, 흐릿하고 선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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