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심씨 가문 사람 같지 않네요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는 같이 식사하는 것만큼 쉬운 방법이 없다.
그녀는 심민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직접 측청(側廳 – 본 건물에 딸린 부속 건물)으로 안내했다.
하인들도 눈치가 빨랐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아침 식사를 차려 냈다.
월령안은 조금 전에 식사를 했으나, 심민과 함께 한술 뜨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의 목적은 식사가 아니었다.
“심 오라버니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네요. 이건 제가 평소에 먹는 음식들이에요. 드셔 보세요.”
심민이 긴장한 걸 알고 있는 월령안은 젓가락을 들더니 딱 한 마디만 권하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전 음식을 가리지 않아서, 아니…… 다 맛있습니다.”
심민은 현기증이 났다. 어쩌다 월령안과 동석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지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는 슬그머니 월령안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한창 죽을 떠먹느라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하인도 멀찌감치 서 있어 그를 주의해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민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는 사람이 없으니 식사 예절 때문에 웃음거리가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침 일찍 몰래 나오느라 물 한 모금도 못 마셨더니 확실히 배가 고팠다. 월령안이 식사에만 집중하고 자기에게 신경을 쓰지 않자, 심민은 그제야 조금씩 긴장이 풀려 그릇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걸쭉한 고기죽과 소가 든 떡이 나온 아침 식사는 맛있을 뿐만 아니라 허기도 채워 주었다. 국물류가 없어 먹을 때 이상한 소리를 낼까, 국물을 흘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심민도 처음에는 어색해서 조금씩만 먹었다. 혹시라도 볼썽사나운 먹음새 때문에 그녀에게 혐오감을 살까 두려웠다.
그런데 먹다 보니, 죽은 걸쭉하고 진해서 아무리 빨리 먹어도 ‘후루룩’ 소리가 날 염려가 없었다. 떡은 먹기 좋게 썰어 바로 손 옆에 놓아두었을 뿐만 아니라, 접시에 층층이 쌓여 있어 많이 먹어도 티가 나지 않았다. 걸신들린 것처럼 먹는다고 비웃을 사람이 없을 터였다.
심민은 월령안의 옆에 놓인 자신의 것과 확연히 크기 차이가 나는 죽 그릇과 얇게 썬 떡 몇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배려하여 특별히 준비했음을 알아차렸다.
순간 코끝이 시큰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을 떨굴 뻔했다.
‘이게 얼마 만이지?’
어머니가 세상 뜨고 나서, 자신을 이토록 생각해 준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심씨 가문에 있으면서 말이 도련님이지, 사실은 남이었다. 무얼 하든 꼬투리를 잡혀 남에게 손가락질을 당했다. 날마다 감시당하고 억압당하기만 하다 보니, ‘대범함’이 무엇인지, ‘내 마음대로’라는 게 무엇인지 거의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심민의 시선을 느낀 월령안이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다.
“심 오라버니, 입에 맞지 않나요?”
“아닙니다! 너무나 맛있어요.”
월령안의 상냥함을 피부로 느낀 심민은 점차 긴장을 풀었다. 그녀 앞에서도 떡을 크게 베어 먹었다.
과연, 그녀는 싫어하지 않고 기뻐했다.
“입에 맞으면 많이 드세요. 맛도 여러 가지이니, 골고루 맛보세요.”
“좋아요.”
심민이 드디어 어색함에서 벗어나, 얼굴에 활달하고 대범한 미소를 지었다.
월령안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세상에서 긴장을 풀고 정을 쌓는 방법으로는 함께 식사하는 것만 한 게 없다니까.’
체할 위험도 무릅쓰고 식사를 한 번 더 한 보람이 있었다.
심민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월령안도 입맛이 당겨 앞에 놓인 음식을 모두 먹어 치웠다. 젓가락을 놓을 때야 저도 모르게 너무 많이 먹었음을 느꼈다.
배가 너무 부르면 졸음이 오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법이다.
월령안은 자제력이 강했다. 남과 거래를 하거나, 일을 상의할 때는 너무 배부르게 먹지 않도록 늘 주의했다.
하지만 지금 소심함을 벗어 던지고 대범해진 심민을 보자, 그녀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심민과 함께 화청으로 갔다.
‘산사차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지.’
어쨌든 잠깐이라도 방심해서 손해를 볼 수는 없었다.
* * *
배불리 먹은 월령안은 화청에서 아주 신 산사차를 마시면서, 어떻게 입을 떼야 하나 궁리하고 있었다.
거래란 서로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녀가 심민을 선택하더라도, 그가 월령안을 선택하지 않으면 이 거래는 성사될 수 없었다.
월령안은 그에게 심씨 가문의 범죄 증거를 요구했다. 심민이 증거를 가져왔다고는 하나, 꼭 그녀에게 넘겨주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월령안은 심민을 슬쩍 훔쳐보고는, 시선을 내려 눈 속의 예리함을 감추었다.
심민은 장사판에서의 능구렁이들과는 달랐다. 너무 노골적인 대화는 피하고, 정을 내세워야 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난 월령안은 적당한 구실을 생각해 놓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심 오라버니, 저기…….”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뜻밖에도 심민이 몸을 일으키더니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그녀 앞으로 건넸다.
“월 낭자, 제가 이 년간 수집한 심씨 가문의 범죄 증거들입니다.”
월령안은 깜짝 놀라 의아한 눈길로 심민을 바라보았다.
“제가 심 오라버니를 속일까 봐…… 걱정되지 않으세요?”
심민은 집 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줄곧 보따리를 안고 있었다. 심지어 식사하는 중에도 내려놓지를 않아, 그에게 보따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안에 든 것은 심씨 가문의 범죄 증거였다. 심민이 심씨 가문을 무너뜨릴 유일한 패는 이 증거뿐이었다.
이 패를 잃어버리면, 복수는 당연히 물거품이 될 게 뻔했다. 게다가 일이 잘못되면 심씨 가문에서는 심민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증거들은 심민의 목숨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이런 증거들을 이렇게 손쉽게 내놓다니, 진짜 괜찮을까?’
월령안은 심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왜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월 낭자. 저, 저는 월 낭자를 믿습니다.”
월령안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심민은 당황하여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그녀의 눈은 너무 아름다웠다. 맑은 눈 속에 비친 볼품없는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이처럼 경솔하게 사람을 믿고, 밑천까지 내놓으면 어떡해요. 만에 하나, 제가 이 증거들을 가지고 심씨 가문과 손이라도 잡으면 어쩌시려고요?”
월령안은 탁자 위 보따리를 힐끗 보기만 하고, 성급하게 열어 보지는 않았다. 심민에게 생각할 시간과 후회할 기회를 주고 있었다.
심민이 웃으며 물었다.
“심씨 가문과 손을 잡을 겁니까?”
“아니요.”
그녀가 설령 심씨 가문과 손을 잡는다고 해도, 심민을 팔아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그녀의 선(線)이자 월씨 가문의 선이었다.
월씨 가문의 사업에서는 지켜야 하는 선이 꽤 많았다. 이러한 선은 남의 눈에는 가소롭게 보였다. 심지어 월씨 가문 발전의 걸림돌이 될 때도 있었지만, 월씨 가문 사람들은 줄곧 이 선을 지켜 왔다. 그 때문에 적지 않은 손실을 본다고 해도 끝까지 지켜나갔다.
“그럼 됐잖아요.”
심민은 월령안을 믿었다. 솔직히 그에게는 월령안 외에는 다른 선택도 없었다.
“심씨 가문 사람들은 교활하고, 요령을 피워서 손쉬운 길로만 가느라 악랄한 짓을 많이 했죠. 오라버니는 심씨 가문 사람 같지가 않네요.”
월령안은 차를 들고 있으면서도 마시지 않았다. 머리를 쓸 필요가 없으니 굳이 정신을 바짝 차릴 이유가 없었다.
“제가 심씨 가문 사람 같지 않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심민은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월령안이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고는, 탁자 위 보따리 위에 손을 얹었다.
“이건 받아 두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오라버니의 안전을 생각해서, 우리 집에 잠시 머무르는 건 어떠세요?”
“괜찮을까요?”
심민은 거절하지 않았다.
심씨 저택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늘 심씨 가문을 벗어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런데 이 저택은 젊은 여인인 월 낭자가 주인인데, 이곳에 머물렀다가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까?’
심민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월령안은 대범하게 말했다.
“우리 집에 영감님 한 분이 계세요. 오라버니는 아마 만나 보셨을 거예요.”
월령안은 노인이 어떻게 심민과 만났는지 줄곧 궁금했다. 그녀가 알기로는 노인은 지난 몇 해 동안 거의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심민은 어떻게 영감님을 만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영감님 눈에 들기까지 했을까?’
솔직히 노인은 매우 까다로웠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 까다로움이 이해가 되긴 했다.
‘나처럼 귀엽고, 매력적이고, 뛰어난 제자를 둔 분이, 어디 보통 사람이 눈에 들어오시기나 하겠어?’
“영감님? 어느 영감님요?”
심민은 어안이 벙벙했다.
월령안이 미소를 지었다.
“곧 인사시켜 드릴게요. 오라버니, 일단 객방에 가서 쉬고 계세요.”
보아하니 노인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좋아요.”
월령안이 말을 아끼자, 심민은 더 묻지 않고 하인을 따라 객방으로 갔다. 월령안도 한바탕 손을 써야 이 증거들을 합당한 사람의 손에 넘겨줄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심민이 자리를 뜨자, 월령안은 탁자 위의 보따리를 풀고 증거를 꺼내 한 장 한 장 자세히 훑어보았다.
“토지 점거, 남의 밭에 말을 몰고 들어가 싹을 짓밟아 농사를 망쳤고, 사기, 뇌물 수수, 사람을 궁지에 몰아 죽이고, 나라의 재난을 이용해 돈을 긁어모으기까지……. 과연 더러운 짓만 골라 했군.”
두어 장 대충 훑어보았을 뿐인데도, 적지 않은 문제를 발견했다. 그런데 대부분은 기록만 있을 뿐, 직접적인 증거가 없었다. 가장 유력한 증거라는 게 고작 구두 진술 몇 개뿐이었다.
이 ‘증거’들을 가지고 심씨 가문을 무너뜨리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월령안에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심민이 기록한 명단에 따라 가정이 풍비박산 난 피해자를 찾아내, 그들에게 심씨 가문을 신고하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교외에 있는 심씨 가문이 빼앗아간 땅, 망쳐 놓은 좋은 밭이 곧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심씨 가문 놈들은 간도 참 크네.”
월령안은 뒤쪽을 훑을수록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변경 교외의 땅마저 손을 대다니, 모든 사람이 이렇게 호락호락할 거라 생각했나?”
하지만 심씨 가문의 배후에 있는 소 승상을 떠올리자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건드려서는 안 되는 상대는 소 승상이 사전에 주의하라고 했을 것이다.
소 승상은 줄곧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했다.
‘심씨 가문이 그런 소 승상에게 빌붙었으니, 그들이라고 어디 다르겠어?’
월령안은 심민이 가져다준 증거를 둘로 나누었다. 하나는 구두 진술과 증거가 있어 직접 고발할 수 있는 것, 다른 하나는 피해자의 인적 사항만 있고 구체적인 유리한 증거는 없는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피해자는 잠시 미루기로 했다. 우선 변경 교외의 피해자 열 몇 가구를 추려낸 다음 하인을 불렀다.
“여기 적힌 인적 사항에 들어맞는 사람을 찾아내어라. 그 사람들한테 순천부윤께서 시비를 가려 줄 것이니, 입성하여 고발하라고 전해라.
그들이 입성하겠다고 하면, 네가 절름발이 육에게 데리고 가서 숨겨달라고 하렴. 만약 그들이 성안에서 아무 탈 없이 지내게만 해 준다면, 보수는 절름발이 육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된다고 해.
그들이 고발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난처하게 하지는 마라. 다만 이 말만 해 두렴. 이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