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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4)화 (34/1,004)

34화 더욱 강해져야 해

월령안은 노인과 심씨 가문에 관해 이야기하는 한편 저녁 식사 대신 탁자에 놓인 간식을 모조리 먹어 버렸다.

배불리 식사를 끝낸 월령안은 잠시 후 몸을 일으키며 손을 툭툭 털었다.

“전 배가 불렀어요. 늦은 시간이니 영감님도 어서 주무세요.”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니냐, 체할라.”

노인은 탁자 위의 빈 접시를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나이도 있는 애가 어찌 아직도 어린애 같으냐. 저녁에 그리 많이 먹고, 잠이나 제대로 자겠느냐?”

“온종일 바삐 돌아다니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거든요. 평소보다 조금 더 먹은 것뿐인데요. 깍쟁이 영감님.”

월령안은 노인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배시시 웃으며 달아나 버렸다.

노인은 주름투성이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 분부했다.

“아가씨께 산사차(山楂茶 – 산사나무의 열매인 아가위로 만든 차)를 가져다드려라. 다 마시는지 지켜봐야 한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하인은 난처한 기색을 띤 채 노인의 명을 받았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월령안은 누구를 닮았는지 단것, 신 것은 모조리 싫어하고 오직 짜고, 맵고, 기름진 음식만 좋아했다. 그녀에게 산사차는 약이나 다름없었다.

지나치게 배불리 먹은 월령안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정원을 뒤뚱뒤뚱 거닐었다. 순간 마음속에서 말 못 할 서러움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삼 년 전 여기서 시집을 갈 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불안감과 망설임도 있었지만, 기대감이 더욱 컸다.

당시의 그녀는 순진하게도 육씨 저택이 곧 자기 집이 될 줄 알았다. 그리고 이곳에 다시 돌아올 때는 손님의 신분으로 찾아오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씨 저택은 끝내 그녀의 집이 되지 못했다. 오직 이곳만이 그녀의 집이었다.

“뭐야, 왜 또 그 나쁜 놈 생각을 하지.”

그녀는 언짢아져서, 발치의 돌을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육장봉을 떠올리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대 마음속에 제가 없다니 저도 마음 접으리다(君旣無情我便休).’

육장봉은 가차 없이 자신을 내쳤다. 이제 더는 그를 그리워하지도, 떠올리지도 않을 것이다.

육장봉을 십 년 동안 연모했었다. 그럼 지금부터 열 달을 들여, 마음속에서 육장봉을 깨끗이 지워버리면 된다.

“앞으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우린 남남이야. 이젠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더는 잘해 주지 않을 거야.”

월령안은 말끝을 흐리다 결국 울먹이고 말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곧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다시 고개를 든 월령안은 화사하고 자신만만했다. 초승달처럼 휜 눈에는 웃음기가 엿보였다. 등불 아래 눈물 머금은 두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난 행복해!’

건물 안으로 돌아온 월령안은 목욕을 마친 뒤, 하녀를 불러 양손에 연고를 바르려 했다.

장기간 붓을 잡고 주판알을 튕기는 바람에, 양손에는 굳은살이 쉽게 생겼다. 희고 보드랍게 손을 가꾸려고 거금을 들여 약왕 손불사에게서 비법을 샀다. 그 비법대로 연고를 만들어, 굳은살이 생기지 않도록 매일 저녁 바르곤 했다.

며칠 동안은 기분이 엉망이었다.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 꽉 막혀 있었다. 육장봉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니, 손은 가꿔 무엇 하나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부터 육장봉이 아닌, 자신을 위해 손도, 얼굴도, 온몸까지 잘 가꾸기로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문인들이 좋아하는 섬섬옥수는 아니었다. 그래도 양손은 희고 보드라웠다. 손가락, 손바닥, 손등 모두 알맞게 몽실몽실해서 뼈가 없는 듯했다. 쓰다듬으면 최상급 옥을 만지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녀의 손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비록 당시 문인들의 기준에는 부합되지 않지만,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가씨, 손바닥에…… 상처가 있네요.”

연고를 바르려던 하녀가 그녀의 손바닥에 생긴 상처를 보았다. 반달 모양의 채 아물지 않은 상처였다.

월령안은 손바닥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가벼운 상처야, 괜찮아.”

그녀는 피부가 워낙 여려 평소에 살짝 다치기만 해도 멍이 며칠씩 갔다. 이 손바닥 상처는 보름쯤 지나야 아물 것이다.

“아가씨, 상처를 깨끗이 닦아내지 않으셨네요. 안에 뭐가 들어가서 상처가 거멓게 변했어요. 제가 깨끗이 하고 다시 약을 발라 드릴까요? 이대로 두면 흉터가 남을 거예요.”

하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상처에는 이미 딱지가 앉았다. 다시 약을 바르려면 반드시 딱지를 떼고 헤집어서 깨끗이 해야 했다.

월령안은 아픈 것을 싫어했다. 평소였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피부가 여리긴 해도 상처가 잘 남는 편은 아니었다. 이 정도 상처는 제때 잘 치료하지 못했더라도 며칠만 더 잘 관리하면 나을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육장봉을 떠올렸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육장봉은 미처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딱지가 져 버린 상처 같은 존재였다.

무시하고 내버려 둔다면 나을 수는 있지만, 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반면, 상처를 파헤쳐 깨끗이 하고 다시 약을 바른다면 아프긴 하겠지만, 빨리 나을 것이다.

월령안은 단숨에 결정을 내렸다.

“가서 약을 가져오너라!”

‘더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아무리 아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육장봉을 용감하게 마주하기로 했다.

통증은 일시적이고,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상처는 낫는다. 더는 아프지 않고, 아무 흔적도 남지 않게 되리라.

하녀는 재빨리 약상자를 가져왔다. 독한 술로 꼼꼼하게 닦아낸 은침으로 상처를 헤집어 깨끗이 정리했다. 그리고 한 병에 천금이나 나간다는 설옥고를 발라 주었다.

“아가씨, 며칠 동안은 절대 물을 묻히지 마세요. 예전에는 물이 들어가서 고름이 생긴 거예요.”

하녀가 신신당부했다. 월령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가벼운 상처라 헤집어도 아프지 않았다. 씻어낼 때도 살짝 따끔할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도 왠지 따끔따끔 저렸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빼낸 듯한 느낌이었다.

하녀를 내보내고, 월령안은 탁자 앞에 앉아 양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눈길을 거두었다.

“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늘 숙면을 하던 그녀답지 않게 오늘 밤은 잠을 설치고 말았다.

“더는 생각해선 안 돼!”

“월령안, 그 사람은 네 배필이 아니야.”

“월령안, 강해져야 해!”

“월령안, 넌 혼자가 아니야. 네 뒤엔 너만 바라보는 많은 사람이 있어. 그들을 위해서라도 강해져야만 해.”

월령안은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더는 육장봉을 생각하지 말자. 더는 마음 아파하지 말자. 어서 잠이나 자자. 더욱 강해져야 해…….’

비몽사몽 하는 중, 머릿속에는 기괴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꿈인지 생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음이 괴롭기만 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보니 베갯잇이 흠뻑 젖어 있었다. 퉁퉁 부어오른 눈은 뜰 수조차 없었다.

* * *

심민은 일 처리가 매우 빨랐다. 월령안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하인이 들어와 심민이 찾아왔다고 알렸다.

“이렇게 빨리?”

월령안은 잠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화청에서 기다리시라고 해라.”

그녀는 거드름을 피우거나 남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퉁퉁 부은 눈을 보니 저도 몰래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꼴로는 부끄러워서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녀를 시켜 땅굴에서 얼음을 가져왔다. 얼음찜질을 해 부기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이각이 지난 뒤에야 겨우 사람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붓기가 가셨다. 어차피 심민이 한참 기다렸을 테니, 일각 정도 더 늦어져도 괜찮겠다 싶어 아침 식사까지 마쳤다.

그녀는 배불리 먹고 나서야 화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화청에 들어서자, 하얗게 바랜 남색 옷을 입은 심민이 보따리를 꼭 껴안은 채 한쪽 구석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월령안은 저도 몰래 눈썹을 치켜세웠다.

‘심씨 가문이 망했나? 심씨 가문 도련님 행색이 어떻게 이리 초라할 수 있지?’

“심 도련님!”

월령안은 생각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예의 바르게 그를 불렀다. 심민이 몸을 일으키자, 그녀는 읍을 하며 사과부터 하였다.

“죄송합니다. 심 도련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심민의 얼굴에 어색함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제가 일찍 온 겁니다.”

심민은 날이 밝기도 전부터 월씨 저택 문밖에 도착했다. 하인이 밖으로 나오기를 한참 기다렸다가, 겨우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저택에 들어선 다음에야 자신이 너무 일찍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심민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산뜻하고 아름다운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다시 자신의 색 바랜 옷을 내려다보고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숙이더니 난감해서 말했다.

“저기, 심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이 무슨 심 도련님이라는 말인가. 심씨 가문에서 그는 하인보다도 못한 위치였다.

하인은 그나마 봉급이라도 받는데, 자신은 심씨 가문에서 하인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동전 한 푼 만져본 적이 없었다. 그저 배곯지 않을 정도로만 지냈다.

밖에 나가 일을 찾으려 하면, 심씨 가문 사람들은 그를 제 어미를 닮아 자기 신분도 모르는 미치광이라고 했다.

‘미쳤다고?’

확실히 자신은 조금 미친 구석이 있었다. 심씨 가문 사람들의 핍박을 못 이겨서 미친 것뿐이다.

“심 도련님께서 저보다 연상이시니, 그럼 제가 심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괜찮겠죠. 심 오라버니, 앉으세요.”

심민의 어색함과 난처함을 보지 못한 듯이, 월령안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살갑게 대했다. 장사꾼이라면 낯가죽이 엷어서는 절대 안 된다.

“저는…… 저는……!”

심민은 월령안을 흘끔 바라보고는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왠지 월령안의 조소와 경멸 없이 달콤하게 부르는 ‘심 오라버니’가 정겹게 들렸다.

“오라버니, 아직 아침 식사 전이죠? 우리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요?”

월령안의 기준에서는 함께 식사할 수 있으면, 곧 친구나 다름없었다.

심민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는 데다가, 둘은 만난 적이 없어 서로를 잘 알지도 못했다. 당연히 신임이니 뭐니 할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지금 호언장담하고 실력을 과시한다면, 심민은 그녀를 의심할 뿐만 아니라 더욱 난처해할 것이다.

그리고 심민의 상태를 보아하니 그녀가 이야기를 해도 그 말이 귀에 들어갈 리 만무했다. 듣지도 않을 얘기를 입 아프게 하기보다, 먼저 심민의 긴장을 풀어주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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