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원한에는 원수가 있고, 빚에는 빚쟁이가 있는 법
육장봉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육비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육비우, 네가 말해 봐라. 네 어머니가 무슨 명분으로 월령안에게서 돈과 물건을 받았느냐? 과연 네 어머니가 그걸 받을 자격이 있긴 하느냐?”
‘한쪽 말만 듣고 우기고, 자기 말만 다 맞지. 아주 이기적이로군. 육비우 이놈은 육씨 가문 자손으로서, 고작 이 정도밖에 못 배웠나?’
“형님, 형님도 우리 어머니를 아시잖아요……. 정,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육비우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어머니가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형님의 손윗사람인데. 어머니 체면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손윗사람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며 월령안에게서 돈을 빌리지 않았느냐? 월령안의 가게에서 돈도 안 내고 물건을 가져가지 않았더냐? 육비우. 내 어머니도 아니고, 월령안의 어머니도 아닌, 네 어머니가 한 일이다. 우리는 네 어머니의 탐욕을 채워 줄 의무 따윈 없다.”
육장봉은 사부인을 전혀 봐주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육비우의 체면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처사라, 그도 화가 났다.
“형님, 우리 어머니가 그래도 육씨 가문의 사부인이고 형님의 손윗사람입니다. 형님이 이렇게 말하면 어머니가 육씨 가문과 경성에서 어떻게 발을 붙이고 살겠어요?”
“체면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지, 다른 사람이 챙겨 주는 게 아니다.”
육장봉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도 형제의 정을 봐서 한마디 타일렀다.
“육비우, 네 어머니 뒷수습을 할 능력이 없다면 미리미리 잘 단속하거라. 아니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거다.”
“제 어머니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육비우는 화가 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나가!”
육장봉이 서재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육비우는 배 째라는 듯 들것을 죽어라 끌어안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건 형님이 저지른 일이잖아요! 저는 억울하게 휘말린 거예요! 형님이 해결해 주지 않으면 안 나갑니다.”
“나 때문에 휘말렸다고?”
육장봉은 차갑게 웃었다. 육비우는 아직도 현실을 마주하기는커녕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네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는다고 탓하지나 마라.’
육장봉이 차갑게 말했다.
“육이,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이놈에게 말해 줘라.”
“장군님, 비우 도련님.”
육이는 포권을 하고 말했다.
“어제저녁에 소씨 가문 큰 도련님이 표향루에서 순천부윤(順天府尹)의 아드님과 몇몇 형부 대인의 자제들을 초대해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그,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냐?”
육비우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지만, 여전히 시치미를 뗐다.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육장봉은 더는 육비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면서 싸늘하게 물었다.
“육비우, 다시 한번 기회를 주마. 아직도 소함연과 혼인하고 싶으냐?”
“이게 제가 함연이랑 혼인하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육장봉의 질문을 듣는 순간, 육비우는 마음속의 두려움과 불안함이 사라졌다. 그는 육장봉을 경계하듯이 바라보았다.
‘형님이 함연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나한테서 함연이를 뺏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절대 안 돼! 함연이는 내 사람이야. 폐하께서 성지까지 내리셨다고!’
육장봉이 말했다.
“소여방은 행실이 경박하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른다. 여기서 소씨 가문의 가정교육이 어떤지 보이지. 잘 생각해 봐라.”
육비우가 육씨만 아니었더라도 육장봉은 그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멍청해서야. 평생 여자한테 휘둘리다 죽을 팔자로군.’
“소여방은 소여방이고, 함연이는 함연이지요. 형님, 싸잡아서 그렇게 말하면 되나요? 함연이가 얼마나 좋은 여인인지 형님이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요.”
육비우는 우쭐한 기색을 드러냈다.
육장봉은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네 어머니를 닮은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넷째 숙부와 판박이구나.”
‘부자가 똑같이 여자 보는 눈이 없군.’
“형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째 칭찬처럼 안 들립니다?”
육비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해가 안 되는 듯 물었다.
“육이, 이놈을 끌어내라.”
육장봉은 차갑게 돌아서서 책상 앞에 앉았다.
육비우는 이 말을 듣자 조급해졌다. 들것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책상 다리를 꽉 붙잡았다. 육이가 아무리 잡아당겨도 손을 풀려 하지 않았다.
“형님, 월령안에게 빚진 일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어요.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제가 돈을 갚지 못하면 월령안은 제 어머니가 쓴 차용증을 도성 여러 곳에 붙여 놓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 육씨 가문 전부가 망신당하는 거예요. 형님, 절 모른 척하시면 안 됩니다!”
“일을 저지른 사람한테 따지거라. 망신을 당한다고? 아니, 나는 육씨 가문이 망신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라, 육장봉도 이미 익숙해졌다.
“형님,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 척하면 안 됩니다! 제가 곧 혼인할 건데 이런 큰일이 벌어져 망신살이 뻗치면, 사람들이 저와 함연이를 어떤 눈으로 보겠어요.”
육비우는 육장봉이 정말 개입하려 들지 않자 조급해져서 눈물이 다 나왔다.
“그건 너와 소씨 가문의 일이지. 원한에는 원수가 있고, 빚에는 빚쟁이가 있는 법이다. 나에게 와서 울 시간이 있으면 빚쟁이를 찾아가거라.”
육장봉은 육이에게 눈치를 줬다. 육비우의 상처를 신경 쓰지 말고 내치라고 말이다.
“형님, 이러시면 안 되죠! 우리가 그래도 한 가족이잖아요. 하나밖에 없는 형님만이 절 도와줄 수 있다고요!”
육비우는 바닥에 엎드렸다. 육장봉의 표정이 보이지 않자 탁자를 붙들고 통곡했다.
“비우 도련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육이는 말을 마치자 육비우의 손을 힘껏 잡아당겨 푼 뒤, 들쳐 메고 밖으로 나갔다.
“형님, 형님……. 안 돼요! 절 버리지 마세요! 형님,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이번만 도와주시면 앞으로 형님 말대로 다 할게요. 형님…….”
육비우의 처참한 비명이 점점 멀어지다가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육장봉은 아까 읽던 공문을 꺼내어 마저 읽으려고 펼쳐 들었다. 그러나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월령안도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못하겠군.’
소여방이 이렇게 대놓고 일을 벌인 걸 보니 월령안에게 경고할 셈이었다. 그가 월령안을 죽이는 것은 마치 개미 새끼 한 마리를 짓이겨 죽이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고.
월령안이 억울하다는 사실을, 소여방이 월령안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월령안은 일개 고아였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순순히 당해야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
밤이 되자 육장봉은 침소로 돌아왔다. 그의 암위는 평소처럼 붕대와 연고를 가져왔다.
“장군, 약을 바꾸셔야 합니다.”
암위는 연고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육장봉은 대답하고 일어나서 탁자 앞에 앉았다. 원래 감았던 붕대를 풀자, 얇은 딱지가 앉은 복부의 상처가 드러났다.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상처에 벌써 딱지가 앉았다. 거금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연고였다.
육장봉은 연고를 집어 올린 순간, 월령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이 아는 육비우와 그의 어머니라면, 절대 돈을 갚지 않을 것이다. 육비우의 성격상, 돈이 있더라도 월령안에게 갚을 리가 없었다.
사건의 장본인인 소씨 가문으로 말하자면 더더욱 그럴 리가 없었다.
육비우는 집에서만 멋대로 구는 인간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가족들이 너그럽게 대해 주니 가족들 앞에서는 막무가내로 행동해 왔다. 하지만 일단 밖에 나가면 지레 기가 죽었다.
심지어 그놈의 체면 때문에 억울함을 당한 적도 있었다.
소씨 가문에 찾아가 따질 배짱도, 용기도 없음은 물론, 설령 용기가 생겨 찾아가더라도 소여방의 말 몇 마디에 바로 돌아올 터였다.
소여방에 비하면 육비우는 너무 여리고 멍청했다.
“육비우라는 패가 못 쓰게 됐는데, 어떡할 셈이지?”
육장봉은 연고를 들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육장봉은 연고를 내려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지. 그래도 한때 부부였는데 소씨 가문이 이렇게 괴롭히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겠군. 남들이 보면 내가 당신한테 불만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육장봉은 붕대를 바꾸지 않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서재에 들어선 육장봉은 어둠 속에서 등불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먹을 갈고 붓을 들어 편지를 쓰고, 신중한 태도로 인장도 꺼냈다. 개인용 인장을 찍고, 또 대장군의 인장까지 찍었다.
“여봐라!”
편지를 봉하고 육장봉은 암위를 불렀다.
“편지를 순천부윤에게 전해라.”
그는 순천부윤이 항상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 온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수중에는 처리해야 할 사건이 너무 많고, 일도 너무 많아 모든 일을 세심하고 빈틈없이 살필 겨를이 없을 것이다.
순천부윤에게 이 편지를 보내는 데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월씨 가문 사건을 주의 깊게 살펴 주기를 바라서였다. 월령안의 일꾼이 억울하게 약점 잡히지 않도록 공평한 판결을 내리기를 바랐다.
“네, 장군.”
암위는 앞으로 나와 서신을 받아 들고 물러가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왜 그러느냐?”
비록 작은 동작이었지만, 육장봉은 놓치지 않았다. 암위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물음에 낮은 소리로 일깨웠다.
“장군, 월 낭자께는 서신을 쓰지 않으십니까?”
그는 장군의 사생활에 참견할 자격이 없었지만,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
수도에 돌아온 뒤, 암위들은 적잖은 일을 알아냈다.
지난 삼 년간, 월 낭자는 그들의 장군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해왔었다. 덕분에 그들도 제법 이득을 보았다.
사람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월 낭자에게 매우 감동했다. 다른 건 못 해도, 장군 앞에서 그녀를 편드는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이게 월령안과 무슨 상관이 있더냐?”
육장봉은 암위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 본분이나 잘 지키거라!”
‘월령안은 남의 환심을 너무 잘 사는군.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내 암위가 월령안의 편을 들다니.’
“죄송합니다. 벌을 주십시오.”
암위는 잘못을 깨닫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육장봉은 이번에만 봐준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말했다.
“스스로 벌을 받으러 가거라.”
그는 줄곧 엄격하게 군사를 다스려왔다. 규칙은 규칙이다. 누구든 선을 넘고,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은 진작에 정해 놓았다.
육비우도, 그의 암위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육장봉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네, 장군.”
암위는 애초에 말을 꺼낼 때부터 이러한 결과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 * *
월씨 저택.
월령안은 육 사부인의 장부를 육씨 저택에 가져가라고는 했지만, 크게 희망을 품지는 않았다.
육씨 가문에 있는 삼 년간, 그녀는 넷째 집안의 재정 상황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그 집에서 그만한 돈을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육비우 그 인간은…….’
육비우와는 딱 한 번 대면했지만, 그의 멍청함을 인식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이해관계라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도 못했다. 육장봉을 찾아가도 별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육장봉은 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였다.
육씨 가문에 딱히 희망을 걸지는 않았다. 장부를 보낸 것은 육씨 가문과 소씨 가문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서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