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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1)화 (31/1,004)

31화 형님 때문이에요

육비우도 어머니의 말투를 돌이켜 생각해 보자 마음속의 울화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래도 입으로는 가차 없이 험악하게 말했다.

“마님이 몇 마디 꾸짖었다고 불만이라더냐? 성질머리들하고는!”

장방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육장봉에게 은혜를 입지 않았더라면, 그도 진작 떠났을 것이다.

“됐다, 됐어. 다 물러가거라.”

육비우도 자신의 말이 과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말을 내뱉은 이상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는 장방을 내보내고 사부인을 모셔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병으로 앓아누웠다는 답변만 들려왔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꾀병임을 바로 알아챘다.

매번 이랬다.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꾀병을 부렸다. 일이 해결되면 그녀의 병도 씻은 듯이 나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나타났는데, 누군가 핀잔이라도 주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자주 쓰는 수법들을 떠올리자 머리가 아팠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러 가기조차 귀찮아졌다.

물어봐도 아무것도 모른다며, 울기만 할 뿐 말을 하지 않을 게 뻔했다.

“나를 부축해라. 옆집으로 가자.”

육비우는 이를 악물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육씨 가문 넷째 집안은 지금 천 냥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로서는 이 일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월령안이 보낸 사람이 이런 말도 했었다. 바로 다른 사람 때문에 불똥이 튄 거라고.

육씨 가문에서 월령안에게 미움을 산 사람은 그의 넷째 형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월령안의 하인에게 손을 쓸 수 있는 사람도 형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형님 때문에 벌어졌으니, 해결도 당연히 형님이 해야 했다.

* * *

“형님, 형님……. 살려 주세요!”

“형님…….”

육비우는 하인들에게 들려 옆집으로 갔다. 문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비우 도련님, 저희가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락 없이는 아무도 서재에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육장봉의 호위병이 육비우의 앞을 딱딱하게 막아 나섰다. 그는 육비우가 들것에 엎드려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날이 곧 저물려 했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육비우는 들것에 엎드린 채 큰 소리로 불렀다.

“형님, 형님……! 아주 급한 일이에요!”

육장봉은 전선에서 보내온 서신을 읽던 중이었다. 육비우의 고함을 듣자 절반쯤 읽은 편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들라 하라!”

서재는 홍예문과 좀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육장봉의 목소리는 문밖에 있던 사람들의 귓가에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육비우는 더욱 기뻐하며 말했다.

“들었지? 형님이 들어오라 하시잖아. 얼, 얼른 가자.”

호위병은 더는 막지 않고 하인들의 일을 자처했다. 육비우를 직접 서재까지 들어 옮겨 바닥에 내려놓았다.

육장봉은 호위병에게 손을 저어 물러가라고 지시했다.

호위병이 나가자 육비우는 서둘러 가슴에 짓눌린 장부를 꺼냈다. 책상 뒤에 있는 육장봉이 볼 수 있게 손을 애써 치켜들었다.

“형님, 형님. 저 좀 살려주세요!”

“이 몸으로 왜 왔느냐?”

육장봉은 육비우의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바로 받지 않고 싸늘하게 물었다.

육장봉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육비우는 들것에 엎드려 있었다. 육장봉은 육비우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육비우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육비우는 힘겹게 장부를 든 손을 높이 쳐들고 흔들었다.

“형님, 월령안이 우리 어머니를 괴롭혀요! 저 대신 분풀이 좀 해 주세요!”

육비우는 교활하게도 월령안이 쓴 장부만 가지고 왔다. 넷째 집안의 장부는 몰래 숨겨 두었다.

넷째 집안이 고작 천 냥밖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사실은 절대 남에게 들켜선 안 됐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무슨 수로 소함연과 혼인한단 말인가?

“그 여인이 어떻게 네 어머니를 괴롭히더냐?”

육장봉은 여전히 움직이지도, 육비우의 말을 새겨듣지도 않았다.

‘육비우가 그렇게 월령안을 모욕했는데, 월령안이 육비우를 좀 괴롭힌다 해도 정상 아닌가?’

“월령안이 우리 어머니를 속여 차용증과 명세서를 잔뜩 받아놨어요. 오늘 갑자기 사람을 시켜 장부를 가져오더니 날이 저물기 전에 현금으로 갚으라는 거예요. 갚지 못하면 어머니가 쓰신 차용증과 명세서를 전부 경성의 큰 주루 앞에 붙여 두겠다고 했어요.”

육비우는 들것에 엎드린 채 씩씩대며 고자질했다.

“형님, 월령안이 자기는 옹졸하니 원한은 전부 기억한대요! 누구든 자기 사람을 건드리면 그 사람의 친지들까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어요.”

말을 마쳤는데도 육장봉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육비우는 우는 척하며 덧붙였다.

“형님, 전 이번에 형님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겁니다. 모른 척하시면 안 됩니다!”

“나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다고? 허!”

육장봉은 냉소를 짓더니 책상을 돌아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육비우의 손에 들린 장부를 받아서 펼쳐 보았다. 각 장마다 확실하게 쓰인 장부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탁!

육장봉은 장부를 덮고 육비우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여기에 기록된 것 중에 잘못된 것이 있나? 넷째 숙모님이 월령안에게서 돈을 빌리지 않았단 말이냐? 월령안 가게에서 물건을 가져온 뒤 돈을 지불했느냐?”

“형님, 이건 전부 월령안이 우리 어머니를 속인 거라고요.”

육비우는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둘러댔다.

“그럼 네 어머니는 월령안의 돈을 안 빌렸단 말이냐? 물건을 안 가져갔다고?”

‘넷째 숙모님’이라고 부르지도 않는 것을 보니 육장봉이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육비우는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한 가족이잖아요? 가족끼리 뭐 하러 이렇게 정확하게 해 놨대요? 왜 이렇게 인색해요!”

“인색해? 네 어머니가 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무려 오만 냥이나 가져갔는데, 월령안이 인색하다고? 한 가족이라니 내가 기억나는 게 있는데, 그때 조부모님께서 따로 모은 돈을 전부 너희 집안에 물려줬었지. 한 가족이라면서 너는 왜 그 돈을 둘째 숙모와 셋째 숙모께 드리지 않았느냐? 몇 해 전에는 그분들도 어렵게 지냈었는데.”

육비우의 얼굴에 순간 난처한 기색이 스쳐 지났다.

“형님,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육장봉은 장부를 책상 위에 두고 물었다.

육비우가 서둘러 말했다.

“형님, 월령안이 날이 저물기 전에 빌려 간 돈을 전부 갚으래요. 그것도 전부 현금으로요.”

“빌려 간 돈은 갚는 게 인지상정이다. 여기에 적힌 돈은 네 어머니가 빌려 간 것이 맞고, 네 어머니가 써버린 것도 맞다. 너희 집안에서 당연히 갚아야 하지 않느냐?”

육장봉은 육비우를 동정할 수 없었다. 넷째 숙모는 더더욱 동정할 수 없었다. 자기가 저지른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형님, 월령안이 일부러 절 곤경에 빠뜨린 겁니다. 여기에 적힌 돈이 어찌 된 일인지는 나중에 얘기해요. 날이 저물기 전에 오만 냥이나 되는 현금을 어디 가서 구하란 말입니까?”

육비우는 울상을 지은 채 말했다.

“너희 집안에 적어도 현금 십만 냥은 있을 텐데, 오만 냥을 구하는 게 어렵진 않겠지. 장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내가 아니라 네 어머니한테 물어 보거라. 이 장부에 적힌 돈이 네 어머니가 빌린 것인지 아닌지,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겠지. 월령안이 네 어머니에게 갚지 말라고 한 적이라도 있느냐?”

육장봉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월령안과 많이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됨됨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상대하기 쉬운 사람도, 남한테 무턱대고 잘해 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신용을 중요시하는 게 상인의 본분이라면, 월령안은 뛰어난 상인이었다. 하겠다고 했던 일은 전부 해냈다. 반면 해내지 못 할 일은 절대 쉽게 승낙하지 않았다.

육장봉이 이 일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자 육비우는 조바심이 났다.

“형님, 이 일은 형님 때문에 생긴 거예요. 저도 형님 때문에 불똥이 튄 거니까 제발 해결해 주세요.”

육비우에게는 현금 오만 냥이 없었다. 설령 있더라도 월령안에게 갚지는 않을 것이다.

곧 혼인해야 하니 돈을 쓸 데가 많았다. 또 어머니 말로는 월령안이 애초에 일부러 속여서 차용증을 쓰게 했다고 한다.

‘월령안 그 계집은 음흉하고 악독해. 절대 월령안이 이득을 보게 둘 순 없지.’

“나 때문이라고?”

육장봉은 웃었지만,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

“네가 자초한 일이 아니라고 확신하느냐?”

“형님, 월령안이 그랬어요. 누구든 그녀의 사람을 건든다면 그 친지들까지도 괴롭힐 거라고요. 보세요, 형님 때문에 불똥이 튄 게 아니면, 누구 때문이겠어요?”

육비우는 당당하게 말했다.

육장봉은 이 멍청한 놈과는 더는 말을 섞기 싫어 호위병을 불렀다.

“가서 오늘 월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거라.”

육비우는 호위병이 자기에게 불리한 소식을 알아 올까 두려워 서둘러 말했다.

“알아볼 게 뭐가 있어요. 월령안이 형님을 떠올리다 보니 불만이 생겨서 그랬겠죠. 형님한테 트집을 잡을 능력은 없으니까 저한테 화풀이하는 거 아녜요.”

“닥쳐라!”

육장봉은 차갑게 대꾸했다.

“형님…….”

육비우는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

육장봉은 그를 차가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한마디만 더 했다간 쫓겨날 줄 알아.”

“읍!”

육비우는 놀라서 급히 입을 막았다. 형님은 말한 대로 실천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 *

월령안 명의의 제과점이 부서졌고, 사장이 관리들에게 잡혀간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육장봉의 호위병은 자초지종을 소상히 알아냈다.

호위병이 돌아와 보고할 때, 육장봉은 육비우에게 나가라고 하지 않았다. 바로 그의 앞에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게 했다.

“월령안의 제과점에서 파는 과자를 먹고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 일을 트집 잡고 난리를 쳤답니다.”

호위병이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육비우는 화가 나서 소리를 꽥꽥 질렀다.

“망할 월령안! 자기 가게의 과자를 먹다 사람이 죽었는데, 반성하기는커녕 나한테 화풀이를 하다니. 내가 만만하다는 거야, 뭐야?”

“닥쳐!”

육장봉은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육씨 가문 자손이라는 놈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 변방에서 삼 년간 책임을 미루는 법밖에 못 배웠느냐?”

“형님, 저, 저는 아니에요. 월령안이 생트집을 잡는 거예요.”

육비우는 육장봉의 훈계에 기가 죽어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봐라. 월령안이 대체 어디서 생트집을 잡았단 말이냐? 네 어머니가 돈을 빌리지 않았느냐? 아니면 월령안의 가게에서 물건을 가지고 올 때 돈을 제대로 지불했단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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