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29)화 (29/1,004)

29화 빚은 갚는 게 인지상정

상천과 추수는 월령안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수족이었다. 달마다 점포들을 둘러보고 장부를 검사하는 것은 원래 상천이 하는 일이었다. 지금 상천과 추수가 모두 자리를 비우자, 월령안이 혼자서 가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미 사업 대부분을 정리해, 남은 것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는 몇몇 작은 가게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열두 개 점포의 사장은 모두 월령안이 직접 고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매달의 장부를 월령안에게 가져왔다. 오전 반나절 만에 월령안은 점포를 다 돌아보고 돌아가려 했다. 이때 그녀 명의의 제과점 일꾼이 뛰어나오며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 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

일꾼의 얼굴은 멍투성이에다 땀범벅이었다. 머리와 옷은 엉망에다 신발은 한 짝만 신고 있었다.

월령안은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지만,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처음 보는 촌민들이 시체를 들고 와서 우리 가게 앞에 놓았어요. 말로는 우리 가게의 과자를 먹고 죽었다는데, 우리 가게를 부수고 사장님까지 때렸어요. 나중에는 관리들이 왔는데 사장님과 부사장님을 전부 데리고 갔지 뭡니까.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아 소인이 아가씨를 찾으러 나왔습니다.”

일꾼은 숨을 쉬지도 않고 단숨에 상황을 전부 설명했다.

“어느 관아에서 사람을 잡아갔더냐?”

자기 가게의 현황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게에서 파는 음식을 먹고 죽는 일 따위는 절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이것이 누군가의 복수임을 짐작했다. 그러나 누가 한 짓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몇 년간, 돈을 많이 번 만큼 미움을 산 적도 많았다. 더군다나 어제는 소 승상의 체면을 제대로 깎아 놓지 않았던가. 소 승상의 신분과 지위라면, 당사자가 특별히 내색하지 않더라도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녀를 짓밟으려 들 인간들은 차고 넘쳤다.

“순천부(順天府)입니다.”

일꾼은 영특했다. 다급히 달려오면서도 중요한 일들은 사전에 똑바로 알아보았다.

“알았다. 너는 먼저 돌아가서 가게 문을 닫아라.”

월령안은 이 일꾼을 눈여겨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사람을 아주 잘 기억했다. 딱 한 번 자세히 보기만 하면 다시 만났을 때 바로 알아보았다.

이 영특한 일꾼은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나중에 그를 쓰게 될지도 몰랐다.

“소인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일꾼은 월령안이 침착함을 잃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천부로 가자.”

월령안은 마부에게 명령하고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듯 침착했다.

마차는 곧 순천부 관아에 도착했다. 마부가 마차를 세우고 앞으로 가서 관졸들에게 주부(主簿 - 중앙 기관, 지방 군현 수령의 보좌관으로 문서, 장부, 인감 등을 관리함)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마부는 자신의 주인이 순천부의 주부와 친분이 있다고 말했다.

“네 주인님이 누구냐?”

관리는 마부가 내민 돈주머니를 손으로 들어보더니 안색이 확 밝아졌다. 돈주머니가 묵직했기 때문이다.

“우리 주인님은 월씨입니다요.”

마부는 허리를 숙이고 웃으면서 말했다.

“월씨 가문의 여재신(女財神)이라고?”

관졸이 놀랍다는 듯이 묻자 마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졸은 처음에는 눈을 반짝였지만, 곧 아쉬운 듯 손에 든 돈주머니를 흘끔 보았다. 미련이 가득 남은 눈치였지만, 돈주머니를 그대로 마부에게 돌려주었다.

“됐네. 이 돈, 나는 못 받네. 얼른 가져가게. 우리 주부님께서는 자네들을 만나지 않으실 걸세.”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요. 나리들, 어서 받으십시오. 이건 그저 두 분이 차나 한잔하시라고 드리는 것이지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마부가 돌려받지 않으려고 하자 관졸들은 돌려주기 아까워했다. 몇 번 옥신각신한 뒤 마부의 ‘진심 어린 성의’를 봐서 찻값을 받았다.

돈을 받고 나자 관졸들도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여재신의 체면을 봐서 슬쩍 알려 주는 걸세. 어떤 거물이 자네 주인님을 잡으려 하고 있네. 우리 주부님은커녕 우리 대인도 별수가 없을 거야. 자네 주인님한테 빨리 가서 사죄하라고 하게. 어쩌면 돌이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괜히 오기로 버텼다 사람도 돈도 다 날릴지도 모르네.”

“거물이오? 어떤 거물 말입니까?”

마부는 일부러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주인님은 고작 상인일 뿐인데 거물에게 밉보일 일이 뭐가 있답니까?”

“어제 저녁, 소씨 가문 큰 도련님이 표향루(飄香樓)에서 우리 대인의 아드님을 초청하셨네. 무슨 뜻인지 알겠지?”

관리가 은밀하게 속닥였다.

“나리, 너무 감사합니다. 나중에 소인이 술 한잔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표향루는 너무 비싸 엄두를 못 냅니다만, 표향루 옆에 있는 술집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마부는 정보를 알아내고 연신 감사를 표했다.

“좋아, 좋아. 앞으로 돈벼락 맞을 기회가 있다면 우리를 좀 생각해 주면 되네.”

관졸들은 마부가 감사를 표하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온 변경에서 돌도 금으로 만든다는 월씨 가문의 여재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에게 약간의 가르침만 받는다면 부귀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잖은 돈은 벌 수 있을 것이다.

“농담도 참. 나리 같은 분께 어찌 소인네 작은 장사가 눈에 차기나 하겠습니까.”

마부는 넉살 좋게 웃으며 시치미를 뗐다. 멋대로 약속하는 대신 돈주머니를 하나 더 얹어주었다.

“나리, 우리 식구들 잘 좀 보살펴 주십시오. 식구들이 무사하다면, 우리 주인님께서도 반드시 크게 사례를 할 겁니다.”

“내가 큰일은 못 해 주지만 그 정도 일이라면 문제없네. 간수 중에 내 친구들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관졸들은 돈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월씨 가문의 일 처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마부는 뇌물이 제대로 먹히자 핑계를 대고 돌아갔다. 그리고 마차 문 너머에서 보고했다.

“아가씨, 알아냈습니다. 소씨 가문 큰 도련님이 손을 쓴 거라네요. 소인이 관졸들에게 뇌물을 줘서 사장님을 잘 보살펴 달라고 했습니다.”

“소씨 가문?”

월령안은 피식 비웃고 말했다.

“알겠다. 돌아가자!”

어차피 단번에 그들을 순조롭게 빼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성의를 보여주고 쓸 만한 소식을 알아낼까 싶어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 상상 이상의 수확이 있었다.

* * *

월씨 저택으로 돌아온 월령안은 서재로 갔다. 육씨 가문의 사부인이 그녀에게 진 빚을 기록해둔 장부를 꺼냈다.

그 안에서 사부인이 직접 쓴 차용증과 명세서를 모두 꺼내더니, 육비우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인에게 분부했다.

“육 소장군께 말씀드려라. 나는 속이 좁아서 뒤끝이 아주 길다고 말이다. 누구든 내 사람을 건드렸으면 그 사람의 친구들조차 잘 지내는 꼴을 못 본다고 하렴.

그리고 이 장부는 찢어도 소용없다는 얘기도 해. 나는 똑같은 장부를 열 권, 백 권도 쓸 수 있으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어머님이 직접 쓰신 차용증과 서명한 명세서가 길거리에 나붙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날이 저물기 전에 순순히 돈을 갚으라고 해라. 참, 이것도 확실히 말씀드려. 나는 현금만 받지 은표는 받지 않는다고!”

어제 충동적으로 장부를 육씨 저택으로 보내지 않았던 게 참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일을 처리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삼 년 동안, 육씨 가문 사부인은 온갖 구실로 그녀에게서 은표를 빌려 갔다. 그 액수가 모두 사만삼천 냥이나 되었다. 월녕안 명의의 가게에서 가져간 물건도 육천 냥을 훌쩍 넘었다.

그 빚이 무려 오만 냥 가까이 되었다. 이는 사부인의 밑 빠진 독 같은 친정은 물론, 변경의 이류, 삼류 귀족 가문에서도 단번에 내놓을 수 없는 액수였다.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돈을 빌렸으면 갚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소씨 가문에서 그녀의 사람을 건드렸지만, 지금 당장은 소씨 가문의 약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소씨 가문의 사돈에게 손을 쓸 수밖에.

‘육비우, 억울하면 네 아내가 될 소함연의 친정이 소씨라는 것을 탓하라고!’

* * *

육비우는 어제 육장봉을 찾아가 사정했지만, 매정하게 쫓겨났다. 처벌을 면할 마땅한 방법을 찾기도 전,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육장봉의 친위대가 직접 그를 병영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가 곤장을 무려 팔십 대나 맞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야 풀어주었다.

병영에서 상처를 간단히 치료하기는 했다. 그러나 집으로 실려 왔을 무렵, 그는 혼절한 채 엉덩이 전체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사부인은 육비우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 우느라 목이 쉬어 버렸다. 그녀는 집안에서 육장봉을 끊임없이 욕했다. 인정머리가 없다는 둥,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는 둥, 하나뿐인 동생에게 이토록 매정할 수 있냐는 둥, 육씨 가문에 얼마 남지 않은 사내를 때려죽이고 혼자 재산을 독차지할 셈이라는 둥…….

저택의 하인들은 연극 공연같이 계속되는 사부인의 욕설을 들으면서 하나같이 뒤에서 흉을 보았다.

‘마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지금의 육씨 가문은 원래부터 대장군의 것이었다. 굳이 일곱째 도련님을 죽이지 않아도 재산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사부인의 목청은 높고도 날카로웠다. 목이 쉬었는데도 그만두기는커녕 더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그 소리에 아파서 기절한 육비우가 깨어나고 말았다.

“어머니, 욕 좀 하지 마세요!”

깨어나자마자 사부인이 육장봉을 욕하는 소리를 들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만약에 형님이 듣기라도 한다면……! 아니지, 형님은 우리 어머니와 시시콜콜 따질 리가 없지.’

사부인은 욕설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육비우가 깨어난 것을 보자 바로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몸 위에 엎어져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 드디어 깨어났구나! 이 어미는 젊은 너를 영영 보낼 줄 알았단다. 아이고 아들아, 너도 어쩜 그렇게 독하니. 하마터면 이 어미만 남겨 두고…….”

“어머니! 그만 하세요. 저 아직 안 죽었어요!”

엉덩이가 아프고, 몸도 힘든 데다, 귓가에서는 날카로운 소리로 고함을 질러대니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는 비로소 넷째 형님이 저택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을 왜 금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고함은 너무나 끔찍했다. 마귀의 울음소리가 따로 없었다. 곤장에 맞아 죽지 않아도, 어머니의 마귀 울음소리 같은 고함에 머리가 뚫려 죽고 말 것 같았다!

사부인은 큰 소리로 통곡하긴 했지만, 정작 얼굴에는 눈물 한 방울 흘린 흔적이 없었다. 아들에게 무안을 당하자, 번쩍 치켜들었던 두 손이 공중에 멈칫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려갔다. 그녀는 바로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얘야, 너 이게 무슨…….”

“비우 도련님, 월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하인은 집안이 시끄러워 말을 전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기다렸다. 그러다 조용해진 것을 느끼고는 얼른 말을 전했다.

하지만 육비우가 말도 꺼내기 전에 사부인이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월씨 가문에서 사람이 왔다고? 만나긴 뭘 만나, 안 만나! 꺼지라고 해!”

하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사부인의 고함이 그치자 다시 말했다.

“비우 도련님, 이자들이 빚을 받으러 왔답니다. 마님이 진 빚을 오늘은 갚아야 한대요. 만약 오늘 만나주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 마님이 서명하신 차용증과 명세서를 경성의 유명한 주루에 죄다 붙여 놓겠다고 합니다요. 망신당하지 않으시려면 만나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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