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28)화 (28/1,004)

28화 우리는 친하지 않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하인이 명을 받고 물러갔다.

월령안은 잡일들을 마치고 서재로 돌아와 수중의 재산을 계산해 보았다.

어제 상천을 시켜 재산을 최대한 처분하라고는 했지만, 그것들은 전부 변경의 큰 사업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육씨 가문의 보호 없이는 지킬 수 없는 재산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눈독 들이는 재산 외에도, 그녀의 명의로 된 작은 규모의 장사와 조그만 가게는 여전히 수두룩했다.

어제는 이것들까지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로서는 월씨 가문에 딸린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 돈을 벌어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큰 것을 받았으니, 받은 돈을 보아서라도 그녀를 조금은 돌봐 주리라 여겼다. 조그마한 장사를 하는 것은 괜찮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넉 달 뒤에는 청주로 가서 가주 쟁탈전에 참여해야 했다. 그녀의 명의로 된 사업을 남길 수도 없었다. 금전마저도 없는 게 가장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범씨 가문 사람들에게 약점을 잡힐 것이다. 금전을 뺏기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범씨 가문에게 짓밟히고 된통 당하는 건 큰일이었다.

월령안은 장부를 꺼내 수중의 사업을 전부 정리해 보았다. 또 현재 가지고 있는 유동 자금도 잘 계산해 보았다. 자세히 따져본 끝에 내린 결론은 이랬다.

“나는 정말 돈을 잘 버는구나. 돈을 그렇게 많이 뿌렸는데도 아직 현금이 십만 냥이나 남아 있다니. 아주 좋아, 이 정도면 한동안 잘 쓰겠어.”

월령안은 책상 위에서 글씨가 빼곡히 적힌 장부를 집어 들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토록 자아도취에 빠질 때도 있다는 걸 미처 몰랐구나.”

언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독특한 가면의 조계안이 월령안의 서재에 살그머니 나타났다.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월령안이 깜짝 놀라 손을 떠는 바람에 들고 있던 종이가 떨어졌다. 그녀의 모든 재산과 사업을 적어 둔 종이였다.

그녀는 주우려 했지만, 조계안이 한 발 더 빨랐다. 종이가 떨어지기도 전에 낚아챘다.

“온 지 꽤 됐다.”

월령안이 들어오기도 전부터 이미 와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시켜 월령안을 불러오려고 했지만, 그녀가 제 발로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머리를 파묻고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기에 차마 흐름을 끊기 미안했던 것뿐이다.

조계안은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후(母后)와 황형을 대할 때조차도 늘 인내심이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을 대할 때는 평생을 기다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인내심이 넘치는 걸 어쩌랴.

바로 지금처럼, 이렇게 월령안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온종일 기다리고 있어도 전혀 따분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월령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른 적도 없는데 몰래 들어오는 건 도둑이나 하는 짓이죠! 다음번엔 이러지 않길 바랍니다.”

월령안은 순간 얼굴을 굳히고 조계안의 앞에 손을 내밀며 매몰차게 말했다.

“돌려주세요!”

도둑이라 욕을 먹으니 조계안도 기분이 언짢아졌다.

‘좋은 마음으로 사과하러 왔는데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조계안은 기분이 상하자 온몸으로 언짢음을 드러냈다. 싸늘한 얼굴로 월령안의 맞은편에 앉아서 손에 들고 있던 종이로 책상을 내리쳤다.

“안 돌려주면 어쩔 건가?”

“어쩌긴요! 조 대인께서 약속한 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억지를 부리신 게 한두 번도 아닌데요. 조 대인은 신분도 높고 권력도 막강한데, 저 같은 고아가 감히 어쩌겠어요?”

월령안은 지지 않고 조계안에게 빈정거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난 댁 때문에 목숨도 걸게 생겼다고! 감히 내 앞에서 거드름을 피울 거면 칠월 이후에나 해!’

조계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소여방의 사생아 일을 까발리지 않았다고 화가 난 게 아니냐? 불만이 있으면 직설적으로 말할 것이지 음흉하게 비꼬기나 하고. 감히 누구를 그런 식으로 대하느냐?”

‘육장봉 앞에서는 연약한 소녀처럼 나긋나긋하게 굴고 말도 부드럽게 하더니, 내 앞에서는 화약이라도 삼킨 것처럼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군. 내가 월령안에게 빚을 진 것도 아닌데. 아니면 우리 둘 이름에 모두 ‘편안할 안(安)’ 자가 들어 있어서, 내 앞에서는 이렇게 편안하게 구는 건가?’

“그럼 제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요?”

조계안은 약속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소여방이라는 비장의 패도 허무하게 날려 버렸다.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소여방의 사생아에 관한 일을 폭로해 달라는 조건을 수락하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하겠다고 한 적이 있더냐?”

‘월령안, 정말 양심도 없군.’

조계안이 그녀 때문에 황궁에서 황형와 싸우고 혼까지 나고 있을 무렵, 그녀는 정작 육장봉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하!”

월령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가 화났다는 거야, 뭐야?’

“본인의 무능함을 이렇게 신선하고 저속하지 않게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 봤네요. 조 대인, 파렴치함으로는 제가 졌어요!”

“내가 무능하다고?”

조계안은 이를 악물었다. 손은 저도 모르게 책상 위의 종잇장을 구겼다. 손톱이 탁자 위를 긁으면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월령안은 힐끔 보고 차갑게 웃었다.

“그럼 아닌가요? 남아일언중천금이라죠. 조 대인, 저와 약속하신 일은 해내셨나요?”

“급하긴, 소여방은 여기에 그대로 있다. 달아나지 못할 거다.”

그의 황형은 못 해내더라도, 그가 해치우면 그만이다.

월령안은 비웃으며 말했다.

“언제요? 십 년 뒤에요?”

“다음 달 춘일연(春日宴) 때 두고 보아라.”

월령안에게 약속한 일이니 어쨌든 해낼 것이다.

“춘일연이라고요?”

월령안은 잠시 멍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렇군요. 소씨 가문 큰 도련님이 상을 치른 지 삼 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아내를 맞이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춘일연에 참석하는 것도 당연하겠네요.”

매년 봄이 되면 변경에서는 미혼 귀족 남녀가 참석하는 춘일연이 열렸다. 춘일연에 참가한 귀족 남녀들은 시사, 서예, 그림, 금 연주 등을 뽐냈는데, 매해 그중에서 제일 뛰어난 사람을 화신(花神)으로 뽑았다.

월령안은 상인 집안 출신이라 춘일연에 참석할 자격 조건이 안 되었다. 하지만 삼 년 전, 소함연이 억지로 초대하는 바람에 상황도 모르고 참석한 적이 있었다. 소함연은 그때 귀족 여인 무리에 월령안이 화신 칭호를 노린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었다.

원래 경성의 귀족 여인들은 월령안이 연회에 참석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그들은 태도를 바꾸어 그녀가 꼭 참석하기를 바랐다.

월령안은 금, 바둑, 시, 그림 중에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보란 듯이 그해의 화신 칭호를 따냈고, 변경의 귀족 여인들을 화나게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월령안이 비열한 수를 썼다고 우겼지만, 그녀는 연회의 규정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리 못마땅해하더라도, 그녀의 화신 칭호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듬해의 춘일연에서는 그들이 월령안을 의식해서 규칙을 새로 정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헛되게도 월령안은 이미 혼인을 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아쉬워하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황형은 원래 소여방을 공주와 혼인시키려 했었다. 하지만 너 때문에…… 소여방은 부마 후보에서 밀려났지. 어떠냐? 기분이 좀 풀릴까?”

조계안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을 꺼냈다.

그는 황실과 소씨 가문만 알고 있는 비밀을 말했다. 물론, 월령안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비밀을 밝혔다고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그건 참 좋은 소식이네요.”

월령안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졌다.

원체 속이 좁은 걸 어쩌랴. 소씨 가문 사람들이 잘 안 될수록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됐다. 나는 이걸 알려 주러 온 거다. 소여방의 일로 안달하지도, 경거망동하지도 마라. 그 모자가 네 손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소씨 가문 모르게 잘 숨겨 두어라. 전씨 가문에도 손대지 말고. 네 딴에는 전씨 가문이 소여방에게 속지 않게 하고 싶겠지. 정작 전씨 가문에서는 네가 삼 년이나 숨기다가 이제야 말했다며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 일을 그르치게 될 거다.”

그는 월령안의 일 처리에 나름의 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예전과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이제 일품 장군 부인이 아니었다. 그저 육씨 가문에서 쫓겨난 소박데기였다. 월령안을 짓밟음으로써 육씨 가문에 아부하려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월령안은 방긋 웃으며 그에게 두 손을 모아서 인사를 올렸다.

“그럼 조 대인께 부탁드려요.”

누군가 나서서 도와준다면 자신이 굳이 손을 댈 필요가 없다. 월령안이 이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

“정말 현실적이구나. 자신한테 이득이 없다 싶으면 얼굴을 굳히고, 이득이 있다 싶으면 바로 웃는 것이.”

조계안은 정말이지 손에 쥔 종이 뭉치를 월령안의 얼굴에 집어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월령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저는 조 대인과 친하지 않잖아요.”

‘우린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잖아. 날 협박한 데다가 약속한 일도 제대로 못 했으면서 웃어 주기를 바라다니. 대체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 거야?’

그녀는 말을 하면서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작 그는 그녀의 웃는 얼굴에서 비웃음을 느꼈다. 새삼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친해질 거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월령안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와 조계안이 아무리 친해진다 해도 친구가 될 수는 없었다.

조계안은 그녀가 따를 수밖에 없는 주인이었다. 앞으로 평생 조계안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처음부터 친구가 될 수도, 마음을 터놓고 깊게 사귈 수도 없도록 정해져 있었다.

월령안은 말을 마쳤는데도 조계안은 떠날 기미가 없길래 다시 물었다.

“조 대인, 다른 용건이 있나요?”

“없다.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나?”

조계안은 일어나려던 참이었지만 월령안의 말을 듣자 궁둥이를 붙이고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네가 날 어쩔 건데?’

“그럼 편하신 대로 하세요.”

역시나 월령안은 그를 어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움직일 수는 있었다.

조계안이 보는 앞에서, 월령안은 말없이 책상 위의 모든 장부를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럼 실례할게요. 조 대인.”

“이게 진짜…….”

조계안은 앉은 채로 멍하니 월령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혼자 남겨 두고 나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난 지금 네 상전이란 말이다! 이렇게 제멋대로 굴다니. 내가 화를 내는 게 두렵지도 않나?’

끼익.

마찰음과 함께 서재의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월령안은 자신의 행동으로 조계안에게 알려 주었다.

전혀 두렵지 않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