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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6)화 (26/1,004)

26화 헛된 망상에 빠지지 마

육장봉이 어떤 인물인가?

오만하기 짝이 없고, 거만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아닌가. 황제조차 그의 안중에 없었다.

황제가 무슨 뜻이냐고 캐물어도 상대하기 싫을 판에, 하물며 소 승상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육장봉은 소 승상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제 일은 소 승상께서 간섭할 게 아닙니다.”

“이, 이놈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는구먼!”

소 승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왈칵 피를 토했다. 육장봉은 그런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보아하니 소 승상께서는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 저……!”

“성지요!”

소 승상이 미쳐 날뛰기 직전, 때마침 조계안이 입궁해서 요청했던 성지가 도착했다.

성지를 전하는 내관이 말을 타고 날 듯이 달려왔다. 말을 세우고 훌쩍 뛰어내리더니, 성지를 받들고 계단을 올라왔다. 내관은 육장봉과 마주하자 예를 올리고 한 걸음 비키며 소씨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지를 받을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육장봉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월령안이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자 육일한테 눈짓을 했다.

“가시지요!”

육일의 말에 정신을 차린 월령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육장봉, 기다려요…….”

“무슨 일이오?”

육장봉은 말 앞에서 멈춰 섰다.

“아까……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육 장군의 부인 자리를 저한테 평생 남겨 두겠다니, 무슨 뜻이죠?”

월령안은 자신에게 단단히 타일렀다.

‘더는 기대하지 말자. 나랑 육장봉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의 한 줄기 희망을 저버리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육장봉은 입술을 떠는 가여운 그녀의 모습을 보자 비웃으며 말했다.

“괜히 착각하지 마시오. 나는 혼인을 하기 싫어 당신을 방패로 내세운 것뿐이니까.”

“바, 방패?”

월령안은 한참을 멍하니 있더니, 우는 것보다 더 딱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망상에 젖어 허튼 기대에 부풀지 말았어야 했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 당신과 혼인할 생각은 없소.”

육장봉은 그녀가 헛된 기대를 품을까 봐 한마디 덧붙였다.

월령안은 애써 입을 벌리고 웃으려고 했지만, 눈만 동그랗게 떠질 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제 체면을 세워 주셨네요.”

앞으로 누군가 육장봉이 그녀를 내쫓은 일로 트집을 잡는다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육장봉이 나와 이혼한 건 사실이지만, 나를 위해 평생 혼인을 하지 않겠다 했어요.’

‘하지만 난 왜 기쁘지 않지?’

“자기 체면은 자기가 세우는 거요.”

육장봉은 이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말을 탔다.

월령안은 뒷걸음질을 쳐 육장봉이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여러 걸음을 비켜 주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말에 오르려던 순간, 육일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월 낭자, 낭자의 은표입니다.”

월령안은 받지 않았다. 그녀는 기운을 차리고 말했다.

“장군들의 술값으로 쓰세요. 오늘 일은 여러 장군께서 수고가 많으셨어요.”

“그건 안 됩니다.”

육일은 거절하며 기어코 월령안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다시 은표를 밀어주며 말했다.

“육일 장군이 받으세요. 이 은표는 처음부터 소 승상이 당신네 장군님의 체면을 봐서 배상해 준 거예요. 당신네 장군님이 아니었다면 배상은커녕 소 승상이 절 잡아먹지나 않으면 다행이었겠죠. 여러분은 이 은표를 받을 자격이 있어요.”

그녀가 소씨 저택에 찾아가 소 승상에게 배상을 요구한 건 고작 은표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돈은 쓸모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그녀에겐 쓸모가 없었다. 십 년에 걸친 쟁탈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 쟁탈전이 시작된다면 어차피 남은 재산을 범씨 가문에 바쳐야 할 것이다.

“너무 많습니다.”

육일은 인상을 찌푸린 채 다시 한번 월령안에게 건네주었다.

“저에게 그걸 주시면 남 좋은 일 하는 거예요. 보세요, 당신네 장군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잖아요.”

월령안은 앞에 있는 육장봉을 가리켰다. 육장봉도 자기 뜻을 알리라고 생각했다.

“받거라.”

예상대로 육장봉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월 낭자께 감사드립니다.”

육일은 이렇게 많은 은표를 들고 있자니 퍽 난처했지만, 육장봉이 명령을 내리자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군에는 병사가 아주 많았다. 이 이십만 냥을 나눠 준다면 한 사람당 한두 냥이나 받을까. 그렇게 따지면 그다지 많은 돈은 아니었다.

월령안에게서 큰돈을 받은 육일은 겸사겸사 그녀의 환심을 사려 물었다.

“월 낭자, 우리 장군님께서는 성을 나가실 겁니다. 제가 아가씨를 모셔다드릴 사람을 붙여드릴까요?”

“감사합니다만, 이 수도에서 감히 법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를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월령안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육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몸을 돌리자 육장봉이 명령했다.

“육십, 모셔다드리거라.”

월령안은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바래다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

변경이 안전하다고는 해도, 막무가내로 쳐들어오는 인간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오늘 육장봉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 집사를 쫓아내기는 했더라도 억울한 일을 당할 뻔했다.

소 집사가 사실을 왜곡하고, 도리어 남을 비방하는 꼴을 보면 알 만했다.

만약 정말 관아로 갔더라면 관아 사람들은 소씨 가문 하인들의 증언만 들었을 것이다. 조계안의 명령으로 추밀원이 그녀의 뒤를 봐준다 해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기 어려웠을 게 분명했다.

소씨 가문 사람들은 기껏해야 모든 책임을 집사에게 떠넘기고 대충 사과하는 척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 건 소용이 없지.’

월령안은 육십의 호위를 받으며 월씨 저택에 무사히 도착했다.

“집이 어지러우니 안으로 모셔 차를 대접하지는 못하겠네요.”

월령안은 육십을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월 낭자, 별말씀을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육십은 월씨 저택에서 하인이 나와 기다리는 모습을 보자 말을 타고 떠났다.

“아가씨,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월씨 저택의 하인이 월령안의 말을 받아 끌고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걱정되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월령안은 월씨 가문의 기둥이었다. 절대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괜찮아. 앞으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거다.”

월령안은 웃으면서 다독여 주고 저택 입구로 들어갔다.

대문은 이미 뜯어냈고, 새 문은 아직 달지 않았다. 앞뜰에는 소씨 가문 하인들이 부수어 놓은 기물들이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바닥의 핏자국도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청석판 위에 남은 물기만 아니었다면, 조금 전 여기에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 것이다.

“얘야.”

소식을 들은 노인이 하인들이 미는 바퀴 의자에 앉아 서둘러 나왔다. 머리만 흐트러진 월령안의 모습을 보자 안도의 숨을 쉬며 말했다.

“다치지만 않았으면 됐다!”

하지만 월령안의 다친 마음에 대해서는 더 물을 수 없었다.

자고로 백성은 관리와는 싸울 수 없는 법. 월령안이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장사를 하는 고아에 불과했다. 소 승상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약자였다. 그녀가 아무리 정의를 고수해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소씨 가문과 싸움이 날 때마다 손해를 보는 건 늘 그들이었다. 단지 손해가 크고 작고의 차이일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아주 괜찮으니까.”

월령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번엔 소씨 가문 사람들을 아주 제대로 혼내줬어요. 당분간 그놈들이 감히 절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사람들은 가족 앞에서 늘 좋은 일만 알린다. 월령안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육장봉 덕분에 정말로 억울함을 당하지 않았다.

“그래, 네 능력이 참 대단하다! 됐냐?”

노인은 월령안의 명랑한 표정을 보자 그녀가 나쁜 일을 겪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비로소 월령안을 놀릴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사람이 살다 보면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인생이 너무 쓰기만 하지 않은가!

* * *

월령안은 돌아온 후, 저택의 잡다한 일을 잘 처리하게 했다. 또한 소씨 가문과 육장봉의 소식을 알아 오라고 했다.

그녀는 소씨 가문이 성지를 받은 것만 알지,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다. 심지어 성지가 하나인지 두 개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조계안에게 소함연과 육비우를 부부로 맺어 달라는 것과 소여방의 사생아의 일을 밝혀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리할지, 특히 소씨 가문 큰 도련님의 사생아에 관한 사건을 어느 정도로 크게 벌일지는 황제의 뜻에 달렸다.

게다가 육장봉이 나타난 시기가 너무 적절했다. 그가 사람을 시켜 감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아직 철광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그녀의 의심은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월령안은 손이 컸다. 그녀의 하인들도 주인의 일 처리 방식을 잘 알아서, 필요할 때는 돈을 아낌없이 쓸 줄 알았다. 저녁 무렵에 하인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가씨, 황제 폐하께서 소씨 가문의 큰아가씨와 육씨 가문의 막내 도련님에게 혼인하는 명령을 내리셨대요. 석 달 안에 혼인을 마치라고 하셨답니다.”

대갓집 소식을 알아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사에 관한 성지는 조정 대신들에게는 비밀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월령안 같은 일개 상인이 소씨 가문의 소식을 알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가 아니라, 원래 월씨 가문으로서는 그 계급의 사람들을 알 수도 없었다. 하인들이 이러한 소식을 알아 오기까지 적잖은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월령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성지가 그것 하나뿐이더냐?”

‘조계안이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네.’

“성지는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소씨 가문 하인이 말하길 그 댁 큰아가씨가 화가 나 온 집안을 부수고, 죽느니 사느니 하며 소 승상을 위협했대요. 소 승상도 성지에 불만이 있는지 오후에 입궁했답니다. 황궁 사람 말로는 소 승상이 화가 난 채 들어가서 폐하와 반 시진 정도 얘기를 나누고 나갔다는군요. 그리고 황궁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인은 공손하게 말을 마치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가씨, 소 승상이 폐하와 이야기할 때는 주변 사람들을 물려서, 우리 사람들이 더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황궁 안의 소식을 알아볼 때는 신중한 게 최고지.”

월령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황제는 소여방이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을 남들한테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야.’

게다가 황제가 소 승상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 소여방을 이용하는 복수 방법은 이미 그르친 셈이었다.

월령안은 기분이 언짢았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얼른 사람을 시켜 그 모자를 멀리 떠나보내거라. 절대 소씨 가문에서 그 둘을 찾아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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