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란색 긴 치마를 입은 소함연이 나타났다. 사람들 뒤에 서서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문 입구까지 나온 그녀는 육장봉에게 큰절을 올렸다.
“소녀, 육 장군을 뵙습니다.”
소함연은 용모가 청초하고 몸매가 가냘팠다. 변방에서 삼 년간 모래바람을 맞으면서도 거칠고 억세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가냘파졌다. 몸놀림은 산들바람에 살랑거리는 버들가지 같았다. 설령 빠른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더라도 가냘픔이 묻어났다. 월령안의 강하고 꿋꿋한 기질과는 정반대였다.
소함연은 용모가 빼어나진 않았지만, 커다란 눈은 매우 눈에 띄었다. 귀한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그녀의 눈은 상대방을 눈망울에 가득 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전부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토록 연약한 여인이 그 당시에는 파혼하고 도망치는 파렴치한 일을 저질렀다.
월령안은 소함연을 힐끔 쳐다보며, 눈에 드러난 혐오감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소함연의 두 눈은 그윽했다. 볼은 수줍음을 머금고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육장봉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치 놀란 새끼 사슴처럼 때때로 육장봉을 곁눈질로 훔쳐보았을 뿐이다.
육장봉은 얼굴에 혐오감이 잠깐 비쳤을 뿐,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러한 여인은 많이 봐왔다. 단지 허영심이 가득한 여인일 뿐, 새삼 특별할 건 없었다.
소 승상은 바로 불쾌한 기색을 거두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엔 자상함이 가득했다.
월령안은 옆에 서서 냉소를 지었다.
‘남자들은 미인계에 약하지. 육장봉은 소함연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소 승상, 저는…….”
육장봉은 소함연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바로 소 승상에게 작별을 고하려 했다. 하지만 소함연이 마음속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수줍게 입을 열었다.
“육 장군, 저 꼭 좋은 아내가 될게요. 절대, 절대 육 장군을 실망하게 하지 않겠어요. 제가…….”
“그대는 누군가?”
육장봉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얼굴에는 불쾌감이 역력했다.
‘월령안도 감히 내 아내라고 자처하지 못하는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여인이 무슨 배짱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옆에 서 있던 월령안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하하하! 그대는 누군가? 라고?’
그녀는 육장봉의 이 대답에 만점을 주었다. 그가 기고만장하게 굴더라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장, 장군?”
소함연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무너졌다.
“아가씨.”
그녀의 뒤에 있던 하녀가 훈련이라도 받은 듯 제때 부축했다.
“육 장군. 절, 절 몰라보시겠어요?”
소함연의 그 보석 같은 두 눈에 맑은 이슬이 가득 고였다. 가련하면서도 애틋해 보이는 모습은 사람들의 동정을 살 만했다.
아쉽게도 육장봉은 애초에 미인계에 넘어갈 정도로 무른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소함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소 승상에게 말했다.
“소 승상,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육 장군, 자네 이게 무슨 뜻인가?”
소 승상은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 그러면, 육장봉이 오늘 내 딸과 혼인하겠다는 말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월령안이 분풀이를 도와주러 왔다는 건가?’
소 승상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월령안을 노려봤다.
월령안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활짝 웃었다.
소 승상을 골탕 먹일 수만 있다면 육장봉을 잠시 용서할 수 있었다.
“소 승상,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소 승상은 화가 났지만, 육장봉도 성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가 이 정도로 끝낸 것만 해도 소 승상의 체면을 봐준 것이었다.
육장봉은 소함연을 훑어보았다.
‘이런 여인은 내 앞에 다가오기도 전에 내 친위대에게 쫓겨날걸.’
“장군……”
그러나 소함연은 이 시선을 오해하고 말았다. 그녀는 하녀의 품에서 통곡하며 무너졌다.
“장군, 제 여동생이 속상할까 걱정되신 건가요?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정혼한 사이잖아요!”
소함연은 말을 하면서 월령안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마치 월령안이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월령안은 싸늘하게 피식 웃고 그런 소함연을 못 본 척하였다.
소함연의 늘 가식적인 모습에 월령안도 예전부터 여러 번 당해왔었다.
소 승상은 화가 좀 풀렸는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육 장군,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 내 여식에게 사과하게!”
“소 승상의 여식이라고요?”
육장봉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함연?”
아연실색한 육장봉의 표정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그는 눈앞의 여인이 누구인지 정말로 몰랐다.
“하하하하…….”
월령안은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정분이 났다는 거네요! 그럼 저도 유(柳) 선생과 정분이 났다고 할 수 있겠네요?”
“월령안!”
소함연은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화가 났다. 가련한 척하던 것까지 그만두고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육 장군도 너무해!’
육장봉이 아무리 황제 폐하께 혼사를 요구했다고 해도, 소함연은 그를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반드시 그에게 사과를 받아 내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유 선생이 누구요?”
육장봉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유경장(柳景莊)이라고 재능이 뛰어난 남자예요.”
월령안은 유경장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자를 좋아하오?”
육장봉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하죠.”
월령안은 자신에게 재물을 가져다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좋아했다. 유경장도 그중 하나였다.
유경장이 싫다고만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행화루의 아가씨들에게만 가사를 써 주게 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유경장은 재능이 있는 만큼 개성도 뚜렷하여 구속을 당하는 걸 싫어했다.
“그런가?”
육장봉의 말속에서는 위험한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월령안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지금 내가 다른 남자가 좋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건가? 그러는 그쪽은 나를 내쫓은 전 남편일 뿐이잖아. 무슨 염치로 그래?’
소 승상은 그의 앞에서 육장봉과 월령안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진 모습을 보자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
“육장봉, 자네 이게 무슨 뜻인가?”
육장봉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소 승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언짢다는 듯 물었다.
“소 승상께선 무슨 뜻입니까?”
‘지금 내가 바쁜 게 안 보이나? 승상 자리까지 올라갔으면서 어떻게 이 정도 눈치도 없지?’
“장군, 너무 실망스러워요.”
소함연은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상심한 나머지 하녀의 품에 쓰러져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네 지금 우리 소씨 가문을 농락하는 건가?”
소 승상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진 것을 보아,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육장봉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제가 언제 소씨 가문을 농락했단 말입니까?”
‘소 승상이 아직 그럴 연세가 아닌데, 머리가 어떻게 되신 건가?’
“혼사에 관한 일 말이네!”
소 승상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육장봉과 황제의 사이가 남다르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는 절대로 이렇게 호락호락 넘어가 주지 않았을 것이다.
육장봉이 말했다.
“성지는 곧 내려올 것입니다.”
그는 조계안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황제가 머뭇거리더라도 조계안은 황제를 설득할 수 있었다.
소 승상은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왜 내 딸을 모른다고 했나?”
‘변방에서 삼 년간이나 함께 지냈다면서 알지 못한다고 하고, 알지도 못한다면서 또 어떻게 황제께 혼사를 내려달라는 청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육장봉 이놈은 너무 가식적이군. 좋은 배필감이 아니야.’
하녀의 품에서 거짓 울음을 터뜨리던 소함연은 육장봉과 소 승상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육장봉의 긍정적인 답변을 듣자 울음을 뚝 그치고 하녀를 밀쳐 냈다. 바로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장군이 절 모른 척하시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
소함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장봉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이 여인을 알지 못합니다.”
“큽! 크흡!”
월령안은 웃음을 꾹 참았다.
“흐흑……. 죽어버릴 거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
소함연은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려서 치맛자락을 붙잡고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거듭 육장봉에게 망신을 당했다. 하필이면 월령안 앞에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얼굴이 아무리 두꺼워도 이런 수모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자네…… 얼른 따라가지 않고 뭐 하나.”
소 승상은 더는 화낼 기운도 없었다.
육장봉이 이런 인간인데도 그렇게 많은 여인이 그에게 목을 매다니. 하늘도 참 불공평했다.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육장봉이 차갑게 대꾸했다.
“제가 저 여인과 혼인한다고 대체 누가 그랬습니까?”
“자네, 자네 무슨 말인가? 내 딸이…… 육씨 가문에 시집가기로 하지 않았는가?”
소 승상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오랫동안 벼슬자리에 있으며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순간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육장봉은 더욱 차갑게 말했다.
“육씨 가문에 시집온다는 게 저한테 시집오는 거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육씨 가문에 육씨가 육장봉 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날 농락하다니!”
소 승상은 마침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어제 저는 앞으로 삼 년 동안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월령안과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아내를 맞이한단 말입니까?”
‘나 육장봉이 약속도 안 지키는 사람이 될 수는 없지.’
소 승상은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질책 대신 굳은 얼굴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 딸은 삼 년간 기다릴 수 있네!”
“그건 제가 안 되겠습니다.”
육장봉이 냉정하게 거절했다.
“제가 비록 아내와 이혼을 했지만, 육 장군의 부인이라는 자리는 영원히 월령안에게 남겨 주겠습니다!”
마침 혼인을 하지 않을 이유가 생겼다. 어디 한번 두고 볼 참이었다.
‘내 아내라는 자리는 이제 없으니 허영심 많은 여인들이 또 염치없이 덤벼들진 않겠지?’
육장봉은 가볍게 말했지만, 이 말은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특히 월령안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육장봉, 이게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평생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육장봉, 이게 무슨 말인가? 월령안 때문에 평생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월령안이 하지 못한 질문을 소 승상이 대신해 주었다.
‘육장봉,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