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23)화 (23/1,004)

23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죠?

“사돈을 맺는다고?”

소 승상은 월령안의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 육장봉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육장봉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출셋길이 열렸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반대로, 소 승상의 여식은 변방에서 삼 년간 지내다 돌아왔다. 순결을 잃지는 않았더라도 명예는 이미 훼손된 셈이라 좋은 가문에 시집가기란 사실상 글렀다. 그런 그녀가 육씨 가문의 육장봉과 혼인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함연이도 같은 생각이겠지.’

그런데 마침 월령안의 말을 듣자 소 승상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육장봉이 따로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그도 같은 생각인가 보군.’

소 승상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상황이 이런데, 소 승상께서는 아직도 부인하실 셈인가요?”

월령안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육장봉에게 말했다.

“육 장군, 제가 함부로 말한 것 아니죠? 소씨 가문의 큰아가씨는 육씨 가문에 시집가는 게 맞죠?”

육장봉은 월령안의 의도를 몰랐다. 하지만 장단을 맞춰 대답했다.

“그렇소.”

월령안은 없는 얘기를 지어내지는 않았다. 단지 말을 분명히 해 주지 않았을 뿐이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육장봉의 대답을 들은 소 승상은 기뻐서 펄쩍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애써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육장봉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소 승상이 육장봉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뜨겁고 간절해져, 보는 사람들도 심히 부담스러워졌다.

육장봉과 월령안은 물론, 섬세하지 못한 호위병 육십이도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나 감히 말을 하지는 못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곁에 서 있었다.

육장봉은 소 승상을 가소롭다는 듯 잠시 바라보았지만, 곧 말을 이었다.

“혼사를 내린다는 성지는 오늘 나올 것입니다.”

‘지금쯤 조계안이 성지를 재촉하러 입궁했을 테지.’

육장봉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십이, 황궁에 다녀와라. 황제 폐하께 오늘 꼭 좀 성지를 내려 달라고 아뢰어라.”

‘조계안이 이 공로를 독차지하게 둘 수는 없지.’

“네, 장군.”

육십이는 어리둥절해졌다. 사람들이 자기를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자기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는 명령을 받자 계단을 쿵쿵 내려가더니 말을 몰아 황궁으로 달려갔다.

육장봉은 월령안의 옆자리가 빈 것을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소씨 저택 대문은 너무 비좁군. 사람 하나 빠지니 훨씬 낫네!’

소 승상은 미칠 듯이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입이 귀에 걸린 채 되물었다.

“저기, 육 장군, 이게 사실인가? 황제 폐하께서 내 여식과 자네를…….”

이때, 월령안이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소 승상, 이래도 제 편이 되어 일을 바로잡아 주실 건가요? 저를 위해 버팀목이 되어 주실 건가요? 저는 고아인가요, 아니면 소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가요? 오늘 얘기를 확실히 끝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소 승상에게 혼사에 관한 진실을 미리 알 기회를 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소 승상과 소함연의 기쁨이 커졌을 때 물거품이 되길 바랐다.

마치 그녀가 육장봉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없이 기뻐하고 기대했다가 나중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느꼈던 이 씁쓸함을 원수들도 하나하나 천 번, 만 번 느껴 보기를 바랐다.

육장봉이 예비 사위가 된다고 하자, 월령안의 돈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소 승상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령안아, 너는 월씨이지 소씨가 아니잖느냐. 너는 그때 네 어미를 따라 소씨 가문에 들어오지도 않았지. 나도 너를 딸로 인정하고 싶다만, 예법에 맞지 않는 걸 어떡하겠느냐!”

만약 월령안이 소씨 가문 둘째 딸이라면 육장봉과 혼인하는 소 재상의 딸은 동생의 남편을 빼앗은 격이 되고 만다.

‘우리 소씨 가문에서 이런 낯부끄러운 일을 만들 수는 없지.’

“그럼 저는 소씨 가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씀이시죠?”

월령안이 재차 물었다.

“너는 월씨이니, 우리 소씨 가문과 원래부터 아무런 관계가 없다.”

소 승상은 실망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이 몇 년간, 난 네 어미를 봐서 너를 많이 보살펴주고, 네 그 고집스러운 성격도 많이 받아 줬었다. 하지만 넌 밖에서 우리 소씨 가문의 명성을 믿고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지 않았느냐. 여태까지 네가 저지른 일들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단다. 너도 어린 나이가 아니니, 나는 이제 더는 널 상관치 않을 거다. 이후에 무슨 일이 생기든 너 혼자 알아서 하려무나.”

월령안은 소 승상의 가식적인 모습에 역겨움을 참기 힘들었지만, 차분하게 물었다.

“그러면 저 월령안과 소씨 가문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거죠?”

소 승상은 육장봉을 힐끔 쳐다보았다. 육장봉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에 육장봉이 직접 인정했고, 또 호위병을 시켜 혼사에 관한 성지를 받아오라던 모습을 떠올리자 확신이 생겼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비록 난 네 어미와 혼인을 하긴 했지만 너는 우리 소씨 가문에 입적하지 않았어. 너와 우리 소씨 가문은 처음부터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예전에도 상관이 없었나요?”

월령안이 물었다.

“예전에도 없었지.”

소 승상이 대답했다.

“앞으로도 상관이 없나요?”

월령안이 재차 물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소 승상은 화를 누르며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런 미련도 없죠?”

월령안이 날이 선 말투로 다시 물었다.

소 승상은 속으로 월령안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없다!”

그러나 육장봉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잘됐네요!”

월령안이 갑자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소 승상의 이 한마디를 무려 십 년이나 기다려왔다.

‘드디어 정정당당하게, 이 가식적이고 역겨운 인간과 완전히 선을 그을 수 있게 됐구나.’

그녀는 소 승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표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소 승상, 승상댁 집사가 우리 집 녹나무 대문을 부쉈어요. 이십 만 냥을 배상해 주세요. 그리고 승상댁 하인이 우리 집 하인들을 때려 다치게 했어요. 약값과 손해 배상 비용 등은 만 냥이 되겠습니다. 총 이십일 만 냥을 배상해 주세요.”

“령안아, 적당히 해라.”

순간, 소 승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월령안이 건네준 전표는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소 승상, 설마 배상 안 하겠단 건 아니시죠?”

월령안도 정색하면서 성큼 한 발짝 내디뎠다.

“증인도 있어요. 못 믿으시겠으면 육 장군께 물어보시죠. 우리 집 대문을 승상댁 하인이 부순 게 맞죠?”

“제가 증명합니다. 사실입니다.”

육장봉이 때맞춰 끼어들었다.

월령안은 소 승상에게 덫을 놓고 한 걸음 한 걸음씩 함정에 빠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덫에 걸려든 소 승상은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다. 육장봉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

“육장봉, 자네…….”

소 승상은 이미 육장봉을 자신의 사위로 보고 있었다. 육장봉의 팔이 밖으로 굽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육장봉은 소 승상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도록 한마디 덧붙였다.

소 집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려니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소 승상이 일어나란 말을 하지 않자 감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월령안의 말에 육장봉이 증언을 하자, 그는 기회가 오기라도 한 듯 서둘러 말문을 열었다.

“나리, 그 문은 저희가 부순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 허름한 문짝이 절대 녹나무는 아니었습니다. 월령안 저 고약한 것이 나리께 사기를 치려는 겁니다. 나리, 절대 월령안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리고 월령안이 사람을 시켜 저희를 때린 겁니다. 나리…….”

교활한 적군보다 멍청한 아군이 더 무섭다더니, 영락없이 그 꼴이었다.

“소 승상, 댁의 집사가 인정했는데 모른 척하지는 않으실 거죠?”

월령안은 의미심장하게 소 승상을 바라보았다.

소씨 가문은 지난 삼 년 동안 그녀의 덕을 적잖게 보았지만, 사실 현금은 보유량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십일만 냥이면 한동안 소 승상을 속 쓰리게 만들 수 있는 액수였다.

하지만 월령안은 금전상의 손해보다도 더욱 속 쓰릴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소 승상의 마음에 쏙 든 사윗감은 절대 그의 사위가 될 수 없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육장봉을 흘긋 바라보았다.

이쪽도 속이 시커먼 대마왕 같았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경계심이 매우 높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힐끔 쳐다보았을 뿐, 바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그를 훔쳐보았다는 것을 들킬까 봐 겁이 났다. 그녀가 아직도 마음속에 그를 담고 있다고 오해라도 하면 아주 곤란했다.

‘더는 육장봉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거야!’

월령안은 몰랐지만, 그녀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육장봉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의 모습은 마치 풀리지 않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했다.

소 승상은 월령안의 뻔뻔함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둘 사이의 이상 기류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소 집사가 쉬지 않고 입을 놀리자 다리를 들어 걷어찼다.

“입 다물어라!”

소 집사는 발에 차여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어 말실수를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소 승상, 댁의 집사 말로는 댁의 따님 명령으로 우리 집 대문을 부쉈다더군요. 저는 고아라, 변경에서 어디 기댈 데도 없는데, 엄연한 승상께서 제 돈을 떼먹진 않으시겠죠?”

월령안은 소 승상의 굳은 얼굴을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한 번 재촉했다.

소 승상은 몰래 월령안에게 눈을 부릅떴지만, 한편으로는 육장봉을 힐끔 쳐다보았다. 육장봉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월령안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소 승상은 울화를 애써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

“월령안, 내 딸이 좋은 마음으로…….”

“우리 집 대문을 부쉈지요.”

월령안이 말을 이었다.

“허튼소리 지껄이지 마라!”

소 승상은 육장봉이 불만을 품을까 봐 서둘러 해명에 나섰다.

“내 딸은 대갓집 규수인데, 그럴 리가…….”

“파혼하고 달아났죠!”

월령안의 또렷한 목소리가 또다시 소 승상의 말을 끊었다.

“이, 이것이……!”

소 승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한 손으로는 가슴을 억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월령안을 삿대질했다. 그리고 뒷걸음질 치며 몰래 육장봉의 반응을 살폈다.

육장봉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기뻐하는지, 실망하는지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의 딸은 전선에서 육장봉과 삼 년이나 함께 지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딸에게 마음을 쏟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육장봉이 직접 호위병을 황궁에 보내 폐하께 성지를 내려 달라 재촉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떠올리자 불안감이 또 사라지는 듯했다.

‘백번 양보해도, 육장봉이 월령안을 사모하는 건 아니겠지? 오늘 함께 온 것도 단지 도의를 지키기 위해서겠지?’

“나리, 나리……!”

소 승상의 뒤에 서 있던 하인이 바로 앞으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눈치가 빠른 하인은 더욱 과장해서 고함을 질러댔다.

“어의, 얼른……! 얼른 궁에 가서 어의를 모셔와라! 나리의 지병이 또 도졌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