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성질 한번 더럽네
소씨 가문의 다른 하인들은 이 광경을 보자 입을 더 꾹 틀어막았다. 또 몸을 가능한 한 동그랗게 말았다. 여기서 당장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저놈들을 묶어다 소씨 저택으로 보내거라.”
육장봉이 차분하게 명령을 내렸다.
월령안은 의아한 눈길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에 그의 생각이 갑자기 바뀌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의 뜻에 들어맞는 행동이라 더는 캐묻지 않았다.
이번에는 육장봉이 소씨 가문 사람의 다리를 분질러 주기는 했지만, 월령안은 오천 냥을 더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천 냥이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 돈으로는 육장봉을 움직이게 만들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가 은표를 준다면, 그건 그의 체면을 구겨 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늘 체면을 구겨 놓을 상대는 소 승상이지 육장봉이 아니었다.
월령안이 육장봉을 훔쳐보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만 그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깊고 고요한 눈을 마주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 서둘러 눈길을 돌렸다.
‘내가 왜 긴장하지?’
눈길을 돌리고 나서 월령안은 화가 났다.
‘육장봉의 얼굴은 사람들이 보라고 있는 거 아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몇 번 더 보면 어때서? 내가 왜 긴장해야 해?’
월령안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정정당당하게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의 ‘사람 잡는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길을 피하기는커녕 정면으로 마주했다.
‘내가 질 것 같아!’
그를 쳐다볼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는 될 수 없었다.
“다 봤나?”
육장봉이 갑자기 입을 열더니 비웃음 섞인 어조로 물었다.
“뭐, 뭐예요? 당신 본 거 아니에요.”
월령안은 본능적으로 부인했다.
“흥.”
육장봉은 코웃음을 치더니 밖으로 나갔다. 두어 걸음 옮기다가 그녀가 뒤따르지 않자 다시 멈추었다.
“멍하니 뭘 하고 있소. 빨리 따라오지 않고.”
월령안은 어안이 벙벙해 좌우를 두어 번 둘러보고 나서야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육장봉의 친위대는 대단히 효율적으로 일했다.
월령안이 잠깐 정신을 판 사이, 소씨 가문의 하인 이십여 명을 모두 종자(粽子 – 찹쌀밥을 대나무 잎사귀에 싸서 단단히 묶은 음식)처럼 꽁꽁 묶여 한 줄로 꿰었다.
다들 옆에 대기하고 서서 월령안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령안은 곧 정신을 차리고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갔다.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검은 얼굴의 호위병이 친절하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마님, 말을 탈 줄 아십니까?”
“월 낭자라고 불러줄 수 없나요?”
월령안은 듣기 거북하여 다시 한번 고쳐 주었다.
“그런데 저희 장군님의 부인이시잖아요. 그리고 장군님도…… 반대하지 않는데요?”
호위병의 말꼬리가 점점 흐려지며 마지막에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은 온통 억울함으로 가득했다.
커다란 사내의 외모는 평범한 데다가 얼굴까지 까맸다. 그가 아무리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도 월령안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월령안은 처음으로 자신이 외모지상주의자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건 몰랐으면 더 좋았을 텐데.’
월령안은 묵묵히 눈길을 거두고서 물었다.
“어제 제가 당신네 장군 앞을 가로막을 때 자리에 있었나요?”
“있었어요! 있고 말고요! 진짜 있었어요!”
호위병이 흥분하여 말했다.
“전 그때 장군님과 말 세 필만큼의 거리에 있었어요. 마님께서 뛰쳐나오셨을 때, 전 정말이지…….”
“그만!”
월령안이 그의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제 이후로 저와 당신들 장군하고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걸 아셔야죠. 이제부터는 저를 월 낭자라고 불러주세요. 아니면 제가 또다시 시집이나 갈 수 있겠어요?”
“네? 마님, 또다시 시집을 가신다고요?”
그는 그만 예의도 잊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 고함은 앞에 가던 육장봉뿐만 아니라, 맨 뒤에서 소씨 가문의 하인들을 끌고 가던 호위병들에게까지 똑똑히 들렸다. 그러자 다들 제자리에 굳어 버린 채 원망이 가득한 눈길로 일제히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저희 장군을 버렸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육장봉 역시 정신을 차리고는 차가운 눈길로 월령안을 지켜보았다.
월령안도 웬만한 상황에는 단련이 되어 있어, 황제 앞이라 해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육장봉과 그 친위대 열두 명의 시선을 받자 왠지 맹수의 표적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체불명의 긴장감이 들어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월령안은 곧 적절하지 못한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불쾌하다는 듯 검은 얼굴의 호위병을 흘겨보았다.
“또 시집가는 게 어때서요? 당신네 장군이 먼저 절 버렸는데, 제가 평생 수절해야 하나요? 제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요?”
육장봉이 자신을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설령 육장봉이 전사했다고 해도 그녀가 평생 과부로 지내야 한다는 법률적 규정은 없었다.
육씨 가문에 시집온 여인들이라고 남편이 세상 뜬 뒤 모두 수절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식이 없는 이들은 삼 년만 지나면 대개 재가하였다.
‘내가 육장봉에게 시집갔다고는 해도, 육장봉이 전사한 것도 아니고 날 먼저 저버렸는데, 내가 왜 수절을 해야 해? 내가 육장봉에게 빚을 진 것도 아니고!’
“그, 그게, 그게요…….”
검은 얼굴의 호위병은 반박하려 했지만,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마님, 아니, 월 낭자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어서 빨리 움직여라!”
육장봉은 말에 올라타 있었다. 그의 눈빛은 모든 이를 넘어서 월령안에게 닿았다. 월령안은 눈을 들어 그와 눈 맞춤 하더니 담담하게 눈길을 돌렸다.
“저는 말을 탈 줄 알아요. 여기에도 말이 있으니 데려오라고 하지요.”
월령안이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눈치 빠른 하인이 온몸이 새하얀 백마를 끌고 왔다.
“조야옥사자(照夜玉獅子)가 아닌가요?”
검은 얼굴의 호위병은 그 말을 본 순간 눈에서 빛이 났다. 조금 전까지의 난처함은 싹 잊어버렸다. 한두 걸음 만에 계단을 뛰어넘어 말 앞으로 달려가더니 말을 에워싸고 빙빙 돌았다.
“마…… 아니, 월 낭자, 말을 만져봐도 되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조심할게요. 절대로 말이 다치지 않게 할게요.”
명마를 본 그는 바로 호칭을 바꾸었다.
“고작 말 한 필일 뿐인데요, 뭘. 마음대로 만져 보세요.”
월령안은 하인이 이 말을 끌고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순간 가슴이 저렸다. 형체 없는 커다란 손이 자신의 심장을 옥죄는 것 같아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조야옥사자. 암수 한 마리씩 거액을 들여 사들였다.
‘그런데 무슨 소용이야? 선물도 못 했고, 선물하고 싶어도…… 상대방이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을 텐데.’
“이건 조야옥사자라고요. 보통 말이 아니고 명마 중의 명마, 보마 중의 보마란 말입니다.”
검은 얼굴의 호위병은 백마를 어루만지며 심취한 나머지 얼굴로 털을 문질렀다.
“털이 참 부드럽네요. 근육도 정말 탄탄하니 힘이 좋고요. 이 선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이 육십이(陸十二) 평생에 조야옥사자를 직접 볼 기회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렇게 직접 만져 볼 수까지 있다니!”
“한 마리 더 있거든요. 그렇게 마음에 든다면 선물할게요.”
원래 선물하려고 했던 사람에게 줄 수 없게 된 마당에, 누구에게 준들 똑같았다.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육장봉에게 눈길을 돌렸다. 정작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검은 얼굴의 호위병 육십이가 흥분하여 펄쩍 뛰었다.
“월 낭자, 정말이세요……!”
“흠흠!”
육장봉이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정말…… 전 받을 수 없습니다.”
육십이는 눈에 띄게 주눅이 들었다. 높이 뛰었다가 조용히 착지하더니 바로 울상이 되었다. 월령안은 그런 그를 보자 웃음이 터졌다. 마음속의 씁쓸함도 조금이나마 사라졌다.
“좋아요. 남겨둘게요. 언제든 원하는 때 와서 가져가세요.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말일 뿐인데요, 뭐.”
‘그래. 고작 말 한 필일 뿐이야!’
육장봉을 위해 찾아다녔던 보물이 얼마나 많았는데. 말 한 필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었다.
“월 낭자는 정말 좋은 분이세요. 아쉽게도…….”
육십이는 육장봉을 힐끔 보자 마음이 더 울적해졌다.
‘하필이면 우리 장군님의 부인이라니. 그렇지만 않았어도 내가 꼭 월 낭자한테 장가들었을 텐데. 조야옥사자도 척척 선물하겠다, 이렇게 돈 많고 대범한 아가씨를 어디 가서 찾겠어?’
“아쉽게도 제가 나이가 더 많죠, 그렇죠?”
월령안은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가 얼굴이 까맣고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어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육장봉 곁에 있으면서 아직도 활발한 것을 보면 분명 나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헤헤…….”
육십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십이는 아직 어려서 성격이 튀는 편입니다. 월 낭자께서도 나무라지 마십시오.”
나이 많은 호위병이 월령안의 곁에 다가와 읍하면서 사과하였다.
“괜찮아요.”
월령안은 손을 내젓고는 호위병들을 따라 말에 올라탔다.
그녀가 자세를 잡자마자 육장봉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이를 본 월령안은 조야옥사자의 엉덩이를 채찍질해 따라나섰다. 조야옥사자는 명마답게 주인이 굳이 닦달하지 않아도 육장봉의 뒤를 침착하게 따라갔다.
그런데 골목을 벗어나자, 조야옥사자가 제멋대로 속도를 올리더니 육장봉의 말을 따라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돌려 육장봉의 말에 콧바람을 뿜어댔다.
“어……!”
월령안은 당황해서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려 했다. 하지만 조금만 뒤떨어져도 그녀의 백마는 바로 따라붙었다.
두어 번 더 고삐를 당겼더니 말이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놈은 육장봉의 말에게 끊임없이 콧김을 뿜어댔고, 머리로 떠밀기까지 시작했다. 두 말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결국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서로 가까워질수록 조야옥사자는 육장봉의 말을 밀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육장봉의 말도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라 지지 않고 덩달아 덤벼들었다.
길은 널찍한데, 두 말이 서로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는 통에 두 사람의 다리가 수시로 부딪혔다.
“이 멍청이! 이쪽으로 와!”
월령안이 연신 고삐를 당겼으나 말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였다. 아무리 힘껏 잡아당겨도 조야옥사자의 힘이 워낙 세다 보니 몇 번이고 굴러떨어질 뻔했다.
‘성질 한번 더럽네!’
월령안은 약이 바싹 올라 조야옥사자를 떼어 놓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다급한 나머지 눈이 벌게질 지경이었다. 반면 육장봉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체했다.
다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기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