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거래는 어디까지나 거래
“형씨, 일어나세요. 우리 장군은 도와주러 온 거예요.”
호위병이 하인 곁을 지나다가 놀라서 널브러진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육장봉의 명을 듣자마자 바로 부축하던 손을 놓고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다.
“어이쿠야!”
겨우 몸을 일으켰던 하인은 또다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반면 그 호위병은 늑대처럼 싸움터에 뛰어들더니 제일 먼저 집사부터 제압했다.
소 집사는 땅바닥에 머리를 짓눌린 채 고통스럽게 소리쳤다.
“너희는 누구냐? 감히 우리 소씨 가문 집안일에 끼어들어?”
뚜벅뚜벅.
“나다!”
청석을 깐 길 위로 군화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 육장봉은 소 집사 곁으로 다가가 걸음을 멈추었다.
소 집사는 호위병에게 짓눌려 꼼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육장봉의 군화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육장봉이 입을 여는 순간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육, 육 대장군!”
소 집사는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렸지만, 얼굴만 아팠을 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어이쿠, 아이고……!”
이 무렵 소씨 저택의 하인들은 육장봉의 친위대에 걷어차여 땅에 쓰러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육장봉이 쓱 둘러보고 말했다.
“시끄럽다. 입 다물라 해라.”
“네, 장군.”
호위병이 명령을 받고 땅바닥에 드러누운 하인을 걷어찼다.
“아악!”
하인이 아픈 나머지 비명을 질러 댔다. 호위병이 목소리를 높여 호통쳤다.
“입 다물어. 더 소리쳤다간 때려죽일 거야. 나도 만 냥 벌고 싶거든!”
“우웁…….”
하인들은 아파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가 새어 나왔다가는 이 살벌한 무리에게 돈을 벌 기회를 주게 될까 두려웠다.
월령안은 시녀의 보호를 받아 뒤쪽에 있었다. 하지만 육장봉이 나타나는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눈앞의 상황이 다 정리되자, 월령안은 시녀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막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때였다. 갑자기 호위병의 말이 들려와 잠시 중단하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마님, 저, 저기……. 농담입니다.”
그 말을 한 검은 얼굴의 호위병은 월령안의 시선을 느끼자 겸연쩍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일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월령안은 호위병에게 읍을 하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호언장담을 들은 것을 알아채고는 말을 이었다.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가 한 말은 지킵니다. 저들 중 한 사람을 다치게 했으니 천 냥을 드리겠습니다.”
“마님, 아닙니다요. 안 됩니다. 저는 장군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마님의 돈을 받을 수야 없지요.”
검은 얼굴의 호위병은 연신 뒷걸음질 치며 손사래를 쳤다. 동시에 육장봉을 은근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그가 화를 낼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장군께서는 절 월 낭자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소씨 가문에서 모두 스물여섯 명을 끌고 왔으니, 소 집사까지 합쳐 모두 스물일곱 명이군요.”
월령안은 사람 수를 세고는 시녀에게 분부했다.
“은표 삼만 냥을 가져오너라.”
“네, 아가씨.”
시녀가 명을 받들고 자리를 떴다.
“마님. 저, 저기 안…… 안 됩니다. 저희는 받을 수 없습니다.”
검은 얼굴의 호위병이 연신 머리를 저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서 했다.
“이건 여러분이 자기 능력으로 번 돈이에요. 못 가질 게 뭐 있습니까? 친형제 간에도 계산은 똑바로 해야 한다고 했어요. 저는 여러분과 아무런 연고가 없습니다. 어찌 여러분께 손해를 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월령안은 검은 얼굴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육장봉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검은 얼굴의 호위병이 아무리 무디어도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머뭇머뭇하다가 육장봉을 힐끔거리며 나지막하게 불렀다.
“장군……!”
‘우리 능력으로 번 돈인데 가져도 되겠죠?’
“받거라!”
육장봉이 서슬 푸른 눈빛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나와 선을 긋겠다는 건가 본데, 그게 가능할까?’
“네, 장군. 감사합니다. 마님, 감사합니다.”
호위병은 환하게 웃으며, 연신 두 사람에게 읍을 했다.
가난해서 군대에 간다고 했다. 군인이 되어도 가난하다 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가난뱅이 군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마님 말씀대로 이건 우리가 우리 능력으로 번 돈이야. 우리가 안 가지면, 남들이 가지겠지. 그러니 딴 놈들이 갖게 두느니, 우리가 가지는 게 훨씬 낫지! 그래, 이게 맞는 거야!’
시녀가 곧 은표 삼만 냥을 가져왔다. 월령안은 확인하지도 않고 검은 얼굴의 호위병에게 건네라고 분부했다. 호위병은 육장봉이 머리를 살짝 끄덕여 동의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은표를 건네받았다.
“마님,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상대방이 부르는 호칭에 더는 연연하지 않고 친절하게 부탁했다.
“여러 장군께 부탁드릴게요. 절 도와 이 사람들을 묶어 소씨 저택으로 보내 줄 수 있으시죠?”
‘이 월령안의 돈을 그렇게 쉽게 벌 수 있을 줄 알아? 삼천 냥을 더 받았으면 그 값을 해야지.’
“개도 주인을 보고 때리는 법이다.”
육장봉이 담담하게 한마디 충고했다. 소 승상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소씨 가문 대공자의 사생아 건을 폭로한 정도로, 소씨 가문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황제에게는 아직 소씨 가문이 필요했다. 또한 황제는 조계안과 달리 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태후가 정계에서 물러날 때도 소 승상이 황제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황제는 줄곧 그 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 승상이 이때까지 쌓아 놓은 정을 소진하기 전까지는 황제도 그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월령안의 눈길이 육장봉에게 닿았다. 그러나 냉기가 가득한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응대했다.
“대장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전 소 승상께 사죄하러 가려는 건데요.”
“꼭 가야겠소?”
월령안이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고집불통일 줄은 몰랐다. 사실 이번 접전에서 월령안이 손해를 본 것도 아니었다.
“월씨 저택의 대문짝을 부쉈는데 호락호락 넘어갈 수는 없죠.”
월령안은 바람도 막을 수 없는 대문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백 년 된 녹나무로 만든 것인데 지금은 가격이 폭등해 사려고 해도 없어요. 소 승상은 정직하고 평생을 청렴하게 사셨으니 몇 년 치 녹봉을 모아야 우리 집 문짝 두 개를 배상할 수 있을까요.”
“풉!”
호위병이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게 우스워요?”
월령안이 정색하며 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호위병은 난처해하며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땅 위 나뭇조각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 이건 평범한 홍목(紅木 - 마호가니)입니다. 소 승상의 석 달 치 녹봉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난 백 년 묵은 녹나무 가격으로 샀어요. 그렇다면 제가 사기를 당했다는 얘긴가요?”
월령안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자 호위병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사기를 당한 게 분명합니다. 이 홍목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나쁜 사기꾼 같으니. 감히 나를 속였군. 이십만 냥에 평범한 홍목 문짝을 사게 하다니!”
월령안은 능구렁이 담 넘듯이 욕 한마디를 덧붙이더니, 곧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다행히도 문을 샀을 때 받은 전표가 있으니, 소 승상께 전표대로 배상하라고 하면 되겠네요.”
“이십만 냥요? 마님, 이 문을 어디서 사셨습니까? 이건 분명 홍목 문짝입니다. 많이 줘야 백 냥을 넘기지 않을 겁니다.”
호위병은 깜짝 놀라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곧이어 의리가 넘치는 목소리로 월령안에게 약속했다.
“부인, 저희한테 알려 주세요. 저희가 당장 그 사기꾼을 찾아가서 돈을 내놓으라 하겠습니다.”
월령안은 호위병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가 진짜 놀랐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육 대장군, 당신의 호위병들은…… 모두 이렇게 진지한가요?”
“순진한 사람 놀리지 마시오.”
육장봉도 검은 얼굴의 호위병을 힐끔 바라보았다. 자신의 곁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처음 알게 되었다.
“육 장군. 그래서 저를 도와주실 거예요, 말 거예요?”
장사는 어디까지나 장사다. 육장봉의 사람들이 삼천 냥을 더 받아 놓고도 돕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 돈은 돌려받아야 했다. 자신이 약속한 대로 인당 천 냥이라는 조건은 변함없지만, 더 많이 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내가 돕지 않으면 어찌할 셈이오?”
육장봉이 땅바닥에 쓰러진 채 아직까지 옹송그리고 있는 소씨 가문의 하인들을 슬쩍 훑어보고 물었다.
월령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죠.”
육장봉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돈 삼천 냥으로 도와줄 사람을 찾지 못할 리가 없었다.
“돈이란 게, 벌어들인다고 해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쓸 게 아닌가.”
일반인들이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다칠 수도 있는 게 월령안의 돈이었다. 월령안이 웃었다.
“소 승상이 조야에 권력이 미치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 관직에 있다고는 하지만, 적수가 없겠나요.”
월령안의 말을 듣자, 소 집사는 온몸의 통증도 잊은 채 고개를 힘껏 쳐들고 고함을 질러 댔다.
“월령안, 이 비천한 년, 우리 나리가 무슨……!”
“닥쳐!”
“닥쳐!”
월령안과 육장봉이 거의 동시에 호통을 쳤다. 둘은 말이 끝나자 약속이나 한 듯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월령안은 바로 눈길을 거두었다. 소 집사를 가리키며 검은 얼굴의 호위병에게 말했다.
“저놈의 다리를 분질러 버리면, 오천 냥을 더 드리겠어요.”
호위병은 얼떨떨해서 말했다.
“마님,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게…….”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육장봉이 소 집사의 종아리를 지르밟았다. 뚝, 소리와 함께 소 집사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질러 댔다.
“악……! 으악……! 내 다리! 월령안, 이 천한 년, 나리께서 가만두지 않을 거다! 월령안, 망할 년! 너 두고…….”
“시끄러!”
“저놈 입을 막아라.”
또다시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월령안이 육장봉을 보지 않았다. 얼굴을 돌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검은 얼굴의 호위병은 왠지 이들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미처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동료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멍하니 뭐 하고 있어? 빨리 움직여.”
“그래, 빨리 해치워야지!”
검은 얼굴의 호위병은 소 집사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를 짓누르고 있는 동료에게 일으켜 세우라고 손짓하더니 주먹을 날렸다.
“으악!”
소 집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까무러쳐 버렸다. 월령안은 말이 없었다.
‘입을 막는 정도로는 역시 너무 약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