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18)화 (18/1,004)

18화 저놈들을 잡아라

문밖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안뜰에 있는 월령안에게도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하인들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주저 없이 밖으로 나섰다.

앞뜰에 도착하자 바퀴 의자에 앉은 노인을 만났다.

노인도 문으로 나가보려던 참이었다. 그는 월령안이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자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얘야, 얼른 들어가거라. 이런 일에 네가 나서면 안 된다.”

“제가 안 나서면요? 영감님이 나서시게요?”

월령안은 듣는 체도 않고, 하인을 불러 분부했다.

“뭐 하느냐? 어서 어르신을 모시지 않고.”

하인이 노인의 바퀴 의자를 밀어 되돌아갔다.

“얘야, 얘……!”

노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월령안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요. 앞으로 또 시집갈 일도 없는데. 그렇게 자잘하게 신경 써서 뭐 해요?”

월령안도 노인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변경에 머무는 십 년 동안, 노인은 단 한 번도 문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육장봉을 빼고는 누구도 만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육장봉을 만났을 때도, 저녁 무렵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아마 그를 알아볼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노인을 돌려보내고, 시녀와 함께 대문 어귀에 이르렀을 때였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대문이 부서지며 열렸다. 문을 막고 있던 하인들은 모두 대문짝에 깔리고 말았다.

곧이어 소씨 저택의 집사가 하인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문 안쪽에 서 있는 월령안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더니,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공수를 했다.

“어이쿠, 둘째 아가씨가 여기 계셨군요. 저는 아가씨가 주인도 몰라보는 천한 하인들에게 감금된 줄 알았죠. 지금 막 아가씨를 구출하러 가던 참인데. 이렇게 아가씨께서 제 발로 나오셨네요.”

“소 집사, 여긴 우리 월씨 가문 저택이네. 소씨 가문 둘째 아가씨는 여기 없어. 아랫것들을 데리고 썩 돌아가라.”

월령안은 화난 얼굴로,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계속 되뇌었지만, 마음속의 분노를 삭일 수는 없었다.

‘내가 아무리 돈을 잘 번들, 계책을 잘 짠들 소용이 없구나.’

혈혈단신인 여성 상인에게는 아무 보호막이 없으면 개나 소나 집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 그녀의 체면, 존엄, 자부심을 깔아뭉개려 했다. 그러니 강경함과 냉정함으로 자신의 자부심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소인은 나리의 명을 받고 아가씨를 모셔 가려 온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육씨 가문 처사가 이토록 건방지니 나리께서 반드시 아가씨의 편이 되어 주실 겁니다. 아가씨께서 속절없이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으실 겁니다.”

소 집사가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월령안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말을 끝내고 소 집사는 손을 휙 저으며 등 뒤의 하인들에게 기세등등하게 명령했다.

“가만히 서서 뭣들 하느냐? 어서 둘째 아가씨를 모시거라.”

하인들이 손을 쓰려는 순간, 월령안의 말이 들렸다.

“추밀원에 보냈던 심씨 가문의 뚱보를 한번 생각해 보아라. 내가 너희라면 가만히 있을 거다. 이 월령안이 소씨 가문 나리는 어찌 못한다만, 너희 같은 잡놈들까지 무서워할 거 같으냐?”

하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일제히 소 집사를 바라보았다.

어제 상천이 떠들썩하게 심 뚱보를 추밀원에 끌고 갔으니 그 광경을 목격한 이가 부지기수였다. 심씨 가문이 소씨 가문에 의지하고 있으니, 소씨 가문의 집사가 모를 리 만무했다. 어제 추밀원에 가서 사람을 빼 내오려고 했으나, 추밀원에서는 그들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소 집사는 예까지 생각이 미치자, 낯빛이 살짝 변하더니 월령안을 힐끔거리며 관찰했다. 월령안이 아무런 내색도 안 하는 것이 자신만만해 보여 더는 방자하게 굴지 못했다.

그는 눈알을 굴리다가 다시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월령안에게 읍을 하였다.

“둘째 아가씨, 혹시 오해하시는 것 아닌지요? 나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가씨는 소씨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소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라고요. 아가씨가 육씨 가문에서 내쫓겼으니, 아가씨의 체면뿐만 아니라 우리 소씨 가문의 체면도 완전히 무시한 겁니다.”

그러고는 능글맞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리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아가씨는 마음 푹 놓으시라고요. 나리께서 반드시 아가씨를 대신해 편을 들어주마 하셨습니다. 육씨 가문 부인이라지만, 육장봉이 내치고 싶다고 내칠 수 있는 게 아니죠. 이혼장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 나리께서 나서시면 아가씨는 여전히 육씨 가문의 정실이실 게 아닙니까.”

월령안이 육장봉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남들은 몰라도 소씨 가문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월령안이 어머니를 따라 변경에 온 지 십 년이 다 되었지만, 소씨 가문과 타협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육씨 가문에 시집간 삼 년간은 육장봉을 위해 소씨 가문과 거듭 타협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월령안의 약점이 육장봉이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육장봉의 아내라는 자리로 월령안을 유혹하면 쉽게 속을 거라며 소 승상이 귀띔해 주었다.

일단 월령안이 소씨 저택 대문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은 그녀가 어찌할 수 없었다.

월령안은 소씨 가문의 파렴치함에 기가 막혀, 되려 웃음이 나왔다.

“월씨 가문의 집안일로 소 승상께 신세를 질 수야 없지. 소 승상께 날 신경 쓸 시간이 있거든, 당신 아드님한테나 신경 쓰라고 전해라. 아드님의 첩과 자식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

“아가씨, 밥은 아무거나 먹어도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변경에서 해마다 실종되는 아가씨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중 한 명이 되고 싶진 않으시겠죠?”

소 집사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에는 독기가 번뜩였다.

“허튼소리인지 아닌지는 너희가 더 잘 알 것이다. 소씨 가문의 추잡한 일들은 내 입에 담기도 싫다. 당장 꺼지지 못해!”

월령안은 슬쩍 한발 물러서며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좋은 말로 할 때 곱게 따라야지! 이년이, 감히 이 소 나리를 협박하다니! 오늘 이 어르신이 본때를 보여주마!”

소 집사가 하인의 손에서 몽둥이를 낚아채더니 월령안에게 세차게 휘둘렀다.

‘월령안은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 호된 맛을 보여줘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야 해.’

“누구 머리 꼭대기 위에 기어오르는 거야?”

미리 방어하고 있던 월령안은 날아오는 몽둥이를 시녀와 함께 훌쩍 피했다.

뚝!

몽둥이가 바닥에 떨어지며 두 동강이 났다. 소 집사가 얼마나 힘을 썼는지, 만약 월령안이 피하지 않았다면 죽지는 않더라도 불구가 될 뻔했다.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공격이 빗나가자 소 집사가 부러진 몽둥이를 잡고 또다시 휘두르려 했다. 그 순간 월령안이 돌 하나를 들어 올리고 호통쳤다.

“그래, 해 볼 테면 해 보자! 누가 더 빠를까? 누구 머리가 먼저 터질까? 내가 죽으면 네놈도 살아남지 못할 거다!”

“이년이!”

소 집사는 악에 받쳤으나, 감히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뒤따르던 하인들도 앞으로 나서려다 모두 꼼짝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아랫것들 싹 다 데리고 같이 꺼져라!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

월령안도 대차게 나왔다. 돌을 번쩍 들어 올린 모습이 사납고 독해 보였다. 누구든 손 하나 까딱하는 순간, 지옥까지 함께 끌고 들어갈 기세였다.

그녀가 눈이 벌게진 채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자, 소 집사는 겁이 더럭 났다.

돈 때문에 온 것이었지, 사람을 죽이러 온 건 아니었다. 월령안을 호되게 혼내 주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괜히 인명 사고라도 나면 승상도 그를 감싸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소 집사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한 발짝 물러섰다. 손에 들었던 몽둥이를 던져버리고 야비하게 둘러댔다.

“아가씨, 오해하셨군요. 아까 벌레가 그쪽으로 기어가길래 벌레를 쫓아 드리려고 했죠.”

이윽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시 말을 건넸다.

“나리께서 아가씨를 기다리십니다. 저희를 돕는 셈 치고, 한번 같이 가십시다. 아가씨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이 변경에서 나리의 체면을 무시하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리가 나서기만 하시면 아가씨는 육씨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 높은 가문에도 또다시 시집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 꺼지겠다는 말이냐?”

월령안은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부류의 놈들은 반쯤 죽여 놓지 않으면 영영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아!’

마침 대문짝에 깔렸던 월씨 가문의 하인들이 기어 일어났다. 그들은 월령안의 앞을 막아 나서며 적개심에 불타는 눈길로 쏘아보았다.

“하하하!”

소 집사가 박장대소했다.

“아가씨, 순진하시군요. 손에 든 그 벽돌과 이 사람들이면 우릴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 벽돌은 내려놓고 말로 하시지요. 아니면 아가씨가 손해를 볼 겁니다.”

“아니! 너희를 막을 필요는 없어. 그냥 관아에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면 돼.”

월령안이 별안간 한 발짝 성큼 물러서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골목 어귀로 가서 크게 소리치거라. 누구든지 우리를 돕기만 하면 열 냥을 줄 것이다. 소씨 가문의 못된 하인 하나를 때려죽이면 만 냥, 다치게 하면 천 냥, 병신을 만들면 오천 냥을 주겠다!”

월령안의 처소가 있는 이 구역의 이웃들은 지체가 높은 편이나 썩 부유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길목에 있어, 골목을 벗어나 몇십 장(丈 - 1장은 약 3m)만 나가면 오가는 사람이 많은 큰길이 나왔다. 하인이 밖에 나가 소리친다면 이웃들이야 체면 때문에 도우러 오지 않는다고 해도 거리의 막일꾼들은 미친 듯이 달려올 것이다.

월령안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람이 많으면 코끼리도 물어 죽일 수 있다고!’

“그리고 도와주러 오는 이들에게 이르거라. 오기 전에 꼭 얼굴을 가리고 오라고. 모든 뒷감당은 이 월령안이 할 것이다!”

마침 육장봉이 소식을 전해 듣고 친위대와 함께 달려온 참에 월령안의 호언장담을 들었다. 고삐를 잡고 있던 손이 저도 모르게 잠깐 굳어졌다.

그는 아직 월령안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하나 때려죽이면 만 냥, 병신만 만들어도 오천 냥! 장군님, 마님께서는 진짜 돈이 많은가 봐요.”

“세상에, 전에 우리 마님이 복덩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땐 못 믿겠던데, 이젠 믿을 수 있겠네.”

“장군님, 저…… 돈을 저희가 벌어도 될까요?”

양옆에서 육장봉을 따르던 호위병들이 월령안의 말을 들었다. 그들은 급히 말을 몰아 앞으로 몰려들더니 너도나도 물었다.

육장봉이 차가운 눈길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 봐라!”

“어이쿠, 이건……!”

월령안의 명령을 받은 하인이 사람을 부르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가 대문 어귀에 이르자 육장봉 등이 말에서 내려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인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육장봉이 계단에 올라 하인 곁을 성큼성큼 지나쳤다. 뜰에 이르렀을 때는 몸싸움이 한창이었다. 그 와중에 월령안은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육장봉은 얼굴빛이 확 변해 명령했다.

“저놈들을 사로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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