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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7)화 (17/1,004)

17화 곳곳에 남아 있는 흔적

돈으로 귀신을 부릴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육씨 저택과 황실의 문은 뚫을 수 있었다.

육장봉의 입궁 시간은 알 수 없었다. 그 외 육장봉이 육씨 저택에서 출발한 시간, 출궁 시간, 육씨 저택으로 돌아간 시간은 모두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상천이 조금 전에 소식을 전해왔어요. 자시(子時 – 오후 11시~익일 오전 1시) 삼각(三刻)에 육씨 저택을 나서, 축시에 출궁하고, 축시 이각(二刻)에 육씨 저택으로 되돌아갔대요. 시간으로 보아, 집에서 나와 바로 황궁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어요. 출궁한 다음에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어요.”

월령안의 아리따운 용모는 어둠에 가려져 있어 마치 검은 비단을 겹겹이 두르고 있는 듯했다. 무겁고 비장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 시간에 입궁한 걸 보면, 분명 황제와 철광산에 관해 얘기했을 거다.”

노인은 의자에 기대앉아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령안아, 다행스럽게도 네가 남색의 유혹을 이겨내고 말하지 않았으니 망정이다. 그놈은 돌아 나가는 순간, 우리를 팔아넘겼을 거야.”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육장봉과 황제는 추측만 할 뿐, 증거를 찾아 헤매야 했다. 그러면 황제도 월령안을 당장 제거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월령안이 뾰로통하여 노인을 흘겨보았다.

“제가 남색 때문에 일을 그르칠 사람인가요? 이렇게 큰일을 어떻게 털어놓을 수 있겠어요?”

둘은 명의상의 부부로 만난 적도 없으며, 육장봉은 그녀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하지만 설령 삼 년 동안 부부의 금실이 좋았다 해도, 그녀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것도 부부 사이다.

월씨 가문에 충성하는 몇천 명이나 되는 하인의 목숨이 걸린 문제를 어찌 쉽게 발설할 수 있겠는가?

육장봉이 정 알고 싶다면, 반드시 이익 당사자가 되어 월씨 가문과 운명을 같이해야만 했다.

월령안은 감정이 아닌 이익만을 믿었다. 감정은 배신할 수 있지만, 이익으로 엮인 공동체는 쉽게 배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방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황제는 철광산을 찾으려 하는구나. 철광산을 즉시 묻어 버리고, 병기에 관해서도 반드시 황제에게 그럴듯한 답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게다.”

황제의 끈질긴 성격을 보아, 철광산을 묻기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진작 준비해 두었어요.”

월령안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지난 삼 년간, 제가 왜 소씨 가문을 참고 가만두었을 거 같아요? 왜 하필 소씨 가문 돈을 써서, 군량과 병기를 전선에 보냈을까요? 설마 소씨 가문이 육장봉에게 잘 보이게 도와주려고 그랬을까요?”

“증인과 증거는 다 준비했느냐?”

노인은 월령안의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물론이죠. 지금까지 소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았던 건, 어머니의 시신부터 찾아오려고 그랬어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소씨 가문에 연루되어 죄인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월령안은 눈을 질끈 감고 한탄했다.

“기다릴 수가 없네요. 기다려서도 안 되고요.”

“산 사람이 더 중요하지.”

노인이 무거운 어조로 답했다.

월령안도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요. 산 사람이 더 중요해요.”

그녀는 아까까지의 가라앉은 기분을 털어버리고, 정신을 다잡고 말했다.

“상천과 추수를 북요의 국경 지대로 보낼 거예요. 그 둘은 제 수족과 같은 애들이에요. 둘이 변경으로 떠난다면, 절 감시하는 놈들 대부분을 끌고 갈 수 있을 거예요. 또한 목적지가 북요라면, 그분들도 더 깊이 생각하겠죠.”

“그래, 맞다.”

노인이 머리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제 곁에 두고 쓸 만한 사람이 몇 안 돼요. 신임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고요. 상천과 추수가 가버리면, 저도 일하는 게 많이 불편할 거 같아요. 그래서 변경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을 두고, 몇 년간 쌓은 인맥을 관리하게 하려고요. 영감님,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추천 좀 해 주시죠?”

사랑이 떠나가도 사업이 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백 년간 월씨 가문에 충성한 이들을 위해서라도, 뒷일을 생각해야만 했다.

청주 범씨 가문과의 가주 쟁탈전은 그 자리를 위한 싸움일뿐더러, 그녀 자신과 그녀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모든 이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승낙한 이상 최선을 다해 싸워서 이겨야만 했다. 황실은 언제나 그랬듯이, 실패한 자와 무능한 자는 헌신짝처럼 버릴 것이다.

“마침 그런 사람이 있단다.”

노인이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심씨네 큰 도련님을 알고 있느냐?”

“심민(沈憫)요? 생모가 정신이상이라는 심씨 가문의 큰 도련님 말씀이시죠?”

월령안도 마침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 심민 자체가 출중해서가 아니었다. 심씨 가문은 권세에 빌붙는 게 특기라, 지난 두 해 동안은 소 승상에게 의지해 변경에서 제법 잘나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주목하게 되었다.

노인이 머리를 끄덕였다.

“바로 그 사람이다.”

“오늘, 상천을 시켜 심씨 가문 사람을 추밀원에 끌고 갔어요. 이런 상황에서 저희와 손을 잡자고 할까요?”

월령안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물론이지. 네가 항상 공동의 이익이 있으면 손잡을 수 있다고 했잖느냐? 마침 심민은 심씨 가문에 앙심을 품고 있어. 내가 한참 동안 주의해서 살펴봤는데 누군가 한번 밀어주면, 꼭 큰일을 해낼 사람이야.”

“전 젊은이들한테 기회를 주는 게 가장 좋아요. 언제 한번 심민을 만나보고, 괜찮다 싶으면 팍팍 밀어주죠. 그 사람의 은인이 돼 볼게요.”

월령안이 흐뭇하게 웃었다.

“말투가 왜 그 모양이냐? 모르는 사람은 네가 칠팔십은 먹은 노인네인 줄 알겠구나.”

노인이 농담했다. 월령안은 평소처럼 서둘러 반박하지 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진짜로 늙었나 봐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젊고 생기가 넘칠 수 있겠는가? 젊은 건 겉모습일 뿐이었다.

노인은 어둠 속에 묻힌 월령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볍게 탄식했다.

* * *

월령안은 황실에서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감시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상천과 추수를 변장시켜 성 밖으로 내보냈다.

한밤중에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고?

고양이에게 제 길이 있듯, 쥐에게도 자기만의 길이 따로 있다.

빛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어둠도 있는 법. 두 사람을 눈에 띄지 않게 성 밖으로 내보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설령 두 사람을 눈에 띄지 않게 없애야 했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상천과 추수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변경을 떠났다. 다만 육장봉의 아랫사람들이 일부 단서를 찾아냈을 뿐이었다.

“장군님, 엊저녁 누군가 절름발이 육(六)을 통해 두 사람을 성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 둘은 월씨 가문의 하인이라고 합니다.”

육장봉은 장기간 군 생활을 하다 보니 시녀를 두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친위대가 그의 일상생활을 돌보고 있었다.

호위병은 조식을 들고 오는 한편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육장봉에게 보고했다.

“상관할 필요 없다. 넌 사람을 시켜 지난 삼 년 동안 받은 병기를 하나하나 정리하거라. 공부에서 나온 것과 다른 것은 모두 봉인하여 보관해야 한다. 내 명령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만약 밖으로 새 나간 병기가 있다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수거해라. 알겠느냐?”

월령안이 급히 사람을 내보낸 이유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뻔했다.

만약 월령안이 철광산 건을 무마시켜 황제의 의심을 거둘 수 있다면, 이 또한 그녀의 능력일 것이다.

“네, 장군님.”

호위병의 커다란 목소리에, 밖에 있던 새가 놀라 날갯짓을 해댔다.

육장봉이 힐끗 바라보고 말했다.

“우선 식사나 하자.”

“장군님, 먼저 드십시오. 오늘 조식은 특별히 풍성하군요. 저는 냄새만 맡아도 군침이 돕니다.”

호위병이 멋쩍게 웃더니 조식을 내려놓고 나갔다.

육장봉은 자리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조식을 훑어보았다. 총 열여섯 접시였다. 접시마다 정갈한 요리가 담겨 있어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순간 마음속에 조그마한 파문이 일었다.

모두 그가 즐겨 먹는 것들이었지만, 육씨 가문 조식에는 나타나지 않을 법한 음식들이었다.

육씨 가문의 조식은 줄곧 죽과 소가 없는 찐빵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는 조부 때부터 전해 내려온 규칙이었다. 조부께서 죽과 찐빵을 특별히 좋아하셨던 건 아니었다. 다만 육씨 가문에는 음식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냥 배가 부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육씨 가문은 경영에도 능하지 못했다. 그런데 많은 노병을 보살펴야 했기에 재정적으로 쪼들리다 보니 검소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 또한 귀찮은 것을 싫어했다. 집에 머무르는 시간도 극히 적어, 굳이 조식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아마 이 모든 것은 월령안이 남기고 간 규칙일 것이다.

삼 년. 그가 모르는 사이 월령안은 그의 생활 곳곳에 살그머니 침투해 있었다.

지금 월령안은 육씨 저택을 떠났다. 그러나 어제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느꼈다시피 그녀의 흔적은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시집온 지 삼 년이나 되었음을 시시각각 일깨워 주고 있었다.

* * *

육씨 저택에 있는 동안, 월령안은 육장봉의 일과를 알아냈다. 또 그 시간에 자신의 일과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나중에 부부 둘이 일과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둘의 일과가 거의 일치하지만, 아쉽게도 같이 생활할 기회가 없어졌다.

진시(辰時 – 오전 7시~9시) 일각. 육장봉이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월령안도 식사를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을 차리고 입에 음식을 넣지도 못했는데 밖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월령안이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인을 불러 물으려 할 때, 시녀가 서둘러 달려 들어왔다.

“아가씨, 소씨 저택 집사가 사내종들을 이끌고 우리 집 문을 막고 있어요. 아가씨를 소씨 저택으로 모셔 가서 버팀목이 되어 줄 거라고 하네요.”

월령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소씨 저택? 소 승상 댁 말이니?”

‘이것들이 죽으려고 제 발로 찾아왔네?’

“맞아요. 아가씨!”

시녀가 사색이 되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데다가, 하나같이 힘이 세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고 있어요. 추수 언니도 없고, 얼마 버티지 못할 거 같아요.”

“관아에 보고는 했느냐?”

월령안은 얼굴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소씨 가문이 집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울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바보의 생각은 항상 기발하여 평범한 사람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법이다.

“집사가 사람을 보냈어요. 그런데 관아에서 소 승상 댁이란 말을 듣고 감히 오지도 못한다네요.”

시녀가 입술을 사리물고 월령안을 힐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가 관아에 보고했다는 얘기를 소씨 가문 집사가 듣더니 주제 파악을 못 한다고 비웃었어요. 이건 소씨 가문의 집안일이니까 관아에서 관여할 사항도 아니거니와, 설사 온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했어요.”

“소씨 가문의 집안일?”

순간 월령안의 눈에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난 월 씨인데, 소씨 가문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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