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이건 신임에 대한 문제야
“네? 저, 저는 폐하의 뜻에 따른 것뿐이에요. 폐하께서 제게 밀지를 보내셨어요.”
육비우는 원망할 생각조차 없어졌다. 육장봉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혀, 형님. 제, 제가 잘못한 겁니까?”
“폐하의 밀지를 받았다고 제멋대로 병영을 떠나도 된단 말이냐? 군법은? 개나 줘라, 이거냐?”
군대에서의 군령이란 태산같이 무거운 법. 누구도 무단이탈은 금지였다.
“한밤중에 병영을 나가 혼자 입성을 했잖느냐! 나에게서 허락을 받은 적이 있느냐?”
“허락을 받았습니다! 엊저녁에 형님께 여쭸잖아요.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한발 먼저 입성하겠다고요. 형님도 동의했고요. 못 믿으시겠거든 소을(小乙) 걔들한테 물어보세요. 저희가 다 같이 형님을 찾아가 여쭤보지 않았습니까.”
육비우는 놀란 표정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형님이 고의로 날 함정에 빠뜨리려는 건 아니겠지? 본인이 허락한 일을 설마 잊어버린 건가?’
“나한테 물어봤었다고? 언제? 어디서?”
엊저녁 육비우를 만난 적이 없었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부장(副將)과 공무를 의논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와 이혼할 것을 암시하는 황제의 편지를 받기는 했었다. 그때는 한번 훑어보고 던져 버린 뒤 신경 쓰지 않았다.
이혼하더라도 입성한 뒤 월령안과 직접 이야기할 요량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입성했을 때는 모든 일이 다 끝난 뒤였다.
“엊저녁 제가 한잔하긴 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축시(丑時 – 오전 1시~오전 3시)였는데, 형님이 마침 제게로 다가왔어요. 그때 깜짝 놀랐거든요. 제가 술을 마신 걸 알고 벌을 주시려는 줄 알았거든요.”
육비우는 육장봉이 자신을 믿지 않을까 봐, 몰래 술을 마신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네가 본 사람이 나라고 확신하느냐?”
육장봉은 육비우가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분명 형님이었어요. 그때 당시, 어둡기도 하고, 술도 좀 마셨지만, 완전히 취하진 않았거든요. 형님의 모습과 목소리를 착각할 리가 없다고요!”
육장봉이 믿지 않을까 봐 육비우는 손을 들어 맹세까지 했다.
‘모습과 목소리?’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아까 더 세게 때려줄 것을.’
“알았다. 가서 벌을 받아라.”
육장봉은 냉랭하게 한마디 던지고는 대청을 나섰다.
이 일이 육비우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조계안은 그의 외종사촌이다 보니, 외모가 칠 할 정도는 비슷했다. 조계안이 육장봉의 모습으로 분장한 데다가 밤의 어둠을 빌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육비우가 얼큰하게 취한 틈을 타 그를 속이기는 무척 쉬웠을 것이다.
그래도 육비우는 벌을 받아야만 했다. 행군 도중에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육장봉은 온종일 딱딱한 군장 차림으로 있느라 거동이 불편했다. 그는 낙원(落院 – 건물 앞뒤 쪽에 울타리를 두른 공터)으로 돌아와 목욕을 마친 뒤, 평상복으로 바꿔 입고 서재에 앉아 병서를 꺼내 들었다.
반 시진이 지나 병서를 내려놓고 침실로 돌아갔다. 탁자 위에 놓인 약을 보고서야 약을 바꿀 때가 되었음이 떠올랐다.
그의 복부에는 상처가 있었다.
보름 전, 밤에 북요를 탐색하려다가 그곳의 최고 고수의 손에 상처를 입었다. 북요에 잠입한 것은 사사로운 행동이었기에, 부상을 남들에게 알릴 수 없었다. 그 역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남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보름 동안, 암위(暗衛 - 비밀 호위)가 사흘 간격으로 약을 준비해 주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육장봉은 자리에 앉아 윗옷을 풀어 헤치고 단단한 상체를 드러냈다. 땀과 피가 흥건히 밴 붕대가 보였다. 붕대를 풀고 상처에 밴 피와 땀을 닦아낸 뒤 연고를 발랐다. 다시 깨끗한 붕대로 상처를 감싸고는 겉옷을 걸쳤다. 이 모든 과정이 차 한 잔 마실 시간 안에 끝났다.
붕대를 교환하는 동안,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치 본인이 아닌 나무토막을 갖다 놓고 붕대를 바꿔주는 듯했다.
처리를 마치고 나자 육장봉이 암위를 불렀다.
“깨끗하게 처리하거라.”
“네, 장군님.”
암위가 더러워진 붕대를 거두었다. 조금 남은 연고도 조심스럽게 챙겼다. 장군이 쓰는 연고는 약왕(藥王) 손불사(孫不死)가 직접 만든 설옥고(雪玉膏)였다. 작은 병 하나에도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잠깐!”
육장봉은 고개를 돌려 암위가 약병을 챙기는 것을 보더니 미간을 살짝 구겼다.
“이 연고는 언제부터 썼느냐? 그리고 누가 보내온 거지?”
그의 기억에 따르면 예전에 썼던 약은 이것보다 효과가 훨씬 못했다.
‘이 연고를 언제부터 썼더라? 아마도…….’
육장봉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암위는 깜짝 놀랐지만, 공손하게 대답했다.
“장군님께 아룁니다. 이 약은 삼 년 전부터 사용했고, 장군부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약왕이 직접 만든 설옥고로, 외상을 치료하는 데는 이만한 연고가 없다고 합니다. 지난 삼 년 동안 장군님께서는 설옥고만 사용하셨습니다. 물론 장군님께만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훌륭한 설옥고가 없었더라면, 이번의 심각한 부상 때문에 때맞춰 변경으로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걸어 다니고, 부상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하게 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육장봉은 언뜻 무언가가 떠올랐다.
“삼 년 전이라고?”
‘월령안이 시집온 때가 아닌가?’
오늘 황궁에서 그 이야기들을 듣지 못했다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육장봉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지난 삼 년 동안, 월령안이 변경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사람을 시켜 알아보거라.”
“네, 장군님!”
암위는 명령을 받고, 그가 살짝 눈을 감는 것을 확인하고 물러가려 했다. 그때 육장봉이 눈을 번쩍 떴다.
“잠깐만!”
“장군님!”
암위가 발걸음을 멈칫하며 눈을 든 순간, 육장봉이 미처 감추지 못한 서슬 퍼런 눈빛과 마주했다. 단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도, 암위는 섬찟하여 서둘러 머리를 떨구고 더는 바라보지 못했다.
장군은 삼 년 전보다 기세가 한층 더 강해졌지만, 성격은 삼 년 전보다 더 침착해졌다. 사람들의 눈에 장군은 여전히 차갑기는 해도 예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삼 년 전처럼 냉기를 뿜으며 살기등등하게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의 곁에서 일해온 이들은 알고 있었다. 장군의 살기와 냉기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다만 더욱 깊이 감춘 탓에 남들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뿐이었다.
“사람을 시켜 지난 삼 년간 변경에서 일어난, 내가 모르는 모든 사실을 알아내도록 해라. 오늘부터 변경의 정탐꾼들을 다시 기용한다. 변경의 모든 동향을 속속들이 알아야겠다. 알겠느냐?”
육장봉은 눈 속의 서슬을 서서히 감추었다. 그리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명령했다.
여태껏 황제도, 조왕도 믿었기에 변경의 사람과 사건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변경에는 그가 마음을 쓸 일도, 관심을 기울일 만한 사람도 없었다. 매번 그가 밖에서 싸울 때면, 황제와 조왕이 변경의 상황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비록 몸은 변경에 없더라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람에 대해서는 손금 보듯이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변경을 떠난 지 삼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왠지 벽이 느껴졌다. 특히 황제, 조왕과의 사이에 놓인 벽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월령안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대승을 거두어서일까?’
무엇 때문이든 간에 변경에 자기만의 사람을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처럼 남에게 휘둘려 누명을 뒤집어쓰는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남의 미움을 사는 것은 별 상관이 없었다. 그렇지만 눈을 뻔히 뜨고,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속절없이 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육장봉의 명을 받든 암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변경은 황제와 조왕이 버티고 있어 줄곧 평화로웠다. 장군도 변경의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원래 신경 쓰지 않았다.
‘인제 와서 갑자기 알아보라는 걸 보니,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암위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공손하게 명을 받들었다.
* * *
황궁.
황제와 조계안은 육장봉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밤중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이렇게 늦었는데, 장봉이가 왜 소식을 전하지 않지? 혹 잊은 건 아니겠지?”
“잊기는 뭘요. 제가 보건대 장봉이는 아마 월령안에게 당했을 겁니다. 화도 나고, 황형을 뵐 면목이 없어 못 오는 것이겠지요.”
조계안은 풍류객처럼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이었다. 이를 눈치챈 조계안은 황제가 입을 열기 전에 한발 앞서 똑바로 앉았다.
“알겠습니다. 황형께서 굳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똑바로 앉았잖아요!”
“이, 이런……. 이제 나이가 몇인데, 좀 철이 들면 안 되겠느냐?”
훈계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려니, 황제는 가슴이 답답했다.
“황형, 좀 공정하게 대해 주십시오! 제가 철이 들지 않았다고요? 청주 범씨 가문 일은 제가 확실하게 처리했잖습니까?”
조계안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철들었다는 게 뭔데? 육장봉처럼 늘 차가운 얼굴을 하고, 무슨 일이든 마음에 감추고 있으면 그게 철든 건가? 그건 절대 불가능해!’
그는 조계안이다. 누구의 복제품도, 그림자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일 뿐이었다.
“네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짐도 그냥 넘어가려 했었다. 계안아, 이번 일은 도가 지나쳤구나. 짐이 보건대 장봉이가 이번에는 진짜 화가 난 것 같다.”
황제는 낮에 봤던 육장봉의 낯빛을 떠올리고는 저도 몰래 탄식했다.
“혹시 짐이 자기를 경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구나.”
하늘에 맹세코 결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경계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육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 성질 하고, 황실조차 안중에 없잖습니까. 그중에서도 육장봉이 안하무인의 일인자이고요.”
조계안이 불쾌한 기색으로 콧방귀를 뀌더니 이상야릇한 어조로 말했다.
“이십육 년 전 일을 잊지 마세요. 육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현음(弦音) 고모님이 어찌 북요에 화친을 맺으러 갔겠습니까?”
황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장봉이도 우리 조씨 가문 사람이다.”
“조씨 가문 사람이면 황형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황형이 자신을 경계한다고 여기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조계안이 되물었다.
황제는 말문이 막혔다. 조계안을 삿대질하며 손가락을 부들대기만 할 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씨름으로는 동생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조계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앞에 놓인 장과(껍질이 많고 과육 부분에 수분이 많은 과류의 총칭)를 아무렇게나 입에 던져 넣고 씹으며 위로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장봉이 어떤 사람인 줄 모르십니까? 황형께는 화를 내지 않을 겁니다. 우리 형제가 오랜 세월 쌓아온 정이,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무너지겠습니까?”
“이건 단순한 여자 문제가 아니다.”
황제가 씩씩거리며 조계안의 옆에 앉았다.
“장봉이를 신임하느냐, 마느냐에 관한 문제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