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망신살이 뻗쳤네
월령안 하나로 월씨 가문 후세 자손들의 자유를 바꾸는 거래.
이익인 것 같기도, 손해인 것 같기도 했다.
왜냐하면 월령안은 보통내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지난 십 년간 월령안과 함께했다. 월령안이 지금 가지고 있는 능력 중, 삼 할은 노인이 가르친 것이고, 나머지 칠 할은 타고난 것이었다.
일찍이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월씨 가문 사람들은 재신(財神)의 축복을 받아 장사하는 재능을 타고났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월령안은 재신이 품에 안고 키워, 철이 들기도 전부터 돈을 벌 줄 알았다고 했다. 이 말만으로도 월령안의 타고난 재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청주 범씨 가문의 뒤를 봐주는 이가 심상치 않으니라. 암황이 네게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는 것도, 네가 월씨 가문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지금 그 사업들은 원래 너희 가문의 것이고, 너희 가문에서 일군 것들이야.
그때 당시, 범씨 가문이 월씨 가문 수중에서 그 사업들을 가져갈 때도, 잠시 대신 관리하는 것이라 했었다. 나중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차지할 수 있다고도 했었지. 네가 능력으로 빼앗아 온다면 범씨 가문도 거절하지 못할 거다.
물론 범씨 가문의 배후에 있는 사람도 네가 다른 배경을 갖지 않은 월씨 가문의 사람일 경우에 한해서 동의했을 게다. 그러니 황제가 의심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희 둘은 절대 함께할 수 없겠구나.”
노인은 그제야 월령안이 왜 그렇게 서럽게 우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키워 낸 제자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았다. 이까짓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육장봉에게 버림받았다 한들 어떤가? 아직도 좋아한다면 다시 잘해 보면 그만이다. 또한 그녀는 재산, 외모, 재능을 모두 갖췄으니 조만간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만큼은 육장봉에게 구애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죠. 월씨 가문 사람만이 가주 자리를 다툴 자격이 있죠. 그런데 월씨 가문에는 저밖에 없잖아요.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월령안은 씁쓸함을 감추기 위해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선택할 수 없었다. 운명은 선택할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다.
* * *
육장봉이 승리하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황제는 궁 문 어귀까지 직접 마중을 나갔다. 논공행상할 때 황제는 육장봉을 진북왕(鎭北王)에 봉하려 했다. 그러나 육장봉은 거절했다. 아직 북요를 멸망시키지 못했고, 무장이 전장에 나가는 것은 신하로서의 본분을 지켰을 뿐이라는 이유였다.
황제는 그의 숭고한 덕행을 칭찬했다. 대신 육장봉의 아버지를 충용왕(忠勇王)으로 봉했다.
육장봉이 삼 년 전쟁 끝에 공을 세우고 돌아왔고, 육씨 가문에도 상이 내려졌다. 원래대로라면 육씨 저택은 문전성시를 이루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고요하기만 했다.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예물을 싸 들고 육씨 저택 문전까지 왔었다. 다만 그들은 입도 뻥긋 못 하고 고분고분 돌아가야만 했다. 아니,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육씨 가문의 막내 도련님, 육비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대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게다가 육장봉의 친위대 열두 명이 양옆으로 지키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이들은 감히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고 하나하나 조용히 되돌아갔다. 자기들이 육비우가 벌을 받는 모습을 봤다는 사실을 그가 알까 봐 두려웠던 탓이다.
육비우도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육씨 가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막내 도련님이 돌아오자마자 무릎을 꿇고 벌을 섰다는 사실은 내일이면 변경의 모든 이들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점심부터 줄곧 대문 앞에서 곧은 자세로 꿇고 있었다. 속에서는 울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네 시진이나 꿇었는데 왜 일어나란 말이 없지? 그리고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이야?’
“언제쯤 일어날 수 있겠나?”
힘든 데다가 목까지 말랐다. 하지만 곧게 편 허리에서 힘을 뺄 수는 없었다. 결국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지켜보는 친위대에게 물었다. 무릎이 깨지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이러다 죽겠네!’
“대장군님은 꿇고 있으라는 말씀만 하셨고, 일어나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육장봉의 친위대도 주인과 똑같았다. 무표정할 뿐만 아니라 말투도 차갑고 직설적이었다.
“이미 네 시진이나 꿇어앉지 않았나. 잘못을 인정한다고. 그래도 안 되겠나?”
육비우는 더는 살맛이 나지 않았다. 등이 무너지더니 힘이 빠져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퍽!
육비우의 엉덩이가 땅바닥에 닿는 순간, 쇠몽둥이가 그의 등을 후려갈겼다.
“으악!”
육비우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해 바로 허리를 곧게 세우며 무릎을 꿇었다.
한편 육씨 가문 저택 안. 육씨 가문의 부인 셋은 대청(大廳)에 앉아 육장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육장봉 대신, 육비우의 비명이 먼저 들려왔다.
이부인(二夫人)은 자비로운 모습이었다. 손에 염주를 들고 끊임없이 돌리며 염불을 외웠다. 육비우가 아우성치는 소리는 전혀 듣지 못한 체했다.
삼부인(三夫人)은 화려하고 날렵한 붉은 옷차림이었다. 그녀는 차를 마시면서 흥이 나 노래를 흥얼거렸다. 육비우의 비명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부인(四夫人)의 얼굴은 예쁘장했지만, 초췌해 보였다. 육비우의 울부짖음이 들려오자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나가서 육장봉의 친위대와 따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사실 나가 본들 친위대가 그녀의 체면을 봐줄 것도 아니고, 굴욕만 자초하는 꼴이었다.
사부인은 울분이 차올랐다. 손을 들어 탁자 위 찻잔을 땅바닥에 쓸어 던져버리고 매몰차게 욕을 했다.
“멍청한 것들! 차 하나도 제대로 못 올리느냐! 서호용정차(西湖龍井茶)를 마시겠다고 했는데 육안과편을 올리면 누구더러 마시라는 거야?”
“지금 차를 바꿔 드리겠습니다.”
문어귀에 서 있던 시녀가 조용히 다가와 무릎을 꿇고 깨진 찻잔을 거두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손을 뻗자마자 사부인이 발로 손을 꽉 내리 디뎠다.
“일개 종년 주제에 어디서 말대꾸야?”
시녀는 아팠지만, 여전히 차분하게 대답했다.
“넷째 마님, 아닙니다.”
“내가 했다고 하면 한 거야!”
사부인은 발끝을 움직여 시녀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짓이겼다. 시녀는 아파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으나,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장군부는 가법이 지엄했다. 하인들에게 대우가 좋은 대신 요구하는 수준도 높았다.
한편에서 보고만 있던 삼부인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비쳤다.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불쾌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동서, 자네도 지체 높은 사람인데 어찌 그리 하인을 괴롭히는가?”
“누가 하인을 괴롭혔답니까. 제 치마를 더럽혔잖아요?”
사부인이 치마를 흔들어 보이며 야멸차고 거만하게 대답했다. 아름다운 외모가 추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부인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염주를 돌리던 것을 그만두고 사부인을 힐끗 보았다.
“동서, 한마디만 하겠네. 여긴 장군부지 자네 집이 아닐세.”
“여기가 장군부면 어때서요? 전 대장군의 넷째 숙모잖아요. 왜요……. 형님네만 장군부 물건을 자기 것처럼 써도 되고, 저는 장군부 하인 하나 못 부린단 말씀이세요?”
사부인은 입으로는 불만을 표했지만, 발은 슬그머니 거두어들였다.
시녀의 손은 사부인의 발에 밟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눈물만 글썽였을 뿐, 신음 한 번 내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찻잔 조각을 주워들고 나갔다.
“동서, 사람 심보가 고약하면 못 쓰네.”
이부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계속 염주를 돌리는 모습은 마치 입정에 든 스님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부인이 왜 성내는지 알고 있었다.
‘결국 돈 때문이 아닌가.’
월령안이 떠나기 전에, 자기 집하고 셋째 집에는 두둑한 은자뿐만 아니라 가게까지 여러 개 주며, 두 아가씨의 혼수라고 전했다.
육씨 가문의 네 가족에는 아가씨가 셋이었다. 월령안은 넷째 집만 쏙 빼고, 다른 두 집에만 혼수를 챙겨 주었던 것이다.
사부인은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집에서 월령안에게 한바탕 욕을 퍼붓고도 모자라, 찾아가서 따지려던 중이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소식이 전해졌다. 육장봉의 친위대가 돌아오더니, 육비우더러 문밖에 꿇어앉아 잘못을 뉘우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사부인은 급히 마차를 돌려 장군부로 달려갔다. 웃어른의 신분으로 압박하여 어리석은 아들을 구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 육장봉은 자기 숙모라고 체면을 봐줄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네 멍청한 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는지 몰랐단 말인가!
‘사람들을 동원해 월령안을 집에서 쫓아내 놓고, 월령안의 돈과 가게를 욕심내다니. 도무지 염치란 걸 찾아볼 수가 없군.’
이부인은 사부인이 눈에 차지 않아 말도 섞으려 하지 않았다. 삼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사부인이 한참 성질을 부렸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녀는 큰 설움을 당했다는 듯이 눈물을 쏟으며 넋두리를 시작했다.
“저도 형님들이 절 업신여긴다는 걸 알고 있어요. 두 분은 대갓집 규수에, 장군 집안의 따님이잖아요. 저만 촌사람이니 형님들과 동서지간인 것만 해도 감지덕지죠.
비우와 비림(飛琳)이는 제가 낳은 아이들이라 항상 남에게 꿀리잖아요. 좋은 일에는 찾지 않고, 나쁜 일에는 빼놓지 않죠.
아이고, 내 새끼. 이게 전부 못나고 쓸모없는 어미 탓이구나. 서방님, 아이고, 서방님……. 어찌하여 먼저 가셨나요. 무정하게 가 버렸냐 말이에요. 우리 셋만 남겨두니 온갖 서러운 꼴을 다 당하잖아요. 아이고야, 서방님…….”
“썩 그치지 못할까! 곡소리 낼 거면 집에 가서나 하게!”
삼부인은 무관 가문 출신이라 질질 짜는 여인을 봐주지 못했다. 특히 지금의 사부인처럼, 죽은 남편을 거들먹거리며 우는 것은 그녀의 금기를 건드리는 꼴이었다.
‘육씨 가문의 네 가족 중 과부가 셋인데! 우리도 남편과 아들을 앞세웠지만, 언제 한번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있던가?’
삼부인은 성격이 화끈했다. 즉시 허리춤에서 채찍을 풀어 탁자를 강하게 후려쳤다.
철썩!
그 소리에 사부인은 기겁해 흠칫했다. 깜짝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떨어져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 앞뜰에 있던 집사가 들어왔다. 대청의 광경을 보더니 얼른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말했다.
“마님들, 대장군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장봉이가 돌아왔다고! 형님, 얼른 나가봐요.”
삼부인은 채찍을 던져버렸다. 사부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부인만 부축하여 나갔다.
‘육장봉. 육씨 가문의 영광, 육씨 가문의 대들보가 돌아왔구나!’
육씨 가문 사람들은 또다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문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만천하에 알릴 수 있었다. 우리 육씨 가문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