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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2)화 (12/1,004)

12화 특별한 사람과 이뤄질 수는 없구나

“이놈이……!”

노인은 엄습하는 불안감에 바퀴 의자를 움직여 서재로 갔다.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월령안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얘야, 어떻게 된 거냐?”

노인이 당황하여 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노인을 보고는 대답했다.

“육장봉이 철광산에 관해서 물었어요.”

“알려 주진 않았겠지?”

노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는 목숨이 걸린 일이야. 절대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육장봉도 안 돼. 군장 차림으로 찾아와 묻는 걸 봐선 분명 황제의 뜻일 거야. 그놈이 알면 황제도 알게 될 게다. 설령 황제가 철광산 일을 알게 된다고 해도 인정해선 안 된다. 절대로 우리 손으로 갖다 바쳐서는 안 돼. 알겠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말하지 않았어요.”

월령안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의 중요성을 아는 만큼, 몇만이나 되는 인명을 놓고 장난칠 수는 없었다.

“말하지 않았으면 됐다. 그럼 된 거야. 두려워하지 마라. 육장봉이 전쟁을 끝냈으니, 우리도 이제 더는 철광산이 필요치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묻어 버리마.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거다.”

월령안이 놀란 듯하자 노인이 위로해 주었다.

“육장봉이 말했어요. 제가 전선에 보낸 병기들을 찾아내, 어디에서 만들어냈는지를 알아보겠다고요. 그다음에는 단서를 따라가기만 하면 다 조사해 낼 수 있대요.”

이 이야기를 할 때, 월령안은 끝내 울먹이고 말았다.

“영감님, 말씀 좀 해 보세요. 사람이 어쩜 이렇게 지독할 수 있나요? 아까까지만 해도 삼 년 동안 신세 진 것을 보상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이렇게 매정하게 구네요. 자기를 위해 한 일인 줄 뻔히 알면서 말이에요!”

육장봉만 아니었다면, 목숨을 걸고 사사로이 철광산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암황이 지켜보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사업의 재능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황제에게 의심을 사고, 공로를 부정당할 위험을 무릅쓰면서 죽기 살기로 돈을 벌 필요도 없었다.

그를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보상도, 연모도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 한 일을 가지고, 도리어 협박을 하다니?

“어휴!”

노인은 깊이 탄식했다.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다시금 물었다.

“얘야, 후회하느냐?”

그녀는 머리를 젓고 자조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죠? 저를 이렇게 대해도 전혀 후회되지 않아요. 영감님, 전 뼛속까지 병들었나 봐요. 약도 없죠, 그렇죠?”

월령안은 떨고 있는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웃음 끝에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후회가 되지 않다니.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노인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는 원래 사랑에 눈먼 이가 있으니, 이 슬픔은 청풍명월 탓이 아니라네’

(人間自有痴情者, 此恨無關風與月)

월령안은 잘못이 없었다. 다만 사랑에 너무 깊이 빠졌고, 그녀의 사랑에 답해줄 수 없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을 뿐이다.

흔히 말하는 바보 같은 사랑이었다.

“얘야, 만약 그때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시신을 가져다준 사람이, 육장봉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해도 좋아했을 거냐?”

노인은 십 년 전부터 월령안의 곁을 지켰다. 자신이 그녀를 키웠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그녀가 왜 육장봉을 마음에 새기고, 조용히 지켜보며 연모했는지는 아주 잘 알았다. 그러나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당시 월령안의 아버지와 육장봉의 접촉을 막았어야 했다.

만약 그때 자신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월령안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설령 죽었다 하더라도, 육장봉이 그들 부자의 시신을 청주까지 호송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두 사람의 악연도 애초에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의 은혜를 두고두고 잊지 않았을 거예요.”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시체를 가져다준 사람이라면 누구든 모두 월령안의 은인이었다. 그러나 은인은 어디까지나 은인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 거지?”

노인이 가볍게 한숨지었다. 월령안의 뜻을 알 만했다.

“물론이죠!”

월령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곧바로 나지막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육장봉은 특별해요.”

누구든 그녀의 마음속에서 육장봉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육장봉을 좋아한 건, 그가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시신을 먼 북요에서 가져다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육장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 앞을 막아 나서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그녀의 심장은 진작에 뛰는 것을 멈췄을 것이다.

‘육장봉은 특별해요.’

이 한마디로 노인은 알 수 있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내려놓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려놓을 생각도 없었다.

노인이 한숨을 쉬며 한마디 했다.

“그렇다면 다시 잘해 보면 될 게 아니냐? 육장봉한테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육장봉은 줄곧 안하무인으로 기고만장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 재원(才媛)이며 명기가 연모의 마음을 드러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한번은 궁중 연회에서 한 당돌한 무희가 춤을 추다가 기회를 엿보아 육장봉에게 안기려 했다. 넘어지는 체하며 안기려는 순간, 육장봉이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무희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심지어 무희에게 굶주려서 다리에 힘이 풀렸냐며 조롱까지 했다.

“소용없어요!”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오른 월령안이 머리를 저었다.

“저와 육장봉은,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육장봉이 저를 좋아하는지 아닌지와도 상관없어요. 황궁에 계신 그분이 제가 육장봉에게 시집가는 걸 허락하지 않아요. 아니, 제가 누구에게 시집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에게는 육장봉을 쟁취할 기회조차 없었다.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찌 된 일이냐? 너와 육장봉의 일에 어찌 황제까지 얽힌다는 게야? 애초에 네가 육장봉에게 시집갈 때 막지도 않았었잖아. 아니면, 그분이 너희 둘을 의심한다는 거냐?”

노인은 다급한 나머지 성한 손으로 바퀴 의자의 팔걸이를 꽉 붙잡았다.

제왕의 의심은 죽음을 부른다.

이에 대해 노인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맞을 거예요.”

월령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장봉이 승리하고 돌아왔잖아요. 명성도 드날리고, 군대에서의 지위도 누구 하나 따라잡을 사람이 없어요. 게다가 저는 돈을 잘 벌어 몇십만 대군도 먹여 살릴 수 있어요. 황제가 마음을 놓을 수 있겠나요? 황제가 지금 손을 써서, 저와 육장봉을 갈라놓아 척지게 만드는 정도로 끝낸 건 어찌 보면 자비를 베푼 거예요.”

“네가 몇 년간 돈을 많이 벌긴 했다만, 그것도 전부 황제의 뜻에 따른 게 아니더냐? 그래도 용납할 수 없다더냐?”

월령안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한들 한낱 여인일 뿐이었다. 황제가 정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그녀를 집이라는 울타리에 가두면 될 것이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들볶을 필요가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에요.”

월령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하여 말했다.

“청주 범씨 가문 일도 있죠. 그들이 도를 넘었어요. 황궁의 그분께서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그들을 처리할 생각이세요. 두 가지 일이 겹치니 이렇게 된 거죠.”

노인은 멍해졌다.

“청주 범씨? 그때 너희 가문을 대신해 은상(隱商)이 된 범씨 가문 말이냐? 그놈들 문제도 있어?”

은상이란 그들끼리 암암리에 부르는 호칭이다.

은상은 어둠 속에 숨은 황실의 상인이었다. 황제를 위해 장사를 하고 돈을 벌었다.

지금의 청주 범씨 가문이든, 예전의 청주 월씨 가문이든 모두 황실의 하인일 뿐이었다. 그들은 황실만을 위해 일했다. 사업의 실제 주인은 황실이지, 그들 자신이 아니었다.

다만 황실은 구체적인 사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해마다 바치는 수익만 관리했다. 매해 충분한 수익을 바치면, 다른 일은 모두 자주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권한이 막강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월씨 가문 사람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정해져 있었다. 월씨 가문은 백 년을 이어 내려오는 동안 황실을 위해 장사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십 년 전, 월령안을 제외한 청주 월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조리 죽었다.

규칙에 따르면, 월씨 가문에 남은 사람은 사업을 이어받아 황실을 위해 계속 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십 년 전의 월령안은 고작 여덟 살이었다.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가 어떻게 월씨 가문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장악할 수 있겠는가?

결국 월령안은 버림받았다.

규칙에 따르면, 월씨 가문에서 버림받은 자, 실패자는 모두 황실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비밀리에 끌려갔다. 그들의 생사에 대해서도 아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남겨졌다.

어머니는 그녀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월령안을 데리고 소 승상에게 재가했다. 그리하여 딸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를 쟁취해 주었다. 또한 삼 년 전에도 심혈을 기울여 육씨 가문과의 혼사를 성사시켰다. 육씨 가문이라는 보호막을 빌려, 딸에게 평생의 자유를 주려 했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고작 십 년뿐이었다.

십 년 뒤, 황실에서는 월령안을 필요로 했다. 그녀는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만 했다. 이게 바로 월씨 가문의 숙명이었다.

예전의 월령안은 자신이 숙명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녀는 체념한 듯 눈을 감더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삼 년 전에 암황이 찾아왔었어요. 육장봉과의 혼사를 거절하고 자신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했어요. 청주로 가서 범씨 가문 수중에서 원래 저희 것이었던 재산, 지위, 권세를 모조리 빼앗아 오라고 했죠. 전 거절했어요.”

남들 눈에 청주 갑부라는 칭호는 황제의 심복을 뜻했다. 가문을 빛내는 자랑스러운 칭호였으며,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쟁취하려는 칭호였다. 그러나 월씨 가문에서 태어난 월령안은 누구보다 그 본질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월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의 것이 아닌 재산, 모래성 같은 지위, 거짓 권세를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했던가.

월씨 가문의 번성 아래에는 월씨 가문 자제들의 해골이 쌓여 있고, 월씨 가문의 부귀영화 아래에는 월씨 가문 자제들의 통곡뿐이었다!

죽으면 필요도 없는 재산, 언제든 빼앗길지도 모르는 지위, 지키지도 못할 권세를 위해 그들은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 월씨 가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숙명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려고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죽을 때까지 그 소원을 이룬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늘 암황이 또 찾아왔어요. 청주 범씨 가문 가주 쟁탈전이 십 년 앞당겨졌다고 하더군요. 저에게 자리 하나를 마련했다고 해요.

올해 청주로 가서, 십 년 동안 범씨 가문 사람들과 가주 자리를 두고 싸울 거예요. 만약 제가 가주 자리를 차지하면, 황실에서 구금한 월씨 가문 식구들을 풀어주고, 월씨 가문에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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