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11)화 (11/1,004)

11화 저는 아버지와 다릅니다

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 월령안은 육장봉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청록색 긴 치마로 바꾸어 입었다. 말끔한 얼굴에는 맑은 두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까의 부은 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침착하고 담담한 모습에서는 한바탕 울었던 기색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육 대장군.”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그 순간 눈을 질끈 감으며 쓰라린 마음을 달랬다.

“앉으시오.”

육장봉은 서재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을 들고 앉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월령안은 입이 딱 벌어졌다. 여긴 그녀의 집이고, 육장봉이 앉은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말하려다 생각을 바꿔 포기했다.

‘그렇게 말해서 자리를 내주게 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 시간에 육 대장군께서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월령안은 그의 앞에 앉아 먼저 입을 열었다. 육장봉은 차갑게 대답했다.

“삼 년간의 일들을 알게 되었소. 당신에게는 신세를 졌으니, 앞으로 청이 있거든 국가의 이익에 반하지만 않는다면 다 들어 주겠소.”

“신세요?”

월령안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내 노력이 신세라는 말 한마디로 정리가 된다는 건가?’

그녀는 마음이 아팠지만, 싫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애써 웃으며 말했다.

“겨우 삼 년으로 육 대장군의 인심을 샀으니 제가 이득을 본 거지요.”

“당신이 서러움을 겪게 하지는 않겠소.”

육장봉은 고작 여인 하나가 서러움을 겪게 할 정도로 무능하지 않았다. 월령안이 삼 년 동안 해 온 만큼, 그가 앞으로 그녀를 지켜줄 것이다. 결국, 그녀는 보답을 받을 것이다.

월령안은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서러움을 겪지 않게 하겠다고? 지금 가슴이 뻥 뚫린 게 제일 서러운데, 이건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

월령안은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절반은 어둠 속에, 절반은 불빛 아래에 드러난 얼굴을 보면서 기분이 씁쓸해졌다. 그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월령안은 끝내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육 대장군, 이혼장에 관해서 알 수 있을…….”

“그게 중요한가?”

이미 끝난 일이라는 것을 월령안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이 모든 것은 황제가 바라는 것이었다. 그 이혼장이 누가 쓴 것인지, 그와 그녀의 마음 따위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네요. 별로 중요하지 않네요.”

월령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곧바로 정신을 다잡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육 대장군께서 오늘 행차하신 것이 단지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어떤 일로 찾으셨는지요?”

그녀의 감정은 이제 육장봉에게 좌우되지 않았다.

“당신에게 철광산이 있소?”

육장봉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누구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셨나요? 철광산을 발견하고도 조정에 알리지 않는 것은 죽을죄인데 제가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르겠어요?”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녀는 육장봉의 방문이 단지 보상 따위의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기야 지금 그녀의 수중에 남은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비밀에 싸인 철광산이었다.

“월령안, 오늘 나는 당신의 죄를 묻기 위해서 찾아온 게 아니오. 그러나 철광산은 당신이 소유할 만한 것이 아니오. 삼 년간 변방에 전쟁이 끊이질 않았으니 황제 폐하께서 모른 척 눈감아 준 것이지. 이제는 폐하께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요.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내놓는 게 당신에게 더 유리할 거요.”

육장봉은 월령안이 쉽게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철광산을 내놓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이러한 일로 월령안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저한테 없어요.”

월령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육장봉을 연모하긴 했어도, 이런 목숨이 달린 일까지 그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월령안은 이름만 아는 낯선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집안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결정적인 증거를 그에게 넘긴단 말인가?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월령안, 상인으로서 이득을 취하려는 건 잘못된 게 아니오. 하지만 벌어서는 안 되는 돈도 있지.”

육장봉은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저한테 철광산 따위는 없다고요. 육 대장군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나가서 찾아보시지요. 증거도 없이 저한테 덮어씌우지는 마세요.”

월령안은 이를 악물고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육 대장군, 제가 대체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이렇게까지 저를 미워하시는 건가요? 제가 죽기라도 바라시는 건가요?”

‘돈밖에 모르는 상인이라고. 육장봉의 마음속에 나는 겨우 이 정도였구나.’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월령안, 나는 당신을 도우러 왔소.”

월령안은 비웃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오른쪽 팔로 왼손을 눌러 읍을 하면서 육장봉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육 대장군께서 저를 도와주시겠다 하셨으니 부탁드립니다. 진상을 밝혀내 저의 결백을 증명해 주세요.”

“월령안, 어리석게 굴지 마시오!”

육장봉은 울화를 누르며 말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줄곧 군 생활을 해왔다. 덕분에 그의 주변 사람들은 딱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그냥 말을 잘 듣는 부류와 그에게 맞아서 말을 잘 듣는 부류.

군에서는 주먹이 강한 게 법이었다. 그렇다 보니 일일이 이치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주먹이 가장 강했으니 그가 바로 법이었기 때문이다.

육장봉은 이십여 년을 살면서 이토록 힘들게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

“육 장군께서는 증거가 있으신가요?”

월령안은 벌떡 일어나 육장봉과 대치했다.

“당신……. 정말 큰코다치지 않으면 정신을 못 차릴 모양이군. 당신의 잔머리로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오? 월령안, 사람이 한 일엔 흔적이 남기 마련이오. 내가 찾아서 증거라도 나온다면 당신, 그리고 당신 집안사람 전부가 죽어야 할 거야.”

의자 손잡이에 올려진 육장봉의 손은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여태껏 월령안처럼 고집이 센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증거를 가져오신 다음에 말씀하시죠.”

월령안은 오른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월령안, 내가 정말 증거를 내놓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나?”

육장봉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전선에 조달한 병기들은 공부(工部)에서 제조한 병기들과 달라. 내가 그 병기들을 가져와 제조 수법을 알아내라 하고, 그대로 단서를 따라가다 보면 당신에게 병기를 만들어 바친 사람을 찾아내겠지. 그 사람들을 찾아내면…… 더 숨길 수 있을까?”

월령안은 당황해서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육장봉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 찾아내려고만 하면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죽어도 인정할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인정해 버리면 칼자루를 건네주고 처분을 기다리는 셈이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처리하든 반항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월령안은 강경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육 대장군께서 조사를 해 보시지요!”

“내가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요. 내놓을 거요, 말 거요?”

육장봉은 월령안의 고집에 질려 차갑게 말했다.

“없는데 무엇을 내놓으란 말씀이시죠?”

월령안은 이를 악물고 죽어라 잡아뗐다.

그녀는 육장봉을 믿을 수도, 이렇게 큰 죄를 인정할 수도 없었다.

또한 육장봉은 아까 어떤 방식으로 증거를 찾을지 알려 주었다. 그녀가 그보다 한발 앞서 모든 증거를 지울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는 증거를 내놓지도, 그녀를 어떻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도 그의 손에 잡힐 약점 따위는 없게 된다.

“월령안, 후회하지 마시오!”

육장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월령안을 싸늘하게 바라봤다. 그녀도 지지 않고 그와 마주했다.

“저 월령안은 제 선택에 대해 영원히 후회하지 않습니다. 삼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거고요.”

“당신이 쭉 이렇게 강경하길 바라오.”

육장봉은 차갑게 비웃고 성큼성큼 떠나갔다.

월령안은 습관적으로 몸을 돌려 그의 그림자를 좇으려고 했다. 하지만 몸을 돌리려는 순간, 꿋꿋하게 본능을 잠재웠다. 두 주먹을 굳게 쥐고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더는 그의 뒷모습을 좇지도,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육장봉은 노기를 띤 채 자리를 떴다. 작은 뜰을 나서자마자 길 한가운데 앉아 있는 노인이 눈에 띄었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르신, 길을 막으셨습니다.”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노인은 육장봉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노인은 저도 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 령안이와 잘 얘기해 보았나?”

노인은 육장봉이 월령안에게 마음을 조금이나마 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를 아예 단념시키기를 바라기도 했다. 지난 몇 해 동안 월령안이 육장봉 때문에 했던 어리석은 일들을 생각하면, 노인은 가슴이 아팠다.

“어르신께서 잘 설득해 보십시오. 아니면 죽더라도 헛된 죽음일 겁니다.”

육장봉이 냉랭하게 말했다.

노인은 화가 치밀었다.

“이놈, 꼭 현(弦)……!”

노인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간신히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흥, 육속(陸續)의 자식이 아니랄까 봐 성질머리가 똑같구나.”

육장봉의 눈빛이 바로 변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저는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육속은 육장봉의 부친으로 육장봉이 열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당연히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반면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억이 없었다.

육장봉은 그의 아버지가 변방에서 데려왔다.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소문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민간에 흘러 들어간 황실의 공주로, 현 황제의 이종사촌 관계라고 했다. 그러나 뜬소문일 뿐이었다.

“자식이 아비를 닮지 않은 게 자랑이냐?”

노인이 불쾌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저의 아버지를 잘 알고 계십니까?”

육장봉은 촛불 빛을 빌려 노인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보면 볼수록 낯익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성함을 바로 부르는 것을 보아, 아버지를 익히 아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이 노인은 아무래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군.’

육장봉은 마음속 의문을 숨기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리가 전에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럼. 조금 전에 봤잖나.”

그의 의심하는 눈초리 앞에서도 노인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범하게 그의 눈길을 마주했다.

“어르신께서는 평범한 분이 아닌 듯합니다만?”

육장봉은 노인의 잃은 팔부터 불편한 두 다리까지 한 번 쓱 훑고는 대화를 이어 갔다.

“어르신께서 월령안의 곁에 있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늙다리가 내 제자 옆에 머물러 있겠다는데, 그게 자네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육 대장군, 참 한가하시군? 오지랖이 넓기도 하지.”

노인은 그제야 월령안이 왜 그렇게 답답해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육장봉은 하는 말마다 사람의 화를 돋울 뿐만 아니라, 전혀 에둘러 말할 줄을 몰랐다.

“월령안은 다릅니다. 주변 사람도 모두 확실하게 조사할 겁니다.”

그는 삽시간에 차가운 태도로 변했다.

월령안은 철광산을 장악하고 있다. 또 이런 신비한 인물까지 곁에 두고 있었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한테 버림받은 여자일 뿐이네. 뭐가 다른가? 그런 게 자네 취미라면 마누라 몇을 더 맞아들였다가, 심심하면 하나씩 버리면서 놀든가 하게나.”

노인은 화가 나서 비꼬았다. 육장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월령안이 무엇을 했는지는 어르신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설득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면 모두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