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9)화 (9/1,004)

9화 날 우습게 보지 마

월령안은 눈앞의 살이 뒤룩뒤룩 찐 거만하기 짝이 없는 남자를 보고 웃었다.

“추수야, 이 사람을 묶어서 추밀원에 보내거라. 거기 사람들한테 월령안이 보낸 사람이라고, 소 승상의 제자인데 나한테 사기를 치려 했다고 해라.”

“하! 추밀원? 월령안, 허풍을 치려거든 그럴듯하게 해야지. 추밀원이 뭘 하는 곳인지 알기나 아나? 추밀원은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야. 추밀원의 권한이 강하긴 해도 조정 각 부문에나 그렇지, 백성의 고발은 애초에 받지를 않는데! 어디 한번 보자고. 날 추밀원에 보내면, 나중엔 누가 벌을 받게 될까?”

살이 뒤룩뒤룩 찐 중년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지독한 악취가 났다.

“월령안, 이 어르신이 마지막 기회를 주마. 눈치껏 네 명의의 재산들을 순순히 내놓으라고. 그러면 변경에서의 안전은 보장해 주마. 아니면…….”

월령안은 이러한 취급을 당하고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빨리 저놈 입을 막거라. 냄새가 너무 지독하구나!”

“네, 아가씨!”

추수는 앞으로 나가 긴 다리로 뚱보를 넘어뜨렸다.

퍽!

뚱보는 세차게 넘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나자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이고……! 월령안, 이 빌어먹을 계집! 네년이 감히……!”

“당신, 진짜로 입 냄새가 너무 지독하잖아!”

추수는 남자의 허리띠를 풀어 두어 번 만에 남자를 꽁꽁 묶었다. 또 옷자락을 찢어내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뚱보가 데려온 부하들이 문밖에서 소리를 듣고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문턱을 넘기도 전에 상천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상천은 추수처럼 잘 싸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사내였고 싸우는 법도 몇 수는 배운 적 있었다. 부하 둘을 쓰러트리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천은 자신의 일 처리가 소홀해서 심(沈)씨 가문이 끼어들어 행패를 부릴 여지를 주었다는 것을 깨닫자, 적극적으로 말했다.

“아가씨, 이놈들은 제가 추밀원으로 끌고 가겠습니다.”

“일을 더 크게 벌여야 한다. 내 재산에 눈독 들이는 놈들에게 이 월령안을 건드리면 어떤 꼴이 될지를 똑똑히 보여주거라.”

‘소씨 가문, 육씨 가문이 없어졌다고, 나를 아무나 밟아도 되는 지렁이처럼 취급하는 건가?’

“아가씨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상천은 뚱보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 문턱을 넘고 계단을 따라 질질 끌고 갔다.

“읍읍읍……!”

뚱보는 아파서 눈물 콧물을 흘렸지만, 입이 틀어 막힌 탓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소식이 빠른 사람들은 월령안이 여기서 사람을 만나고 있음을 알아냈다. 무슨 일인지 짐작을 한 듯 퍽 많은 사람이 하인을 보내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기회를 엿봐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심산이었다.

이 하인들은 손님 행세를 하며 한껏 꾸미고 혜풍루의 대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월령안의 옆에 있던 상천이 뚱보 하나를 끌고 나오자, 모두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사람은……. 심씨 가문 사람인 것 같은데?”

눈이 예리한 누군가가 뚱보의 신분을 눈치채자 다들 더욱 놀랐다.

심씨 가문은 최근 두 해 동안 소씨 가문에 의지해 변경에서도 내로라하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월령안의 부하는 그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사람을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

숨어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기겁했다. 상천이 뚱보를 끌고 나가자 바로 따라나섰다.

“가자고. 어떻게 된 건지 봐야지.”

이들 중 구 할은 월령안의 손에서 떡고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따라서 나갔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월령안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소 승상에 빌붙은 심씨 가문 사람에게 싸움을 거는 걸까?’

사람 한 무리가 상천의 뒤를 슬그머니 따라갔다. 그들은 뚱보가 소달구지에 던져져 추밀원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천은 진작에 이들을 알아챘지만, 전혀 피하지 않았다. 아가씨가 보는 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저, 저 월령안이 육 장군님에게 버림을 받고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사람을 추밀원에 보내다니. 추밀원은 군사를 관리하는 곳이지 이런 일을 처리하는 데가 아닌데. 월령안이 이번엔 큰코다치겠구먼.”

상천의 뒤를 따르던 한 하인은 그의 행동을 보자 비꼬기 시작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상천이 뚱보를 끌고 가자 추밀원 사람들은 바로 그들을 내쫓으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왔느냐? 물러나라, 썩 물러나지 못할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사기죄면 관아를 찾아가야지! 여긴 고발하러 오는 데가 아니야. 가지 않는다면 엄벌로 다스리겠다! 형부(刑部)에서 사람을 부르겠다.”

“그럼 그렇지. 월령안이 다급해서 아무 데나 찾아간 거구먼.”

마음이 급한 몇몇은 잠시도 기다리지 못했다. 당장 몸을 돌려 자기 주인에게 월령안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뒤돌아보았을 때였다. 월령안의 하인이 추밀원 사람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상대방의 태도가 바로 바뀌었다. 추밀원 사람들은 그들을 몰아내기는커녕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남아 있던 하인들은 추밀원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다음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잠시 후, 처음에 상천을 쫓아내던 사람이 관복을 입은 중년 남자 하나와 함께 돌아왔다.

중년 남자는 상천을 보고 예를 갖추었다. 멀리 떨어져 하인들은 그들이 어떤 얘기를 나누는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표정과 행동거지를 미루어 보아, 두 사람의 관계가 퍽 가까워 보였다. 심지어 관복을 입은 중년 남자는 상천을 많이 어려워하는 듯했다.

‘추밀원의 대인들을 저렇게 쉽게 대한다고?’

두 사람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추밀원 대인이 손을 들어 관졸을 불러내어 뚱보를 끌고 가게 했다. 그 검고 엄숙한 얼굴을 한 대인은 척 보기에도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몸을 돌리자 또다시 정중하게 상천을 대했다. 심지어 상천을 두어 걸음 바래다주기까지 했다. 참으로 친근한 모습이었다.

“월령안이 참 대단하군. 옆에 둔 하인도 이렇게 추밀원의 환영을 받다니.”

남아 있던 하인들은 멀뚱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상천이 멀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들은 당장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얼른 돌아가 주인님께 알려야 했다.

‘절대로, 절대로 월령안을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월령안의 능력은 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육씨 가문이라는 방패막이 사라지자마자 추밀원이라는 줄을 거뜬히 잡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날, 여러 집안에서 받은 월령안의 소식은 제각기 아주 달랐다. 저마다 각자 다른 소식을 받았으니 당연히 내린 결론도 각자 달랐다. 물론 그로 인해 빚어진 결과도 완전히 달랐다.

* * *

월령안이 온종일 밖에서 뛰어다니다 집에 들어왔을 때는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월령안은 지친 몸을 마차에 기대고 눈을 꼭 감았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두 손이 추수에게 소리 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아가씨는 잠드신 게 아니야. 아가씨는 많이 상심하셨어…….’

추수는 옆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육 장군을 향한 원망이 피어났다.

‘육 장군님도 참, 아무리 이혼하려고 했어도 그렇지 하루만 늦게 하면 어디가 덧나나? 승리를 거두고 입성하기도 전에 이혼장이 먼저 도착하다니. 그렇게까지 아가씨를 서둘러 내쳐야만 했을까? 아가씨께서 장군님이 돌아오시기를 삼 년이나 기다린 걸 알기나 할까?’

추수는 아가씨가 너무 안타까웠다.

투둑, 투둑…….

추수의 눈에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떨어졌다. 나무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맑은 소리를 냈다.

추수는 자신이 추태를 보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바보야, 울긴 왜 우니? 너희 아가씨는 멀쩡하잖니?”

월령안은 마차 벽에 기대어 있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눈빛은 담담했다.

오늘은 너무 바쁜 하루를 보냈다. 하도 바쁜 나머지 슬퍼할 시간도, 아파할 시간도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슬퍼할 여유가 생겼다.

“아가씨, 저, 저는 아가씨가 딱해요. 너무 속상해요. 육 장군님도 너무하세요. 전 다시는 그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고 해도 다시는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월령안이 말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크게 펑펑 우는 추수였다.

“육 장군님도 너무 못됐어요. 아가씨께서 육 장군님한테 못 해 준 게 뭐가 있어요? 이혼하려거든 돌아와서 하면 안 된대요? 소문나지 않게 조용히 이혼장을 보냈으면, 우리가 뭐 육씨 저택에 빌붙어서 안 나가기라도 한대요? 이렇게 일을 크게 벌여 우리가 쫓겨났다는 걸 변경 사람들이 다 알게 해야만 했느냐고요.”

육비우와 그의 부하의 손길에 의해 육씨 가문에서 내쫓긴 생각만 해도 추수는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육씨 가문 사람들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 일은……. 아마 육장봉이 시킨 것은 아닐 거야. 정말 그 사람이 했다 하더라도 날 모욕하기 위한 건 아닐 거야.”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몸을 앞으로 내밀어 추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화내지 마라. 아무 일도 없지 않았니.”

“아가씨, 아직도 그 인간 편을 들다니요!”

추수는 심통이 나서 두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 사람 편을 드는 게 아니야.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이란다. 추수야, 이 사건은 우리 생각만큼 간단한 게 아닐 거야. 나와 육장봉은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는 함께 있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거든.”

오늘의 이러한 결과는 그녀가 뿌린 대로 거둔 것이었다. 남을 탓할 처지가 못 되었다.

새를 잡으면 활을 거두고,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잡아먹는 법.

삼 년간, 그녀는 너무 많은 것들을 해냈고, 또 너무 잘 해냈다.

사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황궁의 그분께서는 육장봉을 계속 중용할 생각이니, 그녀를 육장봉 옆에 절대 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기에 일부러 성문 앞으로 갔다. 사람들 앞에서 육장봉이 자신을 내쫓은 일을 말했다.

황궁의 그분은 월령안도, 육장봉도 믿지 못했다. 그들의 사이가 틀어지길 바랐다. 그분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분께 일부러 그녀의 증오를 보여드렸다. 이제 그분이 마음 편히 육장봉을 쓰실 수 있게.

월령안은 눈을 감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일은 아마 누군가가 일부러 육비우에게 시켰을 거야. 육장봉이 입성하기 전에 보란 듯이 나를 내쫓아서 기정사실로 못 박아 두려는 거지. 이렇게 하면 육장봉이 뒤늦게 후회하더라도 소용이 없거든.

게다가 그분은 내 성격을 잘 알고 있어. 나는 절대 쉽게 물러서지 않고, 손해 보는 일을 하는 법이 없잖니. 내가 육장봉과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소란을 피울 것도 예상했을 거야.”

사실은 그분이 그녀의 성격을 잘 아는 게 아니었다. 다만, 큰 소동을 피우지 않고는 못 배기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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