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조계안이 말하지 않더라도 좋은 수가 무엇인지는 육장봉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막지는 않았다.
그는 조계안이 말하는 ‘월령안’을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장봉이더러 월령안에게 가서 알아내라고 하면 되겠지요. 월령안이 장봉이를 그렇게 신경 쓰는데, 장봉이의 말 한마디면 필시 철광산을 내줄 겁니다. 그리고 장봉이는 우리와 다르죠. 월령안이 우리는 못 믿어도 장봉이는 믿을 테니 경계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철광산이 월령안의 수중에 있는 것은 그녀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육장봉이 치르던 전쟁은 끝났다. 더는 월령안이 병기를 제조해 보낼 필요가 없었다. 똑똑한 그녀는 지금 철광산을 내놓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월령안이 벌써 손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황제도 이 방법이 좋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건넸다.
“장봉아, 네 생각은 어떠냐?”
“신, 명을 받잡겠습니다.”
육장봉은 거절하지 않고 일어나더니 포권을 했다.
“신이 지금 당장 월령안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아니…….”
황제는 급하지 않다고 말하려다, 육장봉의 무뚝뚝한 표정을 보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래, 가 보거라.”
“신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육장봉은 두 손을 풀고 똑바로 서더니 몸을 돌려 조계안을 향해 걸어갔다.
“낮에 다루에서 훔쳐보던 자가 너였나?”
조계안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닌…….”
퍽!
육장봉이 갑자기 조계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역시 너였군.”
조계안은 전혀 막지 못하고 바닥에 뒹굴었다.
“육장봉, 미쳤어?”
그는 피 섞인 침을 뱉어내고 일어나 육장봉에게 맞아 찌그러진 가면을 벗었다. 햇빛을 보지 못해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에는 칼에 베인 흉터가 있었다. 오른쪽 눈에서부터 왼쪽 턱까지 지네처럼 이어진 흉터는 우아하고 준수한 오관을 흉측해 보이게 했다.
“날 이용했으니 그 대가를 치러라.”
육장봉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진짜로 때리면 어떡하냐!”
조계안은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육장봉이 계속해서 덤벼들자 그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달려들어 육장봉과 주먹다짐을 시작했다.
황제는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일으키며 호통을 쳤다.
“그만두지 못해! 이게 뭣들 하는 것이냐? 짐이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짐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하지만 황제가 뭐라 하든 육장봉과 조계안은 전혀 그칠 기미가 없었다.
둘은 서로에게 아낌없이 주먹을 선사했다.
* * *
월령안은 다루에서 나와 마차에 올랐다. 하지만 새 거처를 정리할 틈도, 슬퍼하거나 분노할 틈도 없이 바삐 상천을 만나러 갔다.
그녀는 상천과 함께 사전에 약속을 잡은 구매자를 만나 수중의 재산을 처분할 예정이었다.
월령안이 변경에서 하는 사업은 아주 번창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도 평범한 사람에게 팔 생각은 없었다. 단 한 사람에게 전부 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수중의 재산은 급히 처분하더라도 가장 좋은 가격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 가격에는 금전뿐만 아니라 인맥과 인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가씨, 상천이 혜풍루(惠豐樓)의 한매각(寒梅閣)에 약속을 잡아 놓았답니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추수가 오늘 상천과 둘이서 오전에 한 일을 월령안에게 보고했다.
“아가씨, 저와 상천이 구매자 열여섯 분을 만났어요. 그런데 막상 오신 건 열두 분이에요. 병부(兵部)와 깊이 연관된 네 분은 오지 않았어요.”
“괜찮다, 열둘이면 충분해.”
열두 명에게 베푼 인심은, 나중에 그녀가 변경으로 돌아왔을 때 지금 팔아 치운 재산보다 더 큰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빈털터리가 되는 것도, 실패를 겪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유일하게 두려운 것은 다시 시작할 기회가 없는 것이었다.
“아가씨, 행화루도 팔 건가요? 팔게 되면 영영이랑 그 아이들은 어떡하죠? 행화루를 사는 사람은 분명히 애들에게 몸을 팔라고 강요할 거예요.”
추수의 목소리에 흐느낌이 묻어 있었다.
어떤 장사는 이득을 위한 장사였다면, 어떤 장사는 정을 나눈 것도 있었다. 행화루 같은 경우가 후자였다.
애초에 행화루와 영영이를 위시한 기녀들을 사들인 것은 돈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영영이 같은 아이들에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 아이들이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안 팔아. 행화루는 남겨 두거라. 내가 그 정도는 지킬 수 있단다.”
월령안은 추수를 바라보며 위로의 웃음을 건넸다.
추밀원의 조계안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 변경에서 벌어들인 재산도 전부 지킬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남겨 둬서 뭘 어쩌라고?’
그녀는 청주에 가서 범씨 가문 사람들과 상업계를 주무르는 가문의 가주 자리를 두고 싸워야 했다. 규정대로라면 가주 쟁탈전 이전에 얻은 재산은 범씨 가문에 모조리 바쳐야 했다.
인심을 살 좋은 기회를 버리고 힘들게 번 재산을 범씨 가문에게 순순히 바칠 만큼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아가씨, 정말이에요?”
추수는 뜻밖이라는 듯 기뻐하다가 곧 우울해져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아가씨, 육 장군님, 저기…… 우리가 행화루를 지킬 수 있을까요?”
“내가 변경에 있는 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육장봉 한 사람만이 아니란다. 내가 뿌린 만큼, 그 사람들도 날 조금씩은 봐 줄 거다. 행화루도 괜찮을 거고.”
행화루의 규모가 커지지 않고, 남의 장사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은 조계안이 없더라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조계안이 그녀의 뒤를 봐 주고 있으니 더욱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행화루는 나랑 연관되어 있으면 안 된다. 네가 상천한테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하려무나. 나와 행화루 사이의 흔적을 될 수 있는 한 잘 지워라. 내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남들이 알아내서는 안 돼.”
범씨 가문이 이득을 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행화루가 범씨 가문의 손에 들어가는 날에는 영영과 아이들은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그녀는 청주로 돌아가지 않은 지 십 년이나 되었다. 청주의 범씨 가문과도 왕래가 없었다. 하지만 같은 상업계에 몸을 담다 보니 범씨 가문의 일하는 방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범씨 가문에서는 세세한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뒤를 봐주는 세력을 믿고 아무 돈이나 마구 긁어모았고, 아무 장사에나 마구 손을 댔다. 떳떳한 사업이든, 뒤가 구린 사업이든 가리는 법이 없었다. 그 어떤 더러운 돈, 구린 돈도 마다하지 않고 마구 벌어들였다.
그녀가 조계안이라 해도 이런 장사치는 두고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애초부터 우리가 잘 처리해서 행화루의 하나부터 열까지 아가씨랑 상관이 없는걸요. 아가씨가 의리가 있어 그 아이들을 조금 감싸 준다뿐이지요.”
행화루는 기루였고, 월령안은 대갓집 규수이자 육씨 가문 정실인데 둘을 어떻게 엮을 수 있겠는가?
추수가 턱을 치켜들며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월령안의 지친 기색과 메마른 입술을 보자 곧바로 차를 따라주었다.
“아가씨, 얼른 물 좀 드세요.”
“응.”
월령안은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았다. 그때 손바닥의 상처가 드러났다.
“아가씨, 손이…….”
추수는 이마를 탁 치더니 한탄하며 말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마음이 급해 깜빡했네요.”
“괜찮다.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닦아 주렴.”
월령안은 두 손을 폈다.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보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추수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상처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마음의 고통에 비하면 손바닥의 아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추수는 또 깜빡하기 전에 바로 가루약을 꺼내어 상처를 치료했다. 깨끗한 천으로 상처를 감으려 할 때 월령안이 거절했다.
“나중에 다시 해.”
그녀는 사람을 만나 장사를 해야 했다. 수중의 재산을 헐값에 넘기는 처지라 해도, 자신의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녀는 인심을 베풀러 가는 것이지 구걸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나머지 싼값에나마 사달라며 애원하러 가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우스운 꼴을 드러내는 순간, 남들은 그녀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기는커녕 그녀를 홀랑 집어삼키지 못해 안달일 것이다.
물론 그녀로서는 지금 두려울 게 없었다. 조계안이라는 줄을 잡았으니 배짱이 더욱 두둑해졌다.
월령안은 열두 명의 구매자를 만났다. 이들을 동시에 만난 게 아니라, 각자의 약속 시간에 맞춰 한 명씩 만났다.
상천에게 찾아가라고 한 구매자들 대부분이 너그럽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월령안은 몇 년간의 거래를 통해 그들의 됨됨이를 제법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 거래도 더없이 순조로웠다. 어떤 이들은 더 직설적이었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 때 꼭 도움을 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쉽게 변하고, 사람 마음은 알기 힘든 법. 모두가 이렇게 너그럽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월령안이 육씨 가문의 부인일 적에는 당연히 그녀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고, 소 승상과도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누군가의 눈에는 지금의 월령안이 금덩이를 안고 시장에 나온 세 살배기 어린애처럼 만만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월령안이 재산을 헐값에 처분하는 것은 돈을 벌려는 게 아니라 인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사람이 있었다. 모든 재산을 헐값에 넘기라며 월령안을 협박했다.
“우리 아버지는 소 승상의 제자야. 월령안, 잘 생각해봐. 네 수중의 그 재산은 내 동의가 없이는 아무한테도 못 팔걸.”
이 사람은 태도가 오만방자하기 그지없었다. 한쪽 다리를 의자 위에 척 올려 둔 채 두툼한 손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기름기 가득한 얼굴을 월령안 쪽으로 들이대 침을 잔뜩 튀길 기세로 말했다.
월령안은 순간 안색이 변했다. 옆에 있던 상천을 바라보았다.
“어찌 된 일이냐? 내가 소씨 가문과 연관된 사람에게는 팔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아가씨, 이 자는 제가 찾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마지막 구매자는 화초와 묘목 장사를 하는 금계(金桂) 하(夏)씨 가문입니다.”
상천은 억울함을 참으며 말했다.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다.
“금계 하씨 가문? 내 기억했다. 이 사람은 그럼 …….”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눈앞에서 건들거리는 남자를 훑어보더니 방긋 웃었다.
아무리 싫더라도 인정해야만 하는 게 있었다. 바로 자신이 육씨 가문에서 내쫓긴 몸이라는 사실 말이다. 육씨 가문에는 그녀에게 약간의 정도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그녀를 증오하기까지 했다.
오늘이 지나면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월령안은 그저 불쌍한 사람으로만 남을 것이다. 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누구나 멋대로 밟고 지나가도 되는 가엾은 벌레 같은 처지였다. 어떤 이들은 월령안과 척을 진 적이 없더라도, 육씨 가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녀를 짓밟으려 들 것이다.
안 그래도 그녀는 위신을 세울 기회를 찾고 있었다. 변경의 아첨꾼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소씨 가문이나 육씨 가문이 없더라도 월령안은 아무나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그런데 때마침 누군가 찾아와 위신을 세울 기회를 준 셈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