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세상에 이익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버지가 승상이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건 몰라도, 우선 전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래요! 소 승상께서 잘 가르친 훌륭한 아드님 말이에요. 사람들 앞에서는 가식적으로 전씨 가문 아가씨를 위해 삼 년 상을 치를 것처럼 굴고 뒤로는 첩을 두었네요.”
소함연하고 똑같은 짓거리였다. 그녀는 분명 자기가 먼저 육장봉에게 시집가기 싫다며 도망쳐 놓고, 밖에서는 월령안이 자신의 혼사를 가로채고 변방으로 쫓아냈다며 말하고 다녔다.
소씨 가문 전체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머니의 그 많은 재산을 가로챈 것으로도 모자라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원래는 시간을 들여 소씨 가문을 천천히 말려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조계안이 나타났다는 건, 곧 그녀가 변경(汴京)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청주에 가서 범씨 가문과 상업계에서 싸워야 했다.
상업계는 전장과 같았다. 가주 쟁탈전을 벌일 때마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녀 또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먼저 복수부터 해야만 했다.
“이거 재미있구나.”
조계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소씨 가문이 감히 널 건드리다니. 참으로 재수가 없어. 두 가지 모두 들어주겠다. 다른 요구는 없느냐?”
그는 입궁해서 황형 그리고 육장봉과 잘 의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겸사겸사 육장봉에게 월령안을 버린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알려 줄 심산이었다.
‘월령안, 이 여자는 아름답긴 하지만 가시가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그 가시에 찔려 죽을 수도 있다고…….’
월령안은 조계안이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언짢아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다른 요구가 있냐고? 물론 있지! 세상에 이익이 많다고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더 요구하면 혹여 들어줄 수도 있었다. 다만 뒤끝이 남을 게 뻔했다.
월령안도 적정선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조 대인, 감사합니다. 두 가지 일만 이루어져도 아주 만족할 거예요.”
조계안은 그녀가 원하는 건 얼마든지 만족시키겠다고 장담했다. 그녀가 많이 요구하지 못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월령안은 다시 조계안에게 예를 올리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조 대인께서 십 년간의 약속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십 년 뒤, 제가 청주 범씨 가문을 무너뜨리면, 저희 월씨 가문 사람들의 자유를 허락해 주세요.”
소씨 가문 남매에게 복수하는 것은 그녀의 소원이고, 월씨 가문 사람들이 자유를 얻는 것은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소원을 이룰 기회가 있는데 마다할 리 있겠는가?
“꼼수가 끊이질 않는구나. 육장봉은 네가 이처럼 이해타산에 밝은 걸 아느냐?”
조계안은 궁금한 눈빛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알고 싶었다. 자기 앞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시시콜콜 따지며 주도면밀한 모습이 진짜일까, 아니면 육장봉 앞에서 소녀처럼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진짜일까?
어쩌면 둘 다 월령안의 진실한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육 대장군과 저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 사람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어요.”
목적을 달성한 월령안은 조계안에게 좋은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고는 말했다.
“다른 분부가 없으시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조계안에게 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나가 버렸다.
문밖에 있던 시위가 막아섰지만 월령안은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비켜!”
“길을 내주거라.”
거의 동시에 조계안도 입을 열었다.
“흥.”
월령안은 코웃음을 치고는 발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시위는 반항도 못 하고 월령안의 발에 걷어차였다. 그는 너무 아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광경을 본 조계안은 되레 웃었다.
“성질머리하고는. 삼 년 전에는 그나마 얌전한 척이라도 했었는데. 이젠 아예 얌전한 척도 하지 않는구나.”
삼 년 전의 월령안은 순진한 척,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장사도, 후회도, 두려움도 전부 모른다고 했다. 이를 떠올린 조계안은 저도 몰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지나간 세월이 그리웠다.
* * *
“아가씨……!”
추수가 월령안이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자 눈물을 왈칵 쏟았다.
“드디어 내려오셨군요. 걱정돼 죽는 줄 알았어요.”
“괜찮다. 어서 집에 가자꾸나.”
월령안은 밖에서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 추수를 잡아끌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추수는 피로 축축해진 손바닥에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가씨……!”
“어서 가자!”
월령안은 머리를 가로젓더니, 추수의 손을 꼭 잡고서 밖으로 이끌었다.
“저 사람은…… 육 장군님을 가로막던 월 낭자가 아닌가? 여긴 웬일이지?”
누군가 월령안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때, 화려하게 단장한 여인 한 무리가 다루에 들어왔다. 그 남자의 말을 듣자 선두에 있던 여인이 핀잔을 주었다.
“저 여자가 월 낭자를 닮았다고? 눈이 삐었나? 세상 여자가 다 월 낭자처럼 보이게? 나도 안 보이는 걸 보니 눈이 삐긴 했나 보네.”
“허허, 제가 잘못 봤습니다. 다시 보니 하나도 안 닮았네요……. 제 눈에는 당연히 영영 낭자만 보입니다요. 진정하세요.”
남자는 처음에는 언짢았지만, 핀잔을 준 사람이 행화루(杏花樓)의 간판 기녀 영영임을 알아보자 마음이 누그러졌다. 곧 월령안을 봤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다.
“댁이랑 실랑이할 만큼 한가하지는 않거든요? 여기, 별실이 있는가?”
영영이 툭 쏘더니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점원이 없다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도로 나가 버렸다. 아까 자신이 꼬투리를 잡았던 남자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영영이 다루에 온 이유는 자신의 주인인 월령안이 조용히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월령안이 나갔으니 그녀도 여기에 굳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명기 영영의 출현은 작은 다루에 한 줄기 빛이 되었다. 남자들은 영영의 풍모를 찬양하느라 바빠, 월령안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었다.
“하여튼 잔꾀는 참 많아.”
조계안은 다루에 앉아 모든 걸 낱낱이 지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월령안이 떠나자 조계안도 더 머무르지 않았다. 이 층에서 월령안의 마차가 떠나는 걸 보자 시위를 거느리고 입궁했다.
물론 정문으로 입궁할 수는 없었다. 그처럼 빛을 볼 수 없는 이는 햇빛 아래에 설 자격이 없었다. 어두운 구석에 숨어 지내는 쥐처럼, 사람 눈을 피해 지하 통로로 남몰래 조용히 입궁해야 했다.
조계안은 직접 황제의 난각(暖閣 – 몸을 데우기 위한 난방 시설이 되어 있는 전각)으로 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황제와 육장봉은 아직 오기 전이라 난각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계안은 빛이 들지 않는 가장 구석진 곳을 찾아 앉아 두 사람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일각(刻 - 약 15분)이 지나, 문밖에서 높고 낮은 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조계안은 황제와 육장봉이 돌아왔음을 알아차리고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이 들어서자 앞으로 나아가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조복(朝服) 차림 그대로였다.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한 황제의 모습으로부터 제왕의 패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상냥함과 친근함이 묻어났다.
황제는 조계안의 말에 미소를 거두었다. 그를 바라보며 서운한 듯 말했다.
“계안, 짐이 여러 번 말했잖느냐. 우린 형제이니 그렇게 예를 갖출 필요 없다!”
“안 됩니다! 장봉이가 그리 말했잖습니까. 예의는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요. 저는 장봉이가 제게 예를 올리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조계안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을 등 뒤로 가져가 육장봉이 자기에게 예를 올리기를 기다렸다.
육장봉은 아직도 군장 차림으로, 냉정하고 강해 보였다. 황제의 뒤에 서 있었지만, 황제보다 존재감이 더 컸다. 그는 무표정하게 앞으로 나아가 조계안에게 군례를 올렸다.
“조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러더니 조계안이 입을 떼기도 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조계안은 이를 갈았다.
“나한테도 제대로 예를 올리면 어디가 덧나나?”
육장봉은 묵묵부답이었다.
“됐다. 장난은 그만하자. 모두 앉거라!”
황제는 난감한 표정으로 타일렀다.
“감사합니다. 폐하!”
육장봉은 포권을 하고서 황제의 왼편 아래쪽에 앉았다. 조계안도 구석에 돌아가지 않고 육장봉의 맞은편에 앉았다.
“장봉아, 낮의 그 사건은 네가 억울하게 됐구나.”
황제가 온화한 어조로 먼저 사과했다. 육장봉도 더는 캐물을 수 없었다.
“폐하, 이혼장은 어찌 된 일입니까?”
‘나는 이혼장을 쓴 적이 없는데, 월령안은 어떻게 이혼장을 받았을까? 누가 나를 대신해 아내를 내쳤지? 도대체 왜?’
“이 일은…… 오늘 아침, 계안이 짐에게 보고했다. 자기가 처리한 거라고.”
황제는 조계안을 유감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폐하, 아내와 이혼할지 말지는 신의 집안일입니다!”
‘황제가 남의 집안일에까지 끼어드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너의 집안일이면, 곧 나랏일이야.”
조계안이 황제에게 눈을 부릅떠 보였다. 자신을 팔아넘겼다고 원망하는 듯했다. 황제는 멋쩍게 웃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제 이혼이 나랏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황제는 육장봉에게 밀지를 보내 월령안에게 이혼장을 써 보내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그는 무시했다. 변경에 돌아가거든 다시 생각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입성하고 보니 자신은 이미 아내를 버린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황제는 줏대가 없고 도피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육장봉은 황제가 그의 질문에 절대 대답을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조계안뿐이었다.
“너의 아내가 월령안이니 당연히 나랏일과 연관이 있지.”
조계안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육장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삼 년간 육장봉에게 숨겨왔던 일들을 말했다.
“장봉, 네가 삼 년간 아무 걱정 없이 전쟁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건 황형도, 나도 아닌 월령안 덕이야.”
“그게 무슨 말인가?”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 삼 년간 내가 모르는 어떤 일들이 벌어진 건가? 혹시 폐하와 조계안이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건가?’
“네가 전쟁에 나간 삼 년간 널 위해 군량과 병기들을 보급한 건 월령안이야. 조정은 은전 한 푼도 내놓지 않았지. 월령안은 네 군사들을 삼 년이나 먹여 살린 거야. 또 조정에서 너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잠재운 것도 월령안이야.”
조계안은 무심하게 말했다. 어차피 모든 게 끝난 상황이니, 지금 육장봉에게 알려줘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월령안, 고작 그 여인 혼자서?”
육장봉은 비꼬듯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육장봉, 월령안을 무시하지 말라고. 월령안은 보통 여인이 아니야. 월씨 가문 출신이다. 재신(財神 – 재물을 관장하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소문난 월씨 가문의 후손이라고.”
조계안은 육장봉이 여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여인을 항상 무시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지난 삼 년간 그의 뒤에서 힘이 되어 준 건 다름 아닌 한 여인이었다.
“보아하니 꽤 능력이 있는 모양이야.”
이는 조계안이 한 말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육장봉은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 있었지. 월씨 가문의 보통 사람들은 재신의 축복을 받은 정도라면, 월령안은 재신이 품에 안고 키운 아이나 다름없다고. 이렇게 말하면 월령안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한가?”
조계안은 빙긋 웃으며 월령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차피 월령안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이제 육장봉과는 상관이 없었다.
오늘부터 월령안이 따를 사람은 육장봉이 아닌, 조계안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