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저에게 뭘 해 주실 수 있죠?
조계안은 잠시 말을 끊었다. 월령안이 여전히 무표정한 것을 보자 한마디를 덧붙였다.
“꼬마야, 나에게 감사할 것까진 없다. 잘해 봐. 내가 실망하게 하지 마라.”
“감사합니다. 하지만 별로 솔깃하진 않네요.”
월령안이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청주 월씨 가문이 누리는 부귀영화는 어마어마했다.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의 소원이 다음 생에는 월씨 가문에 태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월씨 가문에서 태어난 월령안은 그들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사람들은 청주 월씨 가문이 천하의 재물 중 칠 할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그들은 월씨 가문의 재산이 그림의 떡에 불과하단 걸 몰랐다.
월씨 가문은 황실에서 내세운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황실을 대신해 재산을 그러모으는 사냥개에 불과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들여도 월씨 가문의 것은 아니었다. 황실의 개로서 월씨 가문은 돈을 벌기만 하면 되었다. 가주는 그중에서 장사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였다.
황실에서는 월씨 가문에 규칙을 정해 주었다. 이십 년에 한 번, 월씨 가문의 모든 자손은 십 년에 걸쳐 진행되는 가주 쟁탈전에 참여해야만 했다.
장장 십 년에 걸친 싸움이 끝나면, 단 한 사람만 남기고 모두 황실에서 데려갔다. 실패한 자는 영영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몇이나 살아남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십 년 전, 청주 월씨의 가주 쟁탈전이 끝나던 그해, 가주 쟁탈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조리 죽었다.
월령안의 아버지, 그 당시 청주 월씨 가주도 죽었다. 커다란 월씨 가문에는 월령안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월령안은 어머니를 따라 변경의 소씨 가문에 들어갔다. 그에 따라 백 년 전통을 가진 청주 월씨 가문은 대가 끊기게 되었다.
대신 청주의 범씨 가문이 그 자리를 꿰찼다.
청주 범씨 가문에 대해 월령안은 아무 원한이 없었다. 월씨 가문이든, 범씨 가문이든 월령안이 보기에는 모두 황실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월씨 가문, 범씨 가문이 없더라도 미(米)씨 가문, 주(周)씨 가문이 있을 것이다. 황실을 위해 일할 사람은 항상 차고 넘쳤다.
월령안의 거절은 조계안도 예상했다. 누구라도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으면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월령안을 돌려보내야 했다.
월령안은 그가 장로들을 제압하고, 더 나아가 암부(暗部)를 장악하는 데 꼭 필요한 구심점이었다.
범씨 가문을 구슬려 가주 쟁탈전을 십 년 앞당기느라 많은 힘을 소모했다. 월령안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느라 대가도 적지 않게 치렀다. 심지어 황형(皇兄)을 설득한 후 밀지를 내리게 해, 육장봉이 아내를 버리게까지 했다.
많이 준비한 만큼 월령안에게 거절할 기회를 또 주지는 않을 것이다.
“너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죽음이 범씨 가문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싸우지 않을 거냐?”
조계안은 다리를 도로 내려놓았다. 끝까지 제대로 앉을 생각은 없는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였다.
순간 월령안은 가슴이 덜컹했다. 동공이 저도 모르게 확대되었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복수하더라도 저만의 방법이 있죠. 평생을 남에게 저당 잡힐 생각은 없어요. 조 대인의 제안이 별로 끌리진 않는데요.”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죽음에 음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범씨 가문이 참여했다는 것도 알아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범씨 가문은 곁다리일 뿐, 주범은 따로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범씨 가문에는 그럴 능력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무슨 이익을 챙기고 싶은지 묻는 게 아니냐?”
조계안은 의자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 월령안을 지켜보았다. 그는 너무 편안한 모습이어서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인께서 주실 수 있는 이익은 모두 제 손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에요. 조 대인께서 저의 평생을 사시려면 충분한 대가를 내놓으셔야죠, 안 그런가요?”
월령안은 두 주먹을 쥐고 팔짱을 낀 채 책상 위에 얹었다.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보였다.
조계안을 거절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라고 해서 아무 패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월령안이라는 패가 있었다.
월령안, 그녀 자신이야말로 최대의 패자, 가장 가치 있는 패였다.
조계안이 월령안을 부리고 싶다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더 많은 패를 내놓아야 했다.
조계안은 실소하고 말았다. 육장봉 앞에서 이성을 잃고 추태를 보이던 월령안이 자기 앞에서는 침착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심지어 자신이 양보하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육장봉이 널 버리길 잘했지. 네 성격에 육장봉이 꼼짝달싹 못 할걸.”
조계안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여전히 느긋하게 물었다.
“너희 월씨 가문에서 사라진 실패자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느냐?”
“알고 있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녀에게 말한 적 있었다.
아버지는 조만간 월씨 가문의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집안사람끼리 복작복작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다.
“령안아, 이 어미는 네가 평생 무탈하게 살기를 원해서 령안(寧安 – 안정, 안녕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단다. 넌 내 딸이지 월씨 가문의 장기 말이 아니야. 월씨 가문의 모든 건 너와 상관없어. 네 인생만 잘 꾸려나가면 돼.”
지난 십 년간 어머니의 말씀대로 월씨 가문과 인연을 끊고 오로지 자기 인생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게 명백히 드러났다.
“십 년! 십 년 후, 네가 가주 자리를 차지하고 월씨 가문 재산을 다시 장악하는 그날이 월씨 가문의 사람들이 자유를 되찾는 날이 될 거다.”
조계안은 그녀를 억지로 휘두를 수도 있었다.
천하는 왕의 것이다. 천하의 백성은 모두 왕의 신하다.
월령안이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할 방법은 많았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일하는 것과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강압적으로 일하게 되면 겨우 일 할 정도의 힘만 발휘할 뿐이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오만불손한 자는 몰래 힘을 길러 배신할 가능성도 있다.
자발적으로 일하는 자는 기꺼이 목숨을 바쳐 일한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십 할의 힘에 열정을 보태어 십이 할의 능력을 보이기 때문이다.
월령안이 자신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하기만 한다면 약간의 이익은 기꺼이 줄 수 있었다.
“전 월씨 가문의 사람들은 한 명도 본 적이 없어요. 그들에게 아무런 정이 없을뿐더러 제가 책임질 이유도 없어요. 또 십 년은 너무 길고 변수도 많죠. 지금 당장은요? 지금 당장 제가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나요?”
월령안은 조계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이번은 둘의 두 번째 거래였다. 그녀는 조계안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건들건들한 체하는 겉모습만 보고 무능하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추밀원은 병권을 장악하는 곳이다. 추밀원의 최고 장관은 추밀사였다. 황제는 줄곧 추밀사를 임명하지 않고 그 자리를 십 년간 비워 두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추밀원은 실질적으로 조계안이 장악하고 있었다. 조계안이 무능했더라면, 그 자리를 꿰차고 여태껏 무사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육장봉이 다시 널 맞아들이게 하는 것만 빼면 다른 건…… 무엇을 원하든 얼마든지 만족시켜 주마.”
조계안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범하게 물었다.
“말해 보아라. 무엇을 원하느냐?”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어요.”
월령안이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그녀는 속이 좁았다. 원한이 있으면 당장 앙갚음을 하지, 다음날까지 넘기는 법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성격인 걸 어쩌랴. 원체 속이 좁을 뿐만 아니라 뒤끝도 길었다. 당장 앙갚음을 하지 못하면 평생을 두고 별렀다.
그러다가 일단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반드시 상대방을 봐 주는 법 없이 곱절로 갚아 주었다.
월령안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듣자 하니 소 승상의 따님이 돌아왔다더군요. 스물한 살이니 당장 시집갈 나이잖아요. 폐하께서는 늘 신하를 아끼셨죠. 이번에는 폐하께서 소 승상을 좀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황제께서 소 승상의 따님에게 혼사를 내려 주시는 영광을 선사하면 어떨까 해요.”
“소함연? 그…… 육장봉을 변방까지 쫓아갔다던 여인 말이냐?”
조계안은 수시로 육장봉을 들먹이며 그녀를 자극했다. 월령안은 말려들지 않았다.
“맞아요! 육장봉에게 시집가기 싫어 변경에서 도망쳤다가 국경 지대로 팔려간 소함연 말이에요.”
“인연이 있으면 천 리를 떨어져 있어도 만나게 되고, 인연이 없으면 마주하고 있어도 손 한 번 잡기 힘들다오.”
조계안이 비아냥거리며 웃어댔다.
월령안은 머리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렇죠. 인연이 있으면 천 리 길도 마다하지 않죠. 그래서 폐하께서 소 소저와 육씨 가문 일곱째 도련님을 위해 혼인을 내려 주셨으면 해요.”
“육씨 가문 일곱째 도련님이라면……? 육비우? 육장봉의 사촌 동생 말인가?”
조계안은 어안이벙벙해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되물었다.
“진심이냐?”
‘월령안, 너무 지독한 거 아닌가?’
“물론이죠.”
이런 일을 두고 함부로 장난칠 그녀가 아니었다.
조계안은 눈을 크게 뜨고 월령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건 사랑하는 이들끼리…… 친척이 되라는 말이 아니냐.”
조계안은 생각할수록 월령안의 수가 재미있게 느껴져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육씨 가문에서 패륜의 비극이 발생할까 걱정되지도 않느냐?”
“육장봉은 절대 그럴 리 없거든요.”
육장봉은 소함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설령 좋아한다고 해도 소함연이 제수가 되는 순간 인연을 끊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육장봉을 믿느냐?”
조계안은 괜히 불쾌해졌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언짢았다.
“저도 보는 눈이 있습니다만.”
육비우가 아무리 살을 붙여 진짜인 것처럼 얘기해도 그녀는 믿지 않았다. 애초에 육장봉이 소함연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었다.
“흥.”
조계안은 불쾌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흡사 은혜라도 베풀듯 말했다.
“이 조건은 들어주마.”
“그리고…….”
쇠뿔도 단김에 빼려는 식으로 월령안이 말을 이으려 했다.
“또?”
조계안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면을 사이에 두고도 남자가 언짢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월령안은 겁내지 않았다. 차분하게 앉아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소함연의 오라버니 소여방(蘇予方)이 수천(袖天) 거리에 집을 사고 첩을 두었는데 애가 벌써 두 살이나 되었어요. 첩의 자식도 폐하의 백성이잖아요. 폐하께서 백성을 자식같이 여기시니 그 첩의 자식도 아끼시어 본가에 입적시키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해요.”
“뭐라고?”
조계안이 벌떡 일어나 똑바로 앉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확인했다.
“소여방이 첩실에 자식까지 두었다고?”
소여방의 약혼녀는 삼 년 전 혼례 전날 밤,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소여방은 슬픔에 잠긴 나머지 전(錢)씨 가문의 권유도 마다하고 약혼녀를 위해 삼 년 상을 치르기로 했다.
이 행동 때문에 정이 깊고 의를 중히 여긴다는 칭찬을 들었다. 문인들과 기루의 명기들에게도 추앙을 받았다.
혼사가 성사되지 않았지만, 전씨 가문에서도 사위 대접을 극진히 해 조정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소여방은 나이가 많지 않지만 벌써 사 품 관직에 이르렀다.
그런데 월령안은 지금 모든 게 가짜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폭로되는 순간, 소여방은 끝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