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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화 (4/1,004)

4화 후회하지 않아

남자가 책상을 한 번 두드리자 갑자기 주위 공기가 술렁였다.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이가 조용히 남자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자세는 유난히 공손했다.

남자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손에 든 잔을 아무렇게나 던지더니 싸늘하게 명령했다.

“가서 월령안을 내 앞에 데려 오너라.”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소녀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 * *

다루로 불려갔을 때 월령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육장봉은 명성이 자자하여 나라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월령안도 변경에서는 꽤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오늘 육 대장군이 승리하고 돌아오자마자 아내를 버렸다. 이 사실과 그녀를 주목하는 이 또한 부지기수였다.

사업상의 동반자, 적, 경쟁 상대 모두가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육씨 가문이라는 보호막을 잃은 그녀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해 했다.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으나 그녀를 만나려는 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당신이었군요.”

은으로 만든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온몸에 풍기는 귀티를 감추지 못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월령안은 왠지 섬뜩함을 느꼈다.

이번이 고작 두 번째 만남이지만, 그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처음 만난 건 삼 년 전이었다. 당시 그는 암황의 영패를 들고 와 육장봉에게 시집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거절했다.

이미 청주 월씨 가문을 떠났기에 월씨 가문의 숙명을 이어 나갈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운명도 암황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 그는 강요하지는 않았다. 대신 ‘월령안, 후회할 거야’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아니요!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어요.”

당시의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고 확신에 차 있었다.

“보아하니, 나를 잊지는 않았군.”

남자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월령안에게 잔을 들어 보였다.

“저번에는 썩 유쾌한 만남이 아니라 통성명도 제대로 못 했지. 오늘 다시 인사하겠네. 월령안, 나는 조계안(趙啓安)이라 한다.”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 조계안!”

그녀도 내심 그가 심상치 않은 신분일거라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그의 정체가 드러나자 월령안은 순간 깜짝 놀라 온몸이 굳어져 버렸다. 그녀는 곧바로 기민하게 몸을 긴장시키고 그를 경계했다.

그녀는 이자가 엄청나게 위험한 사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패 장군 육장봉, 무림지존(武林至尊) 수횡천(水橫天), 그리고 추밀원수(樞密院首) 조계안.

이 세 남자는 대주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이었다. 그 권세와 지위는 황제와 비견될 정도였다. 황제도 그들에게는 예우를 갖췄다.

또한, 셋 중에서도 추밀원 부사 조계안이 가장 비밀스러웠다. 다들 그의 이름만 들었을 뿐, 정작 사람을 봤다는 이가 없었다.

조계안은 추밀원 부사였지만, 황제가 줄곧 추밀사(樞密使 – 추밀원의 수장)를 따로 임명하지 않았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그가 곧 추밀원의 수장이었고, 사람들은 암암리에 그를 추밀원수라고 불렀다.

월령안은 눈앞에 사내가 추밀원 부사 조계안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삼 년 전, 사내는 암황만이 지닐 수 있는 영패를 들고 찾아왔다.

왜냐하면 바로 암야제황(暗夜帝皇)이 그의 은밀한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황은 바로 월씨 가문을 지배하는 진정한 주인이었다.

“보아하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군.”

조계안이 눈을 살짝 치뜨며 바라보았다.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호방하면서도 제멋대로였다.

조계안이 앉으라며 고갯짓을 했다.

“이 자리엔 우리 둘뿐이니 천천히 얘기해 보지.”

“저는 조 대인과 얘기할 게 없습니다.”

말만 이렇게 했을 뿐, 월령안은 결국 조계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밖에는 고수들이 가득하여, 그의 동의 없이는 나갈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계안이 웃음을 띠고 말했다.

“월령안, 긴장할 필요 없어. 나는 육장봉이 아니야. 널 잡아먹지 않아.”

“무엇을 원하세요?”

월령안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육장봉에게 버림받은 고통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조계안을 상대하고 있으려면 반드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조계안에게 홀랑 잡아 먹혀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 텐데.”

조계안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거수일투족에는 느긋한 기운이 풍겨, 둘은 한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차 한 잔을 따라 기다란 손가락으로 월령안 앞에 슬며시 밀어주었다.

“한번 마셔봐. 네가 좋아하는 육안과편(六安瓜片 – 안후이성에서 나는 고급 녹차의 일종)이다.”

월령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눈앞의 맑은 청록색 찻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 대인, 전 이미 청주 월씨 가문에서 벗어났어요. 대인께서 원하시는 것은…… 해낼 수 없습니다!”

“해낼 수 없다?”

조계안이 비웃듯이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 월령안이 해낼 수 없는 일이 다 있느냐? 오, 맞다…… 내가 깜빡했군. 방금 육장봉에게서 버림받았지. 육장봉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건 월령안이 해낼 수 없는 일이겠네.”

조계안은 월령안이 신경 쓰는 것이 무엇인 줄 알면서도 기어코 그 상처만 골라 콕콕 찔러댔다. 만약 다른 여인이었다면 이미 이성을 잃고 실성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월령안은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상인이었다.

상인은 장사할 때,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항상 이성적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밑지는 장사를 피할 수 있었다.

월령안은 말없이 조계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눈물에 씻긴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는 명석함만 보일 뿐, 슬픔도 고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한쪽에 내려뜨린 손은 꽉 움켜쥔 나머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곧 손바닥이 흥건해졌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었다.

월령안이 묵묵부답이어도 조계안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의 화사한 얼굴과 몸에 걸친 값비싼 붉은 비단 치마를 보고는 또다시 비웃었다.

“월령안, 육장봉은 네가 무슨 차를 마시는지, 무슨 음식을 먹는지, 어떤 색상을 좋아하는지 알아? 가장 좋아하는 치마를 입고 많은 이들 앞에서 육장봉에게 수모를 당하니 기분이 어땠느냐?”

“괜찮은데요! 조 대인, 하실 말씀은 그것뿐인지요?”

월령안은 짜증을 드러내며 턱을 살짝 치켜들어 보였다. 건방진 태도에, 눈에는 조소까지 보였다.

그녀는 조계안에게 행동을 통해 알리고 있었다. 시비를 걸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헛수고는 그만하라고. 하지만 손을 슬쩍 폈을 때, 손바닥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월령안은 손바닥의 피를 붉은 치마에 슬그머니 문질렀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적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지. 값어치 없는 무의미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거야. 절대 안 울어!’

“내 얘기는 끝났다.”

조계안이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하고 웃음기를 거두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지금 이 순간, 후회하느냐?”

‘널 사랑하지 않는 사내를 위해 삼 년을 허비하고, 고집을 버리고, 자존심마저 버린 걸 후회하느냐? 그리고 날 거절한 걸 후회하느냐?

월령안, 정녕 후회하지 않느냐!’

“저! 월령안은요!”

월령안은 웃음을 머금은 채 붉을 입술을 살짝 벌려 한 마디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제 선택을 후회한 적 없어요. 삼 년 전에도, 삼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후회하지 않는다고? 후회하지 않는다니 다행이구나!”

조계안의 눈빛에서 순식간에 느긋함이 사라졌다. 그는 벌게진 눈으로 사람을 집어삼킬 듯이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육장봉이 약간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많은 이들 앞에서 자신을 버려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월령안, 대단하구나! 내 성미 한번 제대로 거스르는군!’

별안간, 조계안이 사냥감을 덮치는 표범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탁상 가장자리를 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차가운 가면이 월령안의 얼굴에 닿을 듯했다. 그는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다시 묻겠다. 나를 위해 일할 것이냐, 아니면 또다시 거절할 테냐?”

‘월령안, 나한테 너를 망가뜨릴 기회를 주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얼굴에 와 닿는 싸늘한 기운과 갑자기 뿜어져 나온 조계안의 위압감 때문에 순간 심장이 멈추고 숨까지 막힐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을 뿐, 다시금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눈앞의 정교한 가면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가면으로도 험상궂음을 감추지 못한 사내를 보며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거절? 내가 거절이나 할 수 있겠어? 나는 남의 도마 위에 오른 고기나 다름없는 신세인데.’

육씨 가문이라는 방패막이 없는 월령안은 조계안의 도마 위에 오른 고기일 뿐이었다. 거절이란 불가능했다.

월령안이 조용히 되물었다.

“조 대인을 위해 일을 하면 어떤 이익이 있나요?”

거절하지 못하는 이상, 최대한 이익을 챙겨야 했다.

이는 아버지에게 배운 장사 비결이었다.

밑질 게 뻔한 데도 거절할 수도 없고, 손실을 제때 막을 수도 없을 때에는 최대한 손실을 줄여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사람은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이번 거래에서 밑졌으면 다음번에 만회하면 된다.

장사란 인생과 마찬가지였다. 늘 최고봉에 머무를 수도, 마냥 평탄한 길만 갈 수도 없다. 인생에는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장사 또한 밑질 때도, 벌 때도 있는 법이다.

조계안을 위해 일한다. 분명히 밑지는 장사이지만 거절할 수도, 손실을 막을 수도 없었다. 별수 없이 손실을 줄이고 최대한 이익을 챙기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이 한발 물러나며 타협했다. 덕분에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 폭주하던 조계안의 기분이 풀렸다.

“이 상황에서 나에게 이익을 요구하다니, 월령안답구나.”

조계안은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만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가면을 사이에 둔 채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슬쩍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그녀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책상 위로 올려 꼬았다. 다시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말해 보거라. 어떤 이익을 원하느냐?”

차가운 가면이 이마에 닿는 순간, 월령안은 불편함을 느꼈다. 가면이 닿았던 곳을 닦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가까스로 억누르고 냉정하게 말했다.

“청주의 가주 쟁탈전까지는 아직 십 년이 남았어요. 이 십 년 동안, 절대적인 자유를 주세요. 제가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말아 주시고요. 물론 저도 보호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꼬마야, 십 년이 아니야!”

월령안이 손해를 보는 광경을 보자, 조계안은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그는 월령안에게 손가락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올해야! 올해 칠 월, 십 년마다 한 번 열리는 청주 갑부의 가주 쟁탈전이 곧 시작될 거야.”

“올해? 이십 년 주기가 아닌가요? 청주의 범(範)씨가 월씨를 대신해 청주 갑부가 된 지 십 년밖에 안 됐어요. 규칙에 따르면 가주 쟁탈전은 십 년 뒤예요.”

비록 어린 나이에 월씨 가문을 떠나기는 했지만, 규칙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말하는 건, 월씨 가문의 규칙이지. 범씨 가문은…….”

조계안이 경멸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범씨 가문은 사람 해치는 일만 잘했지 장사는 문외한이야. 내 눈에 거슬리거든.”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결정을 내렸다. 청주 범씨 가문의 십 년마다 한 번 열리는 가주 쟁탈전은 올해 칠월부터야. 내가 너 대신 자리 하나를 마련했다. 넌 범씨 가문 자제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가주 쟁탈전에 참여하게 될 거다. 네게 기회를 주마. 그때 범씨 가문에게 빼앗긴 대로 고스란히 되찾아 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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