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3)화 (3/1,004)

3화 늑대처럼 싸워라

“어허?”

구경꾼들은 한껏 흥분되었다. 처음에는 웬 여인이 육 대장군을 흠모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그 여인이 대장군의 부인이라고 한다.

“조금 전?”

육장봉은 월령안이 손에 쥔 이혼장을 슬쩍 한 번 보았다. 눈빛이 살짝 변했지만, 곧 냉정하게 말했다.

“삼 년 전에도, 나는 당신을 맞아들인 적 없어.”

보아하니, 황제가 자신에게는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먼저 손을 쓴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가 육씨 가문에 시집갔던 건 부인하시지 않으시겠죠?”

그의 마음속에 자신이란 존재가 전혀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듣고 있자니 마음은 송곳으로 콕콕 찌르듯이 아팠다.

십 년을 그리워하며 기다렸다. 그는 그녀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모든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두 사람의 만남을 수없이 상상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만난 순간, 그는 환상을 산산조각내고, 그녀를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지독한 사내. 하지만 그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모든 건 월령안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이혼장을 갖고 있군.”

육장봉이 냉담하게 말했다. 삼 년 전에 자신이 월령안을 집에 들이지 않았듯, 삼 년 후인 지금도 자신은 그녀를 내쫓지 않았다. 혼인과 이혼 모두 그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으니 그는 자연스레 이 처사도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이혼장 하나로, 삼 년 동안 제가 했던 모든 노력을 없앨 거예요?”

그동안의 노력으로 얻은 게 고작 이혼장 하나라고?

‘이혼장 하나로 이 월령안을 내치고 소함연과 알콩달콩 지내 보시겠다? 육장봉, 꿈 깨시지!’

월령안은 열 살 때부터 손해 보는 장사를 한 적이 없었다.

육장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노력 말인가?”

‘매달 보낸 편지를 얘기하는 건가?’

“전…….”

월령안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만두었다. 소씨 가문과의 약속, 조정 관리들이 알게 모르게 했던 경고를 생각하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들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남을 위해 헛수고하는 걸 가장 싫어했지만, 육장봉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에게는 말해 줄 수 없었다. 참으로 억울하고 슬픈 노릇이었다.

“삼 년간 당신을 기다렸어요. 당신을 대신하여 노부인의 임종을 지켰고, 일 년간 상복도 입었어요. 이건 부인하지 않으실 테죠?”

‘당신을 위해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부탁했고, 피까지 토할 정도로 녹초가 되게 일했고, 당신을 위해 한 땀 한 땀 옷을 짓다 손끝을 피투성이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또…….’

육장봉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는 하나도 말할 수 없었다.

소씨 가문, 소함연!

월령안은 부모님을 합장해 드리고 싶었다. 두 분이 돌아가신 뒤에도 함께할 수 있도록 해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건 사실이군.”

월령안의 빨개진 눈동자를 지켜보던 육장봉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 여인이 중요한 일들을 많이 숨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마 그런 일들 때문에 황제는 자신이 입성도 하기도 전, 밀지를 보내 여인을 내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고작 여인 하나에 얽매일 필요 없었다. 황제가 대신 내쳤다고 하니, 내치면 그만이다.

“당신을 삼 년간 기다렸어요. 하지만 당신은 돌아오자마자 저를 버렸고요. 당신 때문에 꽃다운 나이도 흘려보냈고, 제 명예도 훼손된 셈이에요. 그러면 저한테 삼 년을 배상해야 하지 않나요?”

월령안은 가슴을 옥죄는 아픔을 억누르고 육장봉과 냉정하게 흥정했다.

월령안은 상인이었다. 밑지는 상황에서는 손실을 최대한으로 막아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반격해야 했다.

그러니 오늘, 반드시 결판을 내야 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육장봉은 사냥감을 만난 맹수 같았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월령안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이 여인이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감히 나를 똑바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흥정까지 하다니. 황제가 나를 대신해서 한발 앞서 내치지만 않았다면, 육씨 가문에 이런 부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텐데. 아깝군…….’

“제가 당신 때문에 삼 년을 흘려보냈으니, 당신도 저에게 삼 년을 배상해 주세요. 삼 년이 지나기 전에는 정실이든 첩실이든 들이지 마세요. 정혼뿐만 아니라 정분이 나서도 안 되고요.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 모든 여자와의 접촉을 삼가셔야 해요.”

소함연이 지금 스물한 살이니 삼 년 뒤엔 스물네 살, 그녀가 기다리겠다고 한들 소씨 가문에서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소함연, 육장봉에게 시집가겠다고? 꿈 깨시지!

이 월령안이 지옥에 빠졌는데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 누구 하나 홀가분하게 살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

정실도 안 된다, 첩실도 안 된다, 정혼도 안 된다…….

연이어 다섯 가지 조건을 말하고 난 월령안은 육장봉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안 된다? 이 세상에서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감히 나한테 안 된다고 말하는 이가 없거늘, 당신……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육장봉은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왼쪽에 있는 다루를 슬쩍 훑었다.

거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 육장봉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루(茶樓) 안에 있는 남자의 눈길은 남달랐다. 그 남자는 월령안을 보고 있었다.

월령안은 당당하게 육장봉의 시선을 마주했다.

“육 대장군, 약조를 지킬 수 있으세요?”

그녀가 배짱이 두둑하지 않았다면 진작 늑대 굴에 끌려갔을 것이다. 아마 무덤 위로 풀도 사람 키만큼 자랐겠지.

“삼 년 동안 나는 결혼도, 정혼도 하지 않겠다. 만족하나? 월령안.”

어차피 삼 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혼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여인이 입에 담은 ‘육 대장군’이란 네 글자가 어쩐지 비웃는 것처럼 들리는 건 어째서일까?

“엥?”

육장봉의 말에 정작 구경꾼들이 깜짝 놀랐다.

육 대장군은 이미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삼 년 뒤면 스물여덟 살이나 되었다. 그때 가서 적합한 아가씨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하물며 육 대장군은 무관이니, 수시로 전장에 나가야 할 몸이다. 삼 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도 모르는데 자식을 두지 않는다면, 육씨 가문의 대가 끊어질 것이다!

“안 돼요!”

양쪽 길가의 다루에 앉아 있던 귀족 아가씨들도 이 말에 얌전함 따위는 멀리 던져버리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육 대장군, 그건 안 돼요……!”

“육 대장군은 과연 멋진 분이야, 마음에 쏙 들어.”

다루에서 육 대장군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 중에는 귀족 아가씨들뿐만 아니라 기루의 기녀들도 있었다.

대주에서는 기루의 이름난 기녀라면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시도 짓고 노래에도 능했으며 다재다능하여 수많은 문인이 추종했다. 마찬가지로 그녀들도 추종하는 이가 따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나라의 영웅인 육장봉, 육 대장군이었다.

“영영(盈盈)이는 육 대장군의 모든 걸 좋아하지.”

다른 한 기녀가 웃는 얼굴로 영영을 놀리며 부추겼다.

“영영아, 육 대장군께 들려 드리려고 유(柳) 선생한테 부탁해 가사도 얻고, 네가 직접 곡도 만들었잖아. 어서 불러, 지금 부르지 않으면 대장군께서 곧 떠나가실걸.”

“내가 한 곡 뽑으면 천금은 못 받아도 만인의 환호는 받아야지. 돈도 없고 환호도 없는데 내가 왜 하니?”

남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명기 영영은 옥같이 흰 피부에 그림처럼 섬세한 오관을 지녔다. 입술마저 연지를 바르지 않아도 발그레했다.

영영이 뾰로통해서 말한 이를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아래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남녀를 내려다보며 저도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아래쪽에 있는 월령안이 바로 자신의 주인이었다. 감히 주인 앞에서 그 남편, 아니 전 남편을 상대로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녀는 만인에게 추앙받는 화려한 생활을 좀 더 누리고 싶었다.

한편 아래쪽, 목적을 달성한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허리를 살짝 굽혀 예를 올리고 대답했다.

“만족해요. 대장군의 배상에 감사드립니다.”

삼 년으로 삼 년을 맞바꾸었다. 비록 밑진 장사였지만 조금이나마 본전을 찾은 셈이라 퍽 만족했다.

월령안은 머리를 숙였다. 가슴을 저미는 고통을 무시하며, 당장 굴러 떨어지려는 눈물을 감추었다.

육장봉, 그는 그녀의 소년이자 남편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더는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되었다. 다시 만나더라도 그냥 안면이나 있는 남남일 것이다.

육장봉, 그는 그녀의 오빠이자 신앙이었고, 구원이자 희망이었다. 처음에 가슴속에 새겼던 모습을 이 순간부터 고스란히 지울 것이다.

월령안은 허리를 굽힌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땅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 그녀는 대장군 부인이 아니었다. 월령안은 이제 월씨 가문의 큰아가씨, 월씨 가문이 키워낸 늑대, 월씨 가문의 다음 가주(家主) 후보 중 하나였다.

이제부터 또다시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걸었던 길을 따라 늑대처럼 싸워야만 했다.

십 년 전, 천진난만했던 그녀는 월씨 가문만 떠나면 운명의 굴레를 벗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변경의 소씨 가문은 그녀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삼 년 전, 그녀는 여전히 순진했다. 육씨 가문에 시집만 가면 월씨 가문의 숙명에서 벗어나, 여느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육장봉이 그녀에게 호되게 한 방을 먹였다.

부모님, 오라버니, 온 집안 식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그녀를 월씨 가문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려고 애썼다.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월령안은 오랫동안 허리를 굽힌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흐르는 눈물도, 마음속 슬픔도 주체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오직 눈물을 감추어 남들에게 자신을 조롱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이 고개 숙인 월령안의 모습만 보고 있을 때였다. 일반인을 훨씬 뛰어넘는 청력을 가진 육장봉은 그녀의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녀를 한 번 더 주의 깊게 훑어보고는 채찍질하여 곁을 지나갔다.

갑자기 무척 궁금해졌다. 이 여인의 어떤 점이 황제의 눈에 들어, 황제가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밀지를 보내 그녀를 내쫓았을까?

다그닥, 다그닥…….

병사들도 말을 탄 채 월령안의 곁을 지나갔다. 모두 곁눈질 한 번 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눈물을 본 이는 없었다.

곧 대군이 모두 지나갔다. 텅 빈 길 한가운데는 월령안만 덩그러니 남았다.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고독하게 서 있었다.

구경꾼들은 월령안을 힐끔 보고 잠시 주저했다. 곧 또 다른 구경거리를 찾아 대군을 냉큼 뒤쫓았다.

“황제께서 궁 밖으로 나와 직접 대장군을 맞이한다던데! 우리도 빨리 가면 용안을 볼 수도 있을지도 몰라.”

“얼른 가자. 서둘러…….”

곧 구경꾼들 대부분이 떠났다. 월령안은 그제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녀는 길 한복판에서 천천히 허리를 곧게 펴고 손으로 눈물을 차분하게 닦아냈다. 그리고 화사한 미소를 떠올렸다.

‘모든 게 끝났어. 하지만 이제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수 있어.’

최악의 결과라고 해 봤자, 다시 월씨 가문으로 돌아가 다른 월씨 가문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십 년을 싸우면 그만이었다.

십 년이란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십 년 동안 육장봉을 기다리며 마음속에 그를 조금씩, 조금씩 새겼다. 이제 또다시 십 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그를 잊어버리면 된다. 마음속에서 하나하나 지워 나가자.

“월령안, 역시나 재미있는 인물이야. 내가 십 년을 기다리며 혼인까지 망쳐 놓은 보람이 있어.”

다루 안, 가면을 쓴 남자는 월령안의 미소에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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