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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화 (2/1,004)

2화 얼굴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네

“네? 아가씨, 재산이 적어도 몇 백만 냥은 될 거예요. 날이 저물기 전에 도저히 처리할 수가 없어요. 게다가…… 그렇게 처리하면 너무 밑지는 거 아닌가요.”

추수는 깜짝 놀라 안고 있던 봇짐을 떨굴 뻔했다.

월령안은 걸음을 멈추고 추수에게 눈을 흘겼다.

“추수야, 육장봉과 육씨 가문의 보호 없이 내가 그 재산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니? 재산은커녕 나 자신조차도 지킬 수가 없단다.”

이는 그녀의 슬픔이자 월씨 가문의 슬픔이었다. 월씨 가문 사람들이 아무리 돈을 잘 벌어들인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어도 지킬 수가 없으니 말이다.

“아가씨…….”

추수는 금세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머금었다.

월령안은 담담히 웃어넘겼다. 소탈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깟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야. 재산을 처리한 다음 남은 연지, 물분 가게는 두 몫으로 나누고, 각자 삼만…… 아니다, 오만 냥 은표(銀票 – 적힌 금액만큼 은과 교환 가능한 옛 지폐)를 더하여 육씨 가문의 둘째, 셋째 숙모님께 보내드리렴. 그리고 이건 예전의 조카며느리가 둘째, 셋째 아가씨를 위해 준비한 혼수라고 여쭈거라. 내가 육씨 가문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미리 혼수를 준다고, 그네들이 좋은 부군을 만나기 바란다는 말도 함께 전하거라.”

“아가씨, 마음 놓으세요. 제가 잘 처리할게요.”

추수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아가씨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육씨 가문을 생각 하는구나…….’

추수가 씁쓸함을 거두기도 전에 월령안이 말을 이었다.

“그다음에는 넷째 숙모님도 뵈어라. 숙모님네 아들 육비우가 나를 육씨 가문에서 내쫓으며 형수로 인정하지 않으니, 큰아가씨 혼수는 마련할 방법이 없다고. 또 넷째 숙모님이 삼 년 동안 나한테서 빌려 간 돈, 가게에서 가져간 물건 대금도 잘 정리해 육비우에게 보내거라. 사흘 내로 갚지 않으면 이제 남남이 되었으니 관아에 가서 뇌물수수죄로 고발할 거란 말도 전하거라.”

월령안은 무척 기대되었다. 두 아가씨 몫의 어마어마한 혼수와 비교한 순간, 큰아가씨가 과연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혼수도 없이 과연 좋은 집안에 시집갈 수 있을까?

“아, 아, 아가씨…….”

추수는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그들이 육씨 가문에 있는 삼 년 동안, 육씨 가문의 사부인(四夫人)인 넷째 숙모가 얼마나 재물을 밝히는지는 손금 보듯 빤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부인의 심장을 난도질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진짜 독하다……. 그런데, 진짜 속 시원하네. 어쩌지?’

“누구든 나 월령안을 괴롭혔으면 이익을 볼 생각은 말아야지. 난 상인이거든, 손해 보는 걸 가장 싫어한단 말이야.”

월령안은 순간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그러나 곧 예전 모습으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참, 오늘 방어를 맡은 사람이 누구지?”

“정서(程敍), 정 장군이에요.”

추수는 커다란 봇짐을 안은 채 월령안을 뒤따라갔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뭘 좋아한다던?”

“그분은 말을 좋아하고, 부인은 금, 은, 옥기를 좋아하신대요.”

추수가 재빨리 대답했다. 빠른 걸음걸이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좋아하는 게 있다니 잘됐네. 상천(常天)에게 병기와 보석을 이용해서 길을 좀 트라고 해라. 반 시진 뒤에 육장봉을 만나야겠다. 큰길에서, 성안 모든 백성 앞에서 볼 거야.”

월령안의 얼굴에는 결의가 번뜩였다.

‘나 월령안이 힘든 만큼, 날 실컷 등쳐먹고 비수를 꽂은 육장봉, 육비우, 소함연 누구 하나 편히 지내진 못할걸!

비록 내가 부모님 없이 혈혈단신이라지만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말겠어!’

“아가씨, 아니면……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추수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필요 없다! 사람들이 우리 월씨 가문에서는 애들을 늑대같이 키운다고 하잖니. 내가 바로 월씨 가문에서 키워낸 고독한 늑대야. 늑대는 혼자 싸워야 해.”

월령안은 두 눈을 감아 모든 감정을 감추고 힘차게 걸어 나갔다.

‘난 이유 없는 손해는 보지 않아. 내 권리는 내가 찾겠어!’

* * *

큰길을 걸으며 왁자지껄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주변 사람들이 육장봉의 용감함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들으니 어쩐지 헛웃음만 나왔다.

애당초 육씨 가문의 노부인이 집으로 찾아와 청혼할 때 했던 약속은 참으로 달콤했다.

그녀가 육씨 가문의 든든한 후방이 되어 준다면, 육씨 가문은 그녀의 보호막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고아인 그녀가 경성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해 주고, 대주(大周)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해 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고작 삼 년!

이제 육장봉은 승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더는 그녀의 돈주머니가 필요 없다며 가차 없이 차 버렸다. 빈말 한마디 없었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 매정할 수 있을까?’

월령안은 한 발짝 한 발짝 성문으로 걸어갔다.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기어코 참아냈다.

반 시진쯤 지나 월령안은 성문에 도착했다. 방어가 자못 삼엄했다. 금위군(禁衛軍)이 세 걸음 간격으로 한 명씩 서서, 장창으로 양쪽을 막고 있었다. 길 양쪽에는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바야흐로 입성하는 대장군에게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울리자 월령안은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준수하고 앳되었던 소년 장군은 성숙하고 듬직하면서도 강하고 냉혹한 대장군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빼어난 자세로 말 등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갑옷이 준수한 용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 뒤따르는 모두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전장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서일까. 그의 몸에서는 사람을 짓누르는 살기와 위압감이 느껴졌다.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월령안은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꼬마 장군이자, 십 년을 기다린 사내였다. 마음속 깊이 새기고, 모든 걸 바쳐 사모한 사람이었다.

이제 그가 돌아왔다. 하지만 더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육장봉!”

대군이 입성하여 눈앞에 다가온 순간, 월령안은 아무 예고 없이 무작정 뛰쳐나갔다. 두 팔을 벌리며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다시 소리쳤다.

“육 대장군!”

그는 허공의 적막을 깨트리는 한 줄기 섬광처럼 텅 빈 큰길 위에 말을 몰아 나타났다. 백만 대군이 뒤따르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큰길 위에 오로지 그만 보였다.

길 양쪽에서 북적대는 사람들, 뒤따르는 위풍당당한 전사들도 이 남자 앞에서는 모두 허상이요, 배경일 뿐이었다.

꾹 다문 입, 단호한 눈빛을 한 사내는 뒤따르는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강하고 자제력이 뛰어나 보이는 한편 냉철하고 안하무인격으로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눈앞에 별안간 그림자, 그것도 여인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육장봉은 눈앞에 나타난 여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구경꾼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작스레 뛰쳐나와 눈앞의 멋진 광경을 망친 여인을 쳐다보았다.

“헉……!”

사람들은 깜짝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이고, 송장 치우게 생겼네!’

‘저 여자는 겁도 없나!’

육장봉은 말과 한 발짝도 안 되는 거리에 서 있는 여인에게 순간적으로 감탄하는 눈길을 보냈다. 말발굽이 여인을 짓밟으려는 찰나, 그가 고삐를 당겼다.

“워…….”

말이 앞발을 쳐들고 번쩍 일어섰다. 월령안은 무서워서 그만 눈을 꼭 감고 말았다. 검은 그림자가 덮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용감한 사람이 이기는 법.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일단 물러서면 기세가 반으로 꺾인다. 그러면 기선 제압에서 지고 들어가는 꼴이었다.

약한 척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길가에 주저앉아 울고불고 애원하는 짓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워워…….”

육장봉을 뒤따르던 병사들도 반응이 빠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고삐를 잡아 군마를 멈추게 하자, 그들도 자신의 말을 멈추게 했다.

척! 척!

모든 군마가 멈추는 동시에 병사들도 일사불란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보였고, 시간도 멈춘 듯하였다.

이게 바로 전신이자 나라의 검이라 불리는 육장봉이었다. 그가 거느리는 군대도 우두머리와 마찬가지로 기백이 넘쳤지만 그를 감출 줄도 알았다.

“와! 멋지다.”

구경꾼들은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육 대장군 덕분에 손쉽게 위기를 넘기다니!

“육 장군답네. 진짜 대단하다.”

“거느리는 군대도 만만치 않네. 보세. 하나같이 일사불란하잖아. 진짜 강하다니까. 그러니 북요 군대가 참패할 수밖에 없지.”

“월령안, 과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한편, 다루(茶樓) 안 창가에 가면을 쓴 한 남자가 앉아 이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늘색 찻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살짝 손목을 꺾었지만 찻물은 잔에서만 소용돌이칠 뿐, 한 방울도 밖으로 흐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참 멋스러웠다.

남자는 오로지 월령안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월령안이 불현듯 이를 느끼고 고개를 들어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육장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는 목소리마저 듣기 좋았다. 저음에다 중후하기까지 했지만, 내뱉은 말은 몸서리치게 차가웠다.

‘내가 누구냐고?’

월령안은 순간 멍해졌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놀란 눈으로 육장봉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저는 월령안이라고 합니다.”

월령안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다. 눈물에 씻긴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났다.

육장봉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놀라움과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어린 시절의 만남도, 삼 년 동안 부부의 인연도 있었는데. 이렇게 마주 보고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정말 우습고도 슬펐다.

“월령안이라? 삼 년 전 육씨 가문에 시집왔던 월령안인가?”

육장봉은 말 등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과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월령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 바로 저입니다.”

월령안은 눈물을 닦아내고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설령 육장봉이 자신을 버렸다 해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월령안이 당신 육장봉의 배필로서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무슨 일인가?”

육장봉의 오관(五官)은 칼로 조각한 듯 날카로웠다. 귀밑머리마저 칼로 베어낸 듯했다. 당시 변경(汴京)에서 유행했던 풍류스럽고, 준수하며 부드러운 남성상과는 달랐다. 육장봉에게는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노련함과 강인함이 있었다.

깊이 있는 사내였다.

“당신은 조금 전 저를 버렸어요.”

월령안은 손에 쥔 이혼장을 들어 보이며 담담히 마주했다.

차가우면서도 준수하고, 자신감과 호기로 가득 찬 절세의 영웅. 그가 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처음 한 일은 바로 그녀를 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얼굴 한 번 볼 생각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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