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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화 (68/68)

외전 5화

‘정말 상황만 딱 설명해서 보내시는군.’

보낸 이의 이름이 없는 작은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휼이 피식 웃었다.

오로지 휼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어린 날 함께 정했던 암호로만 짤막하게 적은 편지의 발신인은 다름 아닌 언이었다.

‘큰아이가 벌써 7살이라니. 세월 한번 지독하게 빠르구나.’

언을 살렸던 그날 이후로 휼은 언을 찾지 않았다. 언 역시 궁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서로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둘의 약조였다.

하지만 언은 상선을 통해 이렇게 은밀하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는 했다. 2, 3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연락이었지만, 휼에게는 이마저도 소중했다.

‘이 자리가 얼마나 지독하게 외로운 자리임을 아시니 이리하시는 것이겠지.’

언의 걱정과 달리, 휼은 너무나도 완벽한 군주가 되어 조선을 통치했다. 말 그대로 태평성대였다. 어디 하나 모자란 곳이 없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행복한 만큼 휼의 외로움은 깊어졌다.

왕이라는 자리는, 군주라는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언은 그 무게를 잘 알았고, 부디 그의 아우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수 있길 바라며 마음을 전했다.

‘이리 정이 많으시면서 그리 매정한 척 굴려 하셨으니.’

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촛불에 서찰을 갖다 댔다. 작은 불꽃이 순식간에 종이를 삼켰다.

‘계속 그리 행복하십시오, 형님.’

* * *

“으아앙!”

“정아. 뚝! 울면 안 돼에!”

“그래, 정아. 뚝!”

막내 주위에 모인 누이와 오라비가 안쓰러운 얼굴로 아이를 달랬다.

“정아. 어찌 그리 울어. 또 언니와 오라비를 따라 학당에 가고 싶다고 우는 게야?”

“으아앙! 나도! 나도오!”

울음소리를 듣고 규연이 달려오자 아이가 더 서럽게 울었다.

언과 규연이 재회한 지 어언 7년이 흘렀고, 둘은 세 아이의 부모가 됐다.

7살 난 큰딸이 서연, 5살인 아들이 서호, 갓 3살이 된 막내딸이 서정이었다.

“우리 정이는 학당에 가려면 아직 몇 밤 더 자야 한단다. 오라버니도 올해가 되어서야 갈 수 있었잖니.”

“그치마안…….”

규연이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꾹 참으며 정이를 달래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언이 막내를 안아 들었다.

“아부지!”

유난히 언을 더 따르는 정이가 젖은 눈을 반짝거리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언은 작은 등을 토닥이면서 아이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정이가 눈물을 거두고, 어딘가 뿌듯한 얼굴이 되어 언에게 폭 안겼다.

아이가 진정되자 한시름 놓은 규연이 곧바로 다른 두 아이를 살폈다.

“돌아오는 길에 딴 길로 새면 안 돼. 약조하거라.”

“네에!”

대장간에서 키우는 개가 낳은 새끼를 보러 가겠다며 말도 없이 사라져 속을 태운 게 일주일 전이었다.

규연은 두 아이를 붙잡고 몇 번이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제가 누님 손 꼭 잡고 잘 데려올게요!”

“내가 네 손을 잡고 데려오는 거지! 그쵸, 어머니?”

아웅다웅하는 남매를 보며 규연이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첫째인 연이는 언을 똑 닮게 태어났으나 규연의 성정을 닮았고, 둘째인 호는 규연과 똑같이 생겼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를 빼닮았지만, ‘작은 언’이라는 말이 딱 맞게 그와 성격이 똑같았다.

그에 비해 막내인 정이는 둘을 반반씩 닮은 외모에 누구를 닮은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녀만의 성격을 타고났다.

세 아이가 이렇게 다르니, 아이들을 보다 보면 정신없이 하루가 갔다. 하지만 둘을 닮은 아이들은 언과 규연에게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안겨 주었다.

“다녀오겠습니다아!”

“아버지는 그냥 지나치려고? 어디 서운해서 살겠느냐.”

“아이, 아버지도 참! 얼른 이리 오세요!”

아이들이 규연에게만 뽀뽀하고 떠나려 하자 언이 한껏 앓는 소리를 냈다.

연과 호는 까르르 웃으며 언의 볼에도 입술 도장을 찍고는 신이 나게 학당으로 뛰어갔다.

언의 품에 안겼던 정이는 그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매일 겪는 아침인데 왜 매번 정신이 없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규연이 겨우 한숨 돌리며 중얼거리듯 이야기하자 언이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복작복작하고 즐거운, 소중한 일상이었다.

* * *

“잘 때는 이리도 얌전한데.”

아이들을 다 재운 규연이 웃으며 말했다.

함께 세 아이를 재운 언 역시 무척이나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잠들었으니 이제 내가 부인을 독차지해야겠습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언은 규연의 허리를 감싸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독차지해 무엇 하시려고요?”

“할 거야 많지요.”

의미심장한 말에 규연이 살짝 눈을 흘겼다.

“아이들은 지산댁이 잘 봐 줄 겁니다. 그러니까 부인은 이제 내게 집중하세요.”

언은 갈 곳이 있다며 규연의 손을 꼭 잡고는 저택 밖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어디로 가시는 건지 말씀 안 하실 거예요?”

“가 보면 압니다.”

규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언을 따라 걸었다. 그가 이렇게 비밀스럽게 행동하면, 항상 그 뒤에 예상치 못한 선물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준비했기에 이리 신이 난 건가 싶어 규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세상에.”

“오늘이 은하수가 가장 또렷이 보이는 날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부인에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저택 뒤에 있는 작은 동산에 오른 순간, 규연은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운 은하수가 새까만 밤하늘 위를 빼곡히 수놓고 있었다.

“오늘 날이 흐릴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언은 정말 다행이라며 크게 안도했다. 흐리거나 비가 올까 봐 걱정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규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다가가 먼저 입을 맞췄다.

언제 닿아도 달콤한 입술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간질거리던 입맞춤이 점점 더 깊어졌다.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언과 규연의 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세 아이의 부모라 하면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볼 정도였다.

“부인과 나를 보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데, 아이들을 보면 하루가 반토막 난 것처럼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아 이상합니다.”

“어쩜 저렇게 빨리 크는지 모르겠어요. 뒤돌아보면 그새 또 자란 것 같다니까요.”

“조금만 더 천천히 자라주면 좋을 텐데.”

언의 말에 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이었다.

“심지어 어제는 연이가 혼인하는 꿈을 꿨습니다.”

“연이가요?”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어찌나 이상하던지.”

“울진 않으셨고요?”

“……울 뻔했습니다.”

규연이 소리 내 웃으며 언을 바라봤다.

“그대는 그리 웃음이 나옵니까? 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그럴 게 무엇 있어요. 언젠가 일어날 일인걸요. 그저 좋은 사람을 만나서 우리처럼 잘 살기를 바라야지요.”

“하…….”

딸의 결혼을 떠올리기만 해도 착잡하다는 듯, 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규연은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이 낭군을 바라보면서도 그를 달랬다.

“아이들이 혼인하는 게 그리 싫으세요?”

“싫다기보다는……. 사위를 들이기 싫습니다.”

“며느리는 괜찮고요?”

“호는 날 닮았으니 분명 좋은 여인을 데려올 거예요. 부인만 한 여인은 없으니 그에 견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훌륭한 제 짝을 찾아올 겁니다.”

“저보다 좋은 여인을 만나야지요. 한데 그러면 호는 믿고 연이랑 정이는 못 믿으시겠어요?”

“연이와 정이는 믿지. 사내들을 안 믿는 겁니다. 사내들 속이 얼마나 시꺼먼데.”

“그럼 당신도요?”

“나도 그렇지요.”

언은 조금도 부정하지 않으며 규연에게 입을 맞췄다. 이전과 온도가 다른 입맞춤이었다.

밭은 숨을 이겨내지 못한 규연이 언을 밀어내고서야 가까스로 틈이 생겼다.

“정말…….”

“이러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사내를 멀리하라고 맨날 이야기해 두어야겠어요.”

언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하게 다짐했다. 규연은 고개를 젓고는 밤하늘에 펼쳐진 별의 향연을 눈에 아로새겼다.

“아름답지요?”

“너무나도요. 정말 너무나 아름다워요.”

“내 눈에는…….”

“부인이 더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려거든 그만 하세요. 하도 들어 귀에 못이 박히겠습니다.”

“사실인 걸 어떡합니까?”

능청스러운 대답에 규연이 또 웃고 말았다.

언은 늘 규연을 미소 짓게 했다.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건네며 웃게 하고, 뜨거운 사랑을 속삭이면서 웃게 하고, 누군가를 연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벅찬 것인지 깨닫게 해 웃게 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이제 언이 없는 삶은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가끔 무섭습니다.”

“무엇이?”

“이리 행복해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규연은 가끔 진심으로 두려웠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행복하고 아름다워서, 이 행복을 잃었을 때 삶을 이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렇게 영원토록 행복할 테니까.”

“어찌 그리 자신하십니까?”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니까요.”

조금의 흔들림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규연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규연은 언을 믿었다. 그는 분명 지금의 행복을 지킬 사내였다.

“연모합니다, 부인. 이 세상 무엇보다도요.”

“저도 연모해요. 당신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많이요.”

몇 번을 들어도 또 듣고 싶은 고백이 오가고, 잠시 멀어졌던 입술이 또 한 번 서로를 찾았다.

〈외전 完〉1664590659317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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