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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화 (67/68)

외전 4화

“오랜만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이경이 바로 뒤로 돌았다.

초록색 쓰개치마가 벗겨지고, 반가운 얼굴이 드러났다.

“오랜만입니다, 자가.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자가라니요. 그 자리에서 물러난 게 언제입니까. 그리 부르시면 큰일 납니다.”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서혜였다.

언이 자리에서 물러나 사약을 받을 때, 서혜 역시 폐비되어 궁 밖으로 나갔다.

본래라면 비구니가 되어야 했으나 그전에 자결한 것처럼 꾸며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로 만들어 냈다.

언과 같은 방식이었다. 궁으로 들어올 때, 언이 서혜에게 약조했던 것이기도 했다.

“아……. 송구합니다. 습관이 되어 그만.”

“공대하지도 마십시오. 이제 저보다 한참 높으신 분이십니다, 대감마님.”

이경은 대사헌 자리에 올랐다. 나이가 워낙 젊은 데다가 파격적인 인사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지만, 휼은 단호하게 뜻을 관철했다.

“하면 나도 공대하지 않을 테니 서혜 너도 이전처럼 오라버니라 부르거라. 이런 자리에서까지 대감마님으로 불리고 싶지 않구나.”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고, 원체 일을 잘해 더 이상 잡음도 없었지만, 퇴청 후에 만난 오랜 벗에게까지 대사헌 대감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이경의 청에 서혜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놀라움, 기쁨, 그리고 씁쓸함이 뒤섞여 쉬이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하겠습니다, 오라버니.”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이경이 환하게 웃었다. 서혜는 멍하니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경이 잠시 옥사에 갇혀 있을 때, 서혜는 꼭 전할 말이 있으니 탈 없이 돌아와 그녀를 만나 달라 청했다.

서혜가 청했던 대로 이경이 무사히 돌아왔으나 둘 다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서혜는 새로 만든 신분과 자리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이경 역시 휼과 함께 조정을 살피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순식간에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마저 지나 새봄이 오고 나서야 이렇게 서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간 어찌 지냈느냐?”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지냈지요. 제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찬찬히 돌아봤습니다. 험하지 않은 시대에 홀로 의적으로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다른 아녀자들처럼 살기에는 원체 좀이 쑤셔서 말이지요.”

“규방에 얌전히 앉아 있는 네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긴 하지.”

이경이 장난스레 웃으며 덧붙였다.

서혜는 그를 따라 옅게 웃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성정임에도 당신이 나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규방의 얌전한 마님이 될 수 있었는데.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안채에 갇혀 사는 여인이 될 수 있었는데.

차마 뱉지 못한 말이 유달리 쓰게 남았다.

“오라버니께서는 어찌 지내셨습니까? 듣자 하니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혼담이 쏟아진다고 하던데요.”

“……네 귀에 들어갈 정도로 소문이 났더냐.”

“한양 땅에 모르는 자가 없을 겁니다.”

혼담 이야기가 나오자 이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받아들이지 않으십니까? 늦으셔도 한참 늦으셨습니다.”

“그냥……. 일이 워낙 바쁘지 않더냐. 한 가정을 꾸리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기도 하고.”

“잊지 못하셔서 그런 건 아니고요?”

이경은 깜짝 놀라며 서혜를 바라봤다. 서혜가 규연을 향한 그의 마음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내 서혜가 얼마나 영민하고 눈치 빠른 여인인지 되새기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시선을 내린 채 얼마 전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마마?〉

도깨비불이 피어나는 날이었다. 과로로 요절해 대사헌을 잃을 수는 없으니 제발 퇴청하라며 휼의 축객령을 받았던 날이기도 했다.

흥을 깨지 말고 잘 섞여 돌아가라며 내민 가면을 대충 눌러쓰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데, 그 길에서 익숙한 형상을 마주쳤다.

벚꽃이 만개한 돌담 앞에 언과 규연이 있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이경이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충성을 바치며 존경했기에 차마 연적으로 돌아설 수 없었던 주군과 오랜 시간 온 마음을 바쳐 연모했던 여인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맞구나. 두 분이 맞아.〉

둘은 활짝 웃으며 무어라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유달리 밝은 달빛 아래 벚꽃이 휘날리고, 그 안에서 환히 웃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이 꼭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차마 이경이 끼어들 수 없는 완연하고 꽉 찬 행복이 그를 압도했다.

〈……놓아 드릴 수 있겠구나, 이제.〉

참 신기하게도, 그 행복을 마주한 순간 이경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미련이 전부 씻겨 내려갔다.

일이 모두 해결되어 언과 규연이 재회했음에도 온전히 떨쳐 내지 못했던 그리움이, 정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저 규연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언의 품에서 끝없는 사랑을 느끼며 환히 웃기를 바라는 마음만 남았다.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이경은 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끝까지 바라보며 그저 빌고 또 빌었다.

부디 행복하기를. 한없이 괴롭던 시간을 이겨 낸 만큼 마냥 기쁨만 가득하기를.

“마음이라는 게 쉬이 접히지 않지요. 참 잔인하게도.”

이경이 침묵하며 생각에 잠기자 이 뜻을 오해한 서혜가 씁쓸해하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깨어난 이경이 서혜를 바라봤다.

“꼭 절절한 사랑을 해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해 보았지요. 아주 긴 시간 동안 한 사람만 좋아했으니까요.”

“정말? 네가 좋아하는 사내가 있었다고?”

“그게 그리 놀랄 일입니까?”

“전혀 몰랐으니 하는 말이지. 게다가 네 눈이 좀 높더냐. 그 사내가 대체 누구야?”

전혀 몰랐다는 이경의 말에 서혜가 또 한 번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해는 했다. 이경은 주위를 둘러보지 못할 만큼 규연에게 깊이 빠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혜의 마음에 남은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서 말해 보라니까. 궁금해 죽겠다.”

“들으면 놀라실 텐데요.”

“누구길래?”

“오라버니요.”

서혜의 대답에 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꼬리에 매달려있던 장난스러운 미소도 사라졌다.

“네가 말하는 오라버니가…….”

“예. 지금 제 앞에 계시는 대사헌 대감이요.”

이경은 얼이 빠진 얼굴로 서혜를 바라봤다.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기억하세요? 오라버니가 옥사에 갇혔을 때, 무사히 돌아와 저를 만나 달라 청했던 것을요. 이 말을 전하려고 그리 청했습니다.”

“서혜야, 나는…….”

“마음을 받아 달라 고백한 게 아닙니다. 이제 와서 알아 달라고 청한 것도 아니고요.”

서혜는 단호하게 이경의 말을 잘라냈다.

“새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완전한 새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

“지난 시간 품어 왔던 많은 것들을 이곳에 다 묻어 두고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하는 거예요. 이렇게 털어놓아야 후련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애달픈 미소가 서혜의 얼굴 위로 번졌다.

“이기적이라 욕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심술이라 생각하세요. 홀로 아주 긴 시간 오라버니만 바라보며 살아왔던 제가 부리는 괜한 심술이라고요.”

“서혜야.”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듣고 싶은 대답은 없으니까요. 오라버니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요.”

이경과 서혜의 시선이 한참을 맞닿았다. 이경의 눈에는 혼란이 가득했고, 서혜의 눈에는 차분한 체념이 보였다.

“……떠난다는 건 무슨 말이더냐.”

“청으로 갈까 합니다. 쉬면서 상단에 있는 벗의 일을 조금 도왔는데, 그곳에서 함께 일하자며 손을 내밀었어요. 상단주가 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더군요.”

서혜는 찬찬히 그녀의 계획을 전했다.

“오라버니도 제 수완과 배짱을 알지 아십니까. 생각해 보니 적성에 딱 맞겠더군요. 청으로 넘어가면 당분간 괜한 일에 휘말릴 걱정도 없고요.”

“…….”

“해서 몇 년간 나가 있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오라버니와는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되겠네요.”

마지막이라는 말이 서혜의 마음에 콕 박혔다.

모든 감정을 추스른 척 덤덤하게 전하고 있었지만, 사실 서혜의 연심은 조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마음이라는 게 참 쉬이 접히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 이경이 아니라 서혜 자신에게 건네는 자조였다.

‘몸이라도 멀어지면 그래도 낫겠지요. 분명 털어 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오라버니께서도 부디 앞으로 나아가실 수 있길.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하는 행복이 오라버니에게도 찾아가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차마 전하지 못하는 절절한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서혜가 쓰개치마를 올려 썼다.

“네가 다시 돌아올 즈음에 조선은 분명 더 아름다운 곳이 되어 있을 거다. 지금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리하겠지요. 오라버니께서 무척 애쓰고 계시니까요. 그리되리라 믿습니다.”

“네가 그렇게 변한 조선에 다시 도착했을 때, 내가 마중 나오마. 그러니 마지막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무슨 뜻으로 전하는 것인지조차 모호했다. 서혜는 목소리의 떨림을 겨우 감추며 이경에게 말을 건넸다.

“마음을 받아 달라 전한 이야기가 아니라니까요.”

“안다. 잘 알아. 하지만 친한 오라비이자 벗으로서 너를 기다릴 수 있지 않으냐.”

이경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영 잊을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잊게 되더구나. 참 신기하게도.”

규연을 잊었다는 말에 서혜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미안하다. 네가 그리 오래 마음을 품어 왔는데 알아차리지 못해서. 이리 아프게 고백하게 해서.”

“…….”

“내게 너무나도 과분한 여인임을 알아.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훌륭한 여인이라는 것도. 그러니 네가 말한 대로 이곳에 다 묻어 두고 새로 출발할 수 있을 게다. 분명히.”

참 이경다운 대답이었다. 끝까지 다정해서 서혜의 마음을 흔들고 마는, 완벽하게 이경다운 대답.

“오라버니. 떠나는 김에 한 가지만 청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만약 제가 돌아왔을 때 오라버니의 곁이 비어 있으면. 그리고 제가 오라버니와 달리 이 미련한 마음을 치워 내지 못하면.”

이경만큼이나 서혜 역시 서혜다워서, 건네려는 말이 얼마나 바보 같고 미련한 것인지 알면서도 입을 막지 못했다.

“그때는 제가 오라버니의 곁을 욕심내게 해 주세요.”

대답은 듣지 않았다. 서혜는 말을 전하자마자 몸을 돌려 이경에게서 도망쳤다.

이경이 서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서혜가 배 위에 올랐다.

그리고 3년. 정확히 3년이 흘렀다.

* * *

“장담했던 그대로네. 아름다워졌어.”

배에서 내린 서혜는 피식 웃으며 감상을 내뱉었다.

3년 새에 조선 최고의 상단주 자리를 꿰찬 서혜의 얼굴은 훨씬 여유롭고 또 평화로웠다.

지난 시간 동안 이경과는 연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위치를 알아낸 건지 서혜에게 서찰이 올 때가 있었지만, 답장하지 않았다.

‘참 미련하지. 이 긴 시간이 흐르고도 마음이 남아 있다니.’

참 우습게도, 몸이 멀어지고 상황이 달라져도 서혜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청했던 그날과 달리, 지금의 서혜에게는 그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이경을 찾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곁에 다른 여인이 있는 모습을 보고 나면 정말 버티기 힘들 것 같아서.

“……오라버니?”

그런데 배에서 내리자마자 너무나도 그립던 사내의 형상이 서혜를 맞이했다.

“어찌…….”

서혜는 뻣뻣하게 굳어 멍하니 이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사내다운 분위기가 더욱 깊어져 있었고, 이전보다 더 훤칠했다.

이경 역시 조금 놀란 듯이 서혜를 바라보다가 이내 늘 그녀의 마음을 녹이던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아름다워진 건 조선만이 아닌 것 같구나.”

그의 인사를 들은 순간, 서혜는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하는 행복이 자신에게도 찾아올지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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