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아직도 그리 불안하세요?”
“네. 불안합니다.”
“의원도 몇 번이고 확인해 주었는걸요. 그리 불안해하지 마세요. 정말 별일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산달까지 아직 넉 달이나 남았잖아요.”
규연이 언의 손을 꼭 잡으며 속삭이자 결국 언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과 규연 사이의 승패는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규연의 승리였다. 규연이 굳이 이렇게 애교 섞인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랬다.
그러니 지금처럼 살갑게 다가와 눈을 맞추며 청하면, 언은 그저 속절없이 녹아내리며 규연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배가 당기면 내게 말해야 해요. 절대 참지 말고요.”
“그럴게요.”
규연이 싱긋 웃으며 답하자 언이 졌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언이 이토록 걱정하는 이유는 그와 규연이 잠시 한양에 들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머무는 저택에 자리 잡은 뒤, 언과 규연은 한양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실제로도 욕심이 없었다.
그런데 항상 5월에 열리던 ‘도깨비불이 피어오르는 날’이 4월로 앞당겨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4월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달이었고, ‘도깨비불이 피어오르는 날’은 모두가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며 신분과 정체를 감출 수 있는 날이었다.
규연에게는 절호의 기회처럼 느껴졌다.
오래전부터 언과 함께 보고 싶었던,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돌담 위의 벚나무를 볼 수 있는 기회.
‘휼이 빠르게 조정을 장악해 잡음도 나오지 않고 있으니 별다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어. 규연의 몸 상태가 문제지.’
왕위를 물려준 휼은 언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왕의 임무를 잘 해냈다.
빠르게 혼란을 수습한 것은 물론, 언이 맺어 놓은 여러 열매를 모두 거두어 적재적소에 쓰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언의 그림자를 너무나도 훌륭하게 지워 내는 중이라 그와 규연이 도성으로 간다고 한들,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 벌어질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다만 규연이 문제였다. 규연은 물론이고 의원마저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언했지만, 언은 자꾸만 규연이 걱정됐다.
아이를 갖고 난 뒤부터는 규연이 걸어 다니기만 해도 혹시 어디 부딪치지는 않을지 염려되어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심지어 입덧조차 언의 몫이었다.
규연은 극성도 이런 극성이 없다며 학을 뗐지만, 언은 이럴 수밖에 없다며 억울해했다.
누구보다 고운 여인이 그의 아이를 품고 있는데 이렇게 행동하는 게 당연했다.
“많이 변해 있을까요?”
“그럴 겁니다. 백성들의 숨통이 트이고 있을 테니까.”
“서방님이 일군 땅에서 맺힌 열매를 확인하러 가는 길도 되겠네요.”
넌지시 전해진 말에 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몇 번이나 말했듯이 그대의 몸이…….”
“제발요. 귀에 딱지가 앉겠습니다. 꼬물이도 아버지가 너무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언이 또 한 번 규연에게 당부하려 하자 규연이 질색하며 아이까지 끌어왔다.
언은 장난스레 웃으며 제법 부푼 배에 입을 맞췄다.
* * *
“서방님?”
“왜 그리 놀랍니까. 손을 처음 잡아 보는 것도 아니면서.”
“그거야 우리 둘만 있을 때나 그렇지요. 이 저자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렇게 남사스럽게 굴면 사람들이 욕합니다. 다 쳐다볼 거예요.”
“아무도 안 봅니다. 주위를 보세요. 다들 정신이 팔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낭군이 아내 손 좀 잡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혼인 안 한 도령과 규수도 아닌 것을.”
규연은 헛웃음을 지으며 눈을 흘기면서도, 언이 꽉 잡은 손을 치워 내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 언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규연의 부드러운 손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제가 지금껏 보았던 도깨비 날 중에 사람이 제일 많은 것 같아요.”
“내가 느끼기에도 그러합니다. 또 가장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요.”
언의 말에 규연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나도 밝았다. 가면으로 대부분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그 기운이 느껴졌다.
엉망이 되어 얼룩졌던 나라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훌륭하구나, 휼아. 정말 대견해.’
언은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무 무거운 짐을 물려주게 된 것이 아닌가 염려했지만, 잘 해내고 있는 듯해 마음이 놓였다.
“혹, 아쉬우십니까?”
언을 바라보던 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은 것들이 생략된 질문이었지만, 언이 그 뜻을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했다.
규연은 언의 이상이 무엇인지, 그가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좋은 나라를 꿈꿨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다 보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군주의 자리를 포기한 것이 혹시 아쉽지는 않은지 마음이 쓰였다.
“전혀요. 정말 조금도 아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이를 부정했다.
“내게 주어진 역할은, 그리고 내가 해낼 역할은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상은 조금도 바라지 않았어요.”
“하면 억울하지는 않으십니까.”
환부를 끌어안고 함께 도려졌다. 이 내막을 모르는 자들의 붓은 언을 지독한 폭군으로 기록했고, 이로 인해 언은 역사 속에 영원히 폭군으로만 남을 터였다.
“억울하지 않습니다.”
“조금도요?”
“조금도요.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입니다. 역사가 나를 그리 기억한다고 해도, 내게는 부인이 있고 또 우리 아이가 있으니 아무 상관 없어요.”
혹여 규연이 미안해할까 봐 걱정되어 꾸며내는 말이 아니었다. 분명한 진심이었다.
이토록 사랑하는 여인이 그의 곁에 있고, 그 여인과 자신을 닮은 아이가 곧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지금, 세상이 언에 대해 무어라 수군거리든 알 바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보물이 내 곁에 있는데 그딴 것들이 무슨 소용이랍니까.”
따뜻한 고백에 규연이 싱그럽게 웃으며 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럼 이제 갈까요?”
“제가 어디로 데려가려 하시는지 아세요?”
“어찌 모르겠습니까. 부인이 내게 그 벚꽃을 얼마나 보여 주고 싶어 하는지 아는데.”
아직 말하지 않은 행선지를 알아챈 언을 보며 규연이 살짝 입을 벌렸다.
그러다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고는 그와 함께 돌담길로 향했다.
* * *
“와…….”
돌담길 위를 수놓은 벚꽃의 향연을 마주한 순간, 언은 그도 모르게 소리 내 감탄했다.
“왜 제가 서방님과 함께 이곳에 오려 했는지 아시겠지요?”
규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도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물론, 그대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대체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어디서 자꾸 배워 오시는 겁니까?”
“배워 오다니요. 그대가 그만큼 아름다워서 보자마자 튀어나오는 겁니다.”
규연은 두 팔로 어깨를 감싸고는 과장되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의 낯간지러운 말을 견디기 힘들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귀여운 장난에 피식 웃은 언은 다시 만개한 벚꽃을 눈에 담았다.
“그때도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나 때문에 그대가 더 마음 쓰지도 않고요.”
“대신 이렇게 같이 보게 되었잖아요. 그러니 됐습니다.”
규연이 처음 말을 꺼냈던 과거부터 함께 볼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그때부터 온전히 연을 맺을 수 있었더라면.
의미 없는 가정임을 알지만,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더 일찍 찾아왔을 행복임을 알기에 괜히 입이 썼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조정 상황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꼬물이가 태어나고 나면 한동안은 찾아올 수 없을 테니까 그전에 꼭 찾아와 함께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나마 아이에게도 보여 주고요.”
언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워요. 조금 무리한 부탁이었는데도 들어주셔서요.”
“무리하다니요.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부인이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거예요.”
“이러다 이제 별도 따 오신다고 하시겠습니다.”
“따 올까요?”
규연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으며 언에게 안겼다.
“혹시 요즘도 내가 떠날까 봐 불안합니까?”
“아니요.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항상 제 곁에 계실 걸 아니까요. 다만 다른 게 불안합니다.”
“다른 것이라니?”
“제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불안해요.”
짙은 한숨이 규연에게서 새어 나오자 언이 곧바로 그녀와 눈을 맞췄다.
“부인은 이 조선 땅에서 가장 훌륭한 어머니가 될 겁니다.”
“또 과장하십니다.”
“과장이 아니에요. 자신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요?”
“그대는 사랑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그 사랑을 어떻게 전하는지도요.”
입바른 소리가 아니었다. 언은 정말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 단단한 신뢰는 순식간에 규연의 불안함을 지워 냈다.
언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그의 거대하고 단단한 사랑은 항상 파도처럼 밀려와 규연의 두려움과 불안함을 씻어냈다.
“불안해해야 하는 건 납니다. 못난 아버지가 될까 봐 얼마나 걱정하는데요.”
“그럴 리 없는걸요. 어찌 그리 쓸데없는 걱정을…….”
“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가 그리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잘 해낼 겁니다.”
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배 속의 아이가 움직였다. 규연은 웃으며 언의 손을 제 배 위로 가져다 댔다.
“꼬물이가 맞다고 대답하는 것 같아요.”
“역시. 누굴 닮았는지 벌써 똘똘하네요.”
둘 사이로, 아니 셋 사이로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언은 규연을 안심시키듯,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봄밤의 따뜻함을 닮은 입맞춤이었다.
흩날리는 벚꽃과 함께 수 놓이는, 마냥 따뜻하고 아름다운 입맞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