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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65/68)

외전 2화

“……어?”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뜬 규연이 휑하니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원래대로라면 언이 규연을 꼭 끌어안은 채로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아도 언이 보이지 않았다. 침방 어디에도 그가 없었다.

‘어디 가셨지? 이 시간에 나를 홀로 두실 리 없는데.’

순식간에 잠기운이 달아나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언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연인을 영영 잃을 뻔했던 과거는 지독한 두려움이 되어 규연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언이 살아 돌아온 지가 어언 넉 달이 되었고, 여름을 지나 가을의 초입에 닿아 있는데도 그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부인?”

당장 밖으로 나가 살펴야겠다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언이 침방 안으로 돌아왔다.

“악몽을 꾼 겁니까? 안색이 어찌 이리 파리하단 말입니까.”

그는 하얗게 질린 규연을 보자마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서둘러 규연의 곁으로 다가온 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살폈다.

“부인!”

언이 다가오자 규연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언은 규연을 끌어안고는 그녀가 제 품에 기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떤 꿈을 꾸었기에 이리 운단 말입니까. 다 괜찮습니다. 그냥 꿈이에요.”

“악몽을 꾼 게 아닙니다.”

악몽이 아니라는 말에 언의 눈이 커졌다. 그는 놀란 얼굴로 연유를 물었다.

“서방님이 사라지신 줄 알고……. 아침에 제 곁을 비워 두신 적이 없으니까…….”

언은 그제야 제 잘못을 깨달았다.

‘시간이 제법 지나 많이 나아진 줄 알았건만. 나도 참 못난 지아비로구나.’

규연은 언의 부재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가 말없이 사라지거나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면 몹시 불안해했다.

깊은 상처가 만들어 낸 후유증이었다. 이를 잘 알기에 언은 최대한 규연 곁에 있으려 애썼다.

걸을 땐 항상 규연의 손을 잡고, 그저 가만히 쉴 때도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사연을 다 아는 정 상궁조차 참 너무들 하신다며 혀를 끌끌 찰 정도로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언이 이리 노력하고, 시간이 제법 흘러 그 불안감이 옅어졌노라 여겼건만.

규연의 마음에 남은 흉터는 사라지지 않고 그녀를 괴롭혔다.

“미안합니다. 그대가 깨어나기 전에 얼른 다녀온다는 것이 그만…….”

언은 규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달랬다.

“이 이른 아침에요?”

많은 이들이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규연이 살짝 젖은 눈가로 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가 눈을 떴을 때 바로 볼 수 있었으면 해서요.”

언은 그의 뒤에 던져 놓다시피 내려 두었던 꽃을 조심스럽게 규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슬이 맺힌 하얀 초롱꽃을 본 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화병이 비지 않았습니까. 한데 며칠 전에 부인이 그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게 기억나서요. 우리 정원의 꽃도 곱지만, 없는 꽃이 화병에 꽂혀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언이 꺾어 온 초롱꽃은 저택 근처의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이었다.

며칠 전 함께 거리를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한 꽃이었는데, 규연의 시선이 제법 오래 머물렀다.

하지만 시선이 닿았던 게 전부였다. 예쁘다고 소리 내 감탄하지도 않았고, 정원에 두고 싶다는 속내도 밝히지 않았는데, 언은 그 찰나의 시선 하나로 규연의 마음을 다 읽어 냈다.

쥐고 있는 초롱꽃은 언이 규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마음의 크기를 보여 주는 증표와도 같았다.

“혹시 마음에 안 들면 굳이 꽂아 놓지…….”

규연의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했던 언이 황급히 설명을 이어가려던 순간, 그의 말을 지울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규연의 얼굴 위로 피어났다.

숨을 멈추게 될 정도로 해사한, 누구든 홀려 버릴 수밖에 없는 절경과도 같은 미소였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있나요. 무척 마음에 듭니다. 영원히 지지 않고 화병에 꽂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눈물의 흔적을 지워낸 규연이 언의 품에 더 바짝 파고들었다.

“고마워요. 서방님께 큰 선물을 받았네요.”

“이게 큰 선물이라니. 나를 속상하게 하지 마세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규연은 씩 웃기만 했다.

“큰 선물이에요. 담겨 있는 그 마음이 커다라니까요.”

한없이 사랑스러운 말에 언이 규연에게 입을 맞췄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아침이었다. 다른 어떤 것도 더 바라지 않게 만드는, 너무나도 행복한 아침.

* * *

“나도 참 바보 같지. 그렇다고 그렇게 울어 버리면 어쩐담.”

언이 흑과 일을 보느라 잠시 홀로 남은 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화병을 장식하고 있는 하얀 초롱꽃을 보니 울고 말았던 순간이 떠올라 머쓱함이 밀려왔다.

어릴 때부터 늘 의젓하고 단단했던 규연이었다. 잘 우는 것도, 무른 것도, 그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언을 되찾고 난 뒤, 그의 앞에서는 자꾸만 어린아이처럼 굴게 됐다.

곁에서 멀어지지 말라고 청하고, 보이지 않으면 찾아 헤매고, 틈만 나면 그 품에 안겼다.

이제는 절대 언이 떠나가지 않고, 규연만 홀로 남을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끝도 없이 불안해하며 그에게 매달렸다.

“이러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어찌…….”

규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오늘같이 행동하지 말자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땅이 꺼지겠습니다, 마님.”

다과상을 들고 온 정 상궁이 웃으며 장난스레 덧붙였다.

언이 돌아온 뒤, 정 상궁 역시 호칭을 바꾸었다. 마마는 마님이 되었고, 정 상궁 역시 지산댁이 되었다. 

전하는 대감마님으로 바뀌었는데, 규연에게는 내가 왜 대감이냐며 고개를 저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쉽게 받아들였다.

규연이 무척이나 어처구니없어했지만, 언은 그런 적이 있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굴었다.

“염려되는 것이 있으세요?”

“아니. 그냥 내가 너무 어린아이처럼 군 것 같아서.”

“대감마님께요?”

“응. 그러지 않기로 했는데 왜 이러나 몰라.”

“원래 연심은 어른도 아이로 만들어 버리는 법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소인이 아는 대감마님이시라면 마님께서 그리 행동하실수록 좋아하실 테고요.”

정 상궁은 호호 웃으며 차를 따랐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기에 규연 역시 옅게 웃으며 말없이 찻잔을 바라봤다.

“품질 좋은 송화가 들어와 다식 맛이 무척 좋습니다. 마님께서 좋아하시는…….”

“우읍!”

“마, 마님? 괜찮으시어요?”

“아, 미안. 왜 갑자기 속이……. 윽!”

“마님!”

송화로 만든 다식은 규연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였다. 그런데 다식을 한입 베어 물자마자 속이 메슥거리면서 구역질이 났다.

은은한 단내가 갑자기 비리게 느껴진 탓이었다.

“마님. 혹시 마지막 달거리가 언제십니까?”

“응? 아, 그게…….”

사색이 되었던 것도 잠시, 정 상궁은 어딘가 짚이는 게 있다는 얼굴로 비장하게 물었다.

규연은 조용히 기억을 되짚다가 놀란 얼굴로 살짝 입을 벌렸다.

“얼른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다는 듯, 정 상궁은 들뜬 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 * *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별일 아니실 겁니다.”

언이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당을 거닐자, 보다 못한 흑이 제 주인을 달래려 애썼다.

그러나 지금 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규연의 상태를 보기 위해 의원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는데, 의원과의 대화가 길어지니 별의별 생각이 다 밀려들었다.

불안했고, 두려웠다.

흑의 말처럼 그저 별일 아니라 믿고 싶은데, 혹시 깊은 병이라도 들은 것이 아닐까 걱정되어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겨우 되찾은 여인이다. 겨우 품에 안은 여인인데 어찌…….’

규연을 잃는다 생각하면 온몸이 차게 식었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대감마님.”

“부인은? 부인은 괜찮은 겐가? 어서 말해 보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니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의원은 차분하게 뜻을 전했다. 그것마저 불안하게 느껴진 언은 누구보다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

그는 바로 규연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어떤 병이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반드시 치료법을 찾아낼 테니까요. 약재가 얼마나 비싸든, 얼마나 희귀하든, 다 상관없습니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릴 겁니다.”

아직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지 못하건만, 불안감에 머릿속이 새하얘진 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규연을 살릴 것이라며 그의 의지를 전했다.

그러자 규연이 언의 손을 제 배 위로 가져갔다.

“……부인?”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요? 그래서 저도 좀처럼 믿기지 않습니다.”

언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규연을 바라봤다.

“태동이 느껴지고, 배가 부르려면 아직 몇 달은 더 있어야 한대요.”

“그러니까……. 그대 말은 지금…….”

“회임이래요. 이 안에 우리 아기가 있고요.”

우리 아기.

두 어절로 된 짧은 말이 언의 심장을 때렸다. 불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기운이 사라지고, 넘치는 행복함과 기대감에 부푼 기운이 언을 휘감았다.

“혹시 아이가 싫으신가요?”

이야기를 듣고도 언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싫다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든 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부정하고는 규연을 꼭 끌어안았다.

“가슴이 너무 벅차서 말을 고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래요.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이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말이 아무래도 이 세상에는 없는 것 같아서.”

절절한 이야기에 규연이 소리 내 웃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언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 규연 역시 지금의 경이로운 행복을 도저히 말로 다 담아낼 수 없었다.

“꿈만 같습니다. 우리를 닮은 아이라니.”

“저도 그래요. 사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그대를 닮았으면 좋겠는데.”

“저는 서방님을 닮은 아이였으면 좋겠는걸요.”

“아이가 누구 말을 더 잘 듣는지 확인할 기회네요.”

장난스러운 말에 함께 웃던 것도 잠시, 언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흘러넘치는 행복과 사랑이 그대로 전해지는 입맞춤이었다.

“부인은 모를 겁니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처음 품었을 때부터 커다랬던 연심은 종종 두려워질 정도로 그 크기를 키웠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규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그조차도 신기해할 정도로, 평생을 약속한 눈앞의 여인이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웠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규연이 웃으며 대답하자 언은 또 한 번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사랑이 그득하게 묻어나는 입맞춤이 이어지는 동안, 언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부디 이 넘치는 행복이 깨지지 않기를. 지독한 고통과 시련을 딛고 찾아온 이 아름다운 시간이 그저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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