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차마 꿈꾸지도 못했던 재회는 끝없는 눈물을 자아냈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몇 번이고 끌어안아 온기를 나누고, 몇 번이고 눈을 맞추며 달콤한 밀어를 속삭였건만, 규연의 눈가는 마를 줄을 몰랐다.
“어찌 이리 웁니까.”
언은 규연을 제 위에 앉혀 품에 가두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좀처럼 믿기지 않아서…….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잔뜩 젖은 목소리가 언의 가슴을 헤집었다.
눈을 돌리면 언이 사라지고 만다는 소리를 들어 버린 양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도, 도포 자락을 꽉 쥔 간절한 손길도, 이를 타고 전해지는 떨림도, 전부 언의 죄였다.
죽어야 할 수밖에 없으니 놓아 달라 청하고, 기어코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만들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지요? 신첩이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지요?”
“환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분명한 현실이고, 나는 이리 숨 쉬고 있어요.”
“거짓이 아니지요?”
“참입니다. 맹세해요.”
규연은 떨리는 눈으로 한 번 더 언의 얼굴을 천천히 아로새겼다.
그녀가 느끼기에도 꿈이 아니었다. 닿아 오는 시원한 향도, 그에 대비되는 따뜻한 온기도, 그리워 죽을 것만 같던 이 눈빛과 손길도, 지독하리만큼 생생했다.
눈 감았다 뜨면 사라질 허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잠시 시선을 돌리면 사라질 것 같고, 손을 놓으면 떠나갈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이셔야 합니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이게 환상이라면 저는 더 이상은 버틸 수가…….”
규연이 차마 떨쳐내지 못한 불안함에 초조해할 때, 언이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가 부드러운 입술을 타고 규연에게 전해졌다.
달큼한 숨이 섞인 입맞춤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언은 부디 그의 온도가 규연을 조금이라도 더 달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대가 불안해하지 않을 때까지 입을 맞추라 하면 그리하겠습니다. 아마 그대보다 내게 더 큰 선물이 될 터이지만.”
농이 섞인 말이 닿고 나서야 규연이 살짝 미소 지었다.
언은 안심하며 규연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나는 이리 다시 만난 순간마저 그대를 울리고 마네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지독합니다.”
“그러니 평생 갚으셔야지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규연이 훨씬 편안한 표정으로 은은하게 웃으며 말을 잇자 언 역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요. 죽어서도 갚을 겁니다. 그리해야 겨우 갚을 수 있을 터이니.”
* * *
긴 시간 배어 있던 지독한 그리움은 그만큼 강렬한 열망이 되어 언과 규연을 휩쌌다.
죽었다던 언이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마자 불이 붙었다.
아찔한 열락만이 둘의 재회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언과 규연은 서로에게 매달리고 또 매달리며 뜨겁고 밭은 숨을 뱉어 냈다.
창밖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밖을 살필 여유 따위 없었다.
언은 규연의 온몸에 꽃을 피워 내기 바빴고, 규연은 언의 품에 갇혀 흔들리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규연이 까무룩 정신을 잃고, 이에 언이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다잡고 나서야 새까맣게 내려앉은 어둠을 알아챘다.
언은 곤히 잠든 규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을 품에 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건 언도 마찬가지였다.
눈 감으면 사라질까, 뒤돌면 흩어질까 염려되어 이렇게 내내 보고 있어도 애달픈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전하?”
시간이 지나 짙은 어둠이 어스름으로 변해 갈 즈음, 규연이 꼭 감았던 눈을 뜨고 언을 마주했다.
“언제 잠들……. 설마 전하께서는 한숨도 안 주무신 겁니까?”
“아까워서요.”
“아깝다니요?”
“눈을 감으면 그대를 못 보니까.”
절절한 고백에 규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규연은 차오르는 감정을 달래려 살짝 입술을 깨물며 언에게로 손을 뻗었다.
“…….”
“…….”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지던 손끝은 천천히 그의 얼굴 곳곳을 유영했다.
길고 깊은 눈매에 닿았다가 높은 콧대에도 머물고, 매번 근사한 호선을 만들어 내는 입술도 톡톡 건드렸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언이 피식 웃었다.
그는 제 얼굴에 닿았던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부드러우면서도 나른한, 그래서 묘하게 유혹적인 입맞춤이었다.
“죽는다고 생각한 순간, 정말 간절히 빌었습니다. 지옥에서 불타도 좋으니 다음 생에서 그대를 한 번만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요.”
언은 살짝 붉어진 규연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다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대의 청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나의 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절대 그 기회를 저버리지 말아 달라던 청이요.”
“…….”
“그대 곁에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지 알면서도, 내가 그대 가슴에 얼마나 커다란 못을 박았는지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어요.”
억지로 밀어내면서도 상처를 주고, 제발 살아남으라는 청도 들어주지 않은 채 떠나갔다.
규연에게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지 알기에 그저 한없이 작아졌다.
“받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전하를요?”
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언을 밀어내다니. 규연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규연은 살짝 눈을 흘기며 언에게 물었다.
“만약 제가 받아 주지 않고 밀어내면 어찌하려고 하셨어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그대 곁을 맴돌려고 했어요. 받아 달라고 감히 떼를 쓸 수 없는 입장이니까.”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은 규연이 언과 시선을 맞췄다.
“전하를 받아 주지 않고 밀어내는 법을 알았다면 궁에서부터 그리했을 겁니다.”
궁에서의 시간을 언급하자 언의 얼굴 위로 짙은 미안함이 번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비쳤다.
헛된 걱정을 품은 언을 향한 규연의 작은 심술이었다.
“신첩을 평생 사랑하는 벌을 기꺼이 받으신다 했으니 제 곁에 머무시면서 그리하세요. 도망가신다고 해도 제가 놓아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대가 나에게 질려 도망가려 하면 모를까, 나는 절대 그대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신첩이 도망간다 하면 그대로 놓아주실 건가요?”
“내가 죽도록 미워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다고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자신 없습니다.”
멀어지는 건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괴로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에 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규연은 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췄다. 그저 입술만 살짝 닿는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언을 활짝 웃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보다 해결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무엇이요?”
“호칭 말입니다. 나는 이제 주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마주하자 규연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갔다.
‘전하’라는 호칭은 위험해도 너무 위험했다. 누군가 들어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일이 모조리 꼬여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니 다르게 불러 보십시오, 부인.”
생경한 단어에 규연의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말이건만, 언의 낮은 목소리에 담겨 전해지니 괜스레 온몸이 배배 꼬이고 부끄러웠다.
“대, 대감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부인에 상응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규연도 잘 알았다. 그런데 차마 그 말을 뱉기가 쑥스러웠다.
“받은 직위도 없고, 이미 죽은 자이건만, 어찌 대감이라 할 수 있답니까.”
“하지만…….”
“지아비를 부르는 말이야 정해져 있는 것을.”
언이 은근히 압박하자 규연의 얼굴이 더 붉게 물들었다. 언은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일부러 더 놀리고 계시지요?”
“놀리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언은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고, 규연은 홍조가 번진 얼굴로 그를 흘겨봤다. 그러다 이내 크게 숨을 고르고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뱉어냈다.
“서방님이라 부르면…….”
“안 들립니다.”
짓궂은 말이 이어지자 규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언의 위로 올라탔다.
“안 본 새에 어찌 이리 짓궂어지셨습니까, 서방님?”
간질거리는 호칭에 언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규연이 사랑해 마지않는 근사한 호선이 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잊었나 본데 난 원래 이랬습니다. 게다가 그대가 이리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더 짓궂게 굴어야지요.”
“정말…….”
언은 그대로 규연을 끌어당겨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장난스럽던 입맞춤은 규연을 놓아주지 않는 언 때문에 점점 그 농도가 짙어졌다.
겨우 묶였던 옷고름이 스르르 풀어지자 규연이 언을 살짝 밀어냈다.
“전하. 이제 그만…….”
“서방님이라 부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전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그치듯 속삭이고는 또 입술을 훔쳤다.
순식간에 규연의 등이 금침에 닿고, 언의 입술이 규연의 목덜미를 괴롭혔다.
“연모합니다, 부인.”
온기가 열기가 되고, 숨이 점점 밭아지던 순간, 언이 규연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고백했다.
짧은 한마디를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진심에 규연이 웃으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 어떤 말로도 지금의 벅찬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는 탓이기도 했고, ‘서방님’이라고 한 번 더 불렀다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것이 훤해서기도 했다.
규연은 언의 목을 두 팔로 감아 더 바짝 매달리며 그녀의 마음을 전하고 또 전했다.
부디 언젠가는, 낯간지러워하지 않으며 서방님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