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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63/68)

63화

* * *

“마마. 한 숟가락이라도 드셔야 합니다. 이리 간청드리옵니다.”

“누가 마마더냐. 왕이 없는 중전이 있더냐.”

정 상궁은 가슴이 미어진다는 듯, 서글픈 낯으로 규연을 바라봤다.

궁이 발칵 뒤집힌 소식은 보성사로도 금방 흘러들어 왔다. 상평 대군이 폭군을 쫓아내 왕위에 오르고, 수많은 부정을 저지른 영의정과 그의 무리는 능지처참해 부관참시하고, 그들과 함께 한 폭군 역시 유배지에서 사약을 들이켜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거사가 성공했다는 기쁨은 없었다. 안도는 스쳤으나 그뿐이었다.

규연은 그날 언을 잃게 되리라는 미래를 확인한 것과 같았고, 소식을 듣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뒤로는 계속 식음을 전폐했다. 정 상궁이 온갖 죽을 끓여 와 갖다 바치고 제발 드셔야 한다며 앞에서 울고불고 떼도 써 보았지만, 공허하게 텅 빈 눈은 좀처럼 이전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흐른 지가 벌써 아흐레였다. 거처를 옮기고, 이런저런 변화가 생겼는데도 똑같았다.

“마마. 이리 계시는 건 전하께서도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정 상궁이 언의 이야기를 꺼내자 규연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젠 정말 흐를 눈물이 남지 않았을 법도 한데, 규연은 언이 떠오를 때마다 울었다.

〈어디로 가야 한다 했습니까?〉

〈전하께서 미리 마련해 두신 집이 있습니다, 마마. 이제 보성사는 위험합니다. 한양 밖이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전하께서 직접 골라 두신 곳이니 이제 그곳에 머무셔야 합니다.〉

〈집까지 봐 두셨답니까.〉

이경이 거처를 옮겨야 한다며 찾아온 날, 규연은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니 무조건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에 결국 가마 위로 오른 날, 언이 준비했다는 집에 도착한 규연은 대문을 넘자마자 무너져 내렸다.

〈아…….〉

사방이 꽃이었다. 그냥 꽃이 아니라, 규연이 좋아하는 꽃.

하얀 연산홍이 울타리인 양 정원을 삥 두르고 있고 장미와 작약, 벚나무까지 있었다. 작은 연못도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는 분홍색 수련이 피어 화사했다.

누가 봐도 언의 손길이 닿은 곳이었다.

잊으라면서. 그냥 잘 살아가라면서. 이렇게나 지독한 짓을 해 놨다며 규연은 울고 또 울었다.

“잠도 설치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무시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끼니마저 거르시면…….”

“꿈에라도 찾아오면 내가 잘 수 있을 텐데.”

규연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면 정말 미친 사람처럼 자기만 할 텐데. 꿈에서 볼 수 있으니까.”

숨을 내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서 그냥 잠에만 취하려 애쓰던 때가 있었다.

언이 떠나갔음을 알게 된 직후였는데, 그냥 무작정 누워 잠만 청했다.

그런데 몇 번이나 잠을 청하고, 몇 번이나 꿈을 꾸어도 언이 보이질 않았다. 아예 찾아오지 않기로 마음먹은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꿈에서도 만날 수 없음을 깨닫자 잠을 잘 필요도 없어졌다. 그래서 자지 않았다. 자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너무 야속하시지 않니. 꿈에는 들를 수 있을 텐데. 그것조차 싫으신 걸까.”

규연은 씁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꽃을 보는 것도 괴로웠다. 그 또한 언의 손길이었기에.

* * *

“거봐! 내가 엄청 곱다고 했잖아!”

“쉿, 조용히 해!”

어떻게 안 건지, 거처까지 찾아와서는 돌담 틈에 있는 쪽문에 붙어 규연을 몰래 훔쳐보던 어린아이 둘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 멍하니 서서 하늘을 보고 있던 규연은 오랜만에 피식 웃으며 미소 지었다.

내내 비어 있던 큰 저택에 여인이 홀로 들어오자 무성한 소문이 번졌다. 정 상궁이 잘 정리한 덕에 작은 상단을 꾸리다 접은 뒤 한적한 곳에 머물러 온 과부로 꾸며졌지만, 다들 무척이나 궁금해하며 주위를 기웃거렸다.

사연이 알려지고 나니 어른들의 관심은 훨씬 덜해졌는데, 아이들은 종종 이렇게 찾아와 규연을 힐끔거리고 가곤 했다.

“봤으니까 이제 돌아가자. 들키면 절대 안 된다고!”

“쳇! 안 그래도 갈 거야! 오늘은 고양이 구름이 뜬 날이란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인데?”

“너 바보구나? 고양이 구름이 뜬 날은 기다렸던 손님이 찾아오는 날이야. 그러니까 빨리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우리 오라버니가 돌아오실지도 몰라.”

아이들은 시끄러운 발소리를 내며 멀어졌고, 규연은 또 멍하니 남아 아이의 말을 곱씹었다.

고양이 구름. 기다렸던 손님.

“부럽구나.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만날지 모르는 손님이 있어서.”

규연이 기다리는 손님은 아무리 기다려도 만날 수 없었다. 규연이 따라 떠나거나, 언이 살아 돌아오는 수밖에는 없었다.

새삼 둘을 갈라 놓은 ‘죽음’이 얼마나 무거운 놈인지 와 닿아 목이 메었다.

언젠가 참 간절히 꿈꾼 적 있었다. 조금 전 보았던 것처럼 쫑알거리는 아이를 낳고, 그저 자유롭고 행복하게 함께 늙어 가는 미래를 너무나도 애타게 바란 적 있었다.

이뤄지리라 생각했다.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운명의 굴레는 끝내 언을 놓아주지 않았고, 규연 역시 그 굴레에 함께 갇혔다.

“꿈에라도 찾아오시렵니까. 오지 않으신다고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제발 한 번이라도 찾아오세요.”

규연은 부디 고양이 구름이 그녀에게도 만남을 허락하길 바라면서 두 눈을 감았다. 꿈이라도 좋으니, 정말 딱 한 번만이라도 언을 보고 싶었다.

‘끼이익…….’

한참 그리움에 잠겨 있을 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항상 대문을 걸어 잠갔는데 오늘은 정 상궁이 볼일이 있어 나가는 바람에 문을 걸어 두지 않았다.

찾아올 이도 없으니, 규연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가 당연히 정 상궁이리라 생각했다. 해서 눈을 뜨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왜 문을 이리 열어 둡니까. 홀로 있으면서 위험하게.”

그런데 거짓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연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언이었다. 언이 서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내가 환상인지 아닌지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묻고 물었다. 그러다 꿈이어도 상관없다고, 그냥 이리 볼 수 있으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고양이 구름이 정말 영험한가 봐요. 이제 드디어 꿈에서라도 만나네요.”

꿈일 터였다. 정말 살아 있는 언이 규연에게 찾아왔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으니 버텨 내지 못한 몸이 까무룩 잠들었고, 이제야 꿈속임을 깨달은 것뿐이라고 여겼다.

“왜 이리 늦게 오셨습니까. 꿈에는 자주 오실 수 있잖아요. 그리 찾아오시는 것도 싫으세요?”

규연이 계속 꿈이라 생각하며 말을 걸자 그가 슬픔이 묻어나는 얼굴로 규연에게 다가왔다.

규연은 언이 가까워질수록 꿈이 참 생생하다고 생각했다.

“꼭 진짜 같습니다. 영원히 깨지 않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적어도 이곳에서는 행복할 테니까.”

슬픈 눈으로 다가온 언은 조심스럽게 규연의 허리를 끌어안고 볼을 감쌌다.

너무나도 생생히 느껴지는 온기와 감각에 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왜 이렇게…….”

“꿈이 아닙니다. 환상이 아니에요.”

환상이 아니라는 말에 규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거짓이면 빨리 말씀하세요. 정말 못 버틸 것 같으니까. 거짓이면 얼른…….”

믿지 못하는 규연에게 언이 입을 맞췄다. 기억하고 있는 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규연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겠다고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언은 규연의 눈물을 훔쳐 내고 따뜻하게 눈을 맞췄다.

“정말……. 정말로…….”

“내가 맞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도 맞고요.”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한 규연이 손을 뻗어 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정말 환상이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 긴 눈매를 살짝 쓸어내리고, 살이 내린 볼을 건드려도 보고, 조금 전 그녀에게 닿았던 붉은 입술에 손을 대 보기도 했다.

진짜였다. 모든 감촉이, 모든 온기가, 눈앞의 언이 실재임을 증명했다.

그 순간, 규연이 언의 목에 두 팔을 감으며 와락 안겼다. 언 역시 그에게 안겨 오는 규연의 허리를 꽉 감싸며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어찌…….”

“사연이 깁니다. 하나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기니까. 천천히 이야기해요.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요.”

주어진 시간이 많다는 말을 듣는 찰나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규연을 휘감았다. 그가 온전히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받아 주겠습니까. 살아서 갚으라는 말을 지키러 돌아온 죄인을요.”

작게 웃음을 터뜨린 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언을 바라봤다.

“평생 갚으셔야 할 겁니다.”

알겠다며 미소 지은 언은 그대로 규연에게 입을 맞췄다.

너무나도 긴 고통의 시간을 거쳐 온, 영영 닿지 않을지도 몰라 눈물만 자아냈던, 지독하기만 한 줄 알았던 사랑이 마침내 서로에게 닿았다.

〈완결〉1664590641722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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