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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61/68)

61화

* * *

“가장 화려하게 꾸미라 했더니, 정말 말도 안 될 만큼 화려하게 꾸며 놨군. 이렇게나 금사를 많이 썼을 줄이야.”

새 면복을 입은 언이 옷 곳곳에 쓰인 금사를 보며 말했다.

본래 면복을 입는 날이 아니었지만, 아주 화려하고 성대하게 꾸며 극적인 배경을 만들어야 했기에 대례복을 걸쳤다.

“…….”

거울 앞에 선 언은 차분하게 그의 모습을 살폈다.

면복에 면류관을 쓰고 있으니 꼭 혼례를 치르던 날이 떠올랐다. 그를 바라보며 수줍어하던 규연의 얼굴이 아른거리자 언이 질끈 눈을 감았다.

거사 날이었다.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날이 찾아왔고, 언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규연의 생각에 잠겨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됐다.

“전하.”

규연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상선이 언에게 다가왔다.

늙은 사내의 얼굴에 지독한 슬픔이 비쳤다.

“상선. 자네의 얼굴 때문에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들키고 말겠군. 어찌 그리 울상이야.”

언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상선을 놀렸다. 그러나 상선의 얼굴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아이처럼 울던 규연의 모습이 상선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언의 죽음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은 이를 울렸다.

“그간 고생 많았네. 못난 상전을 두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았어.”

“못났다 하지 마십시오. 전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전하.”

언에게 아비와도 같던 자였다. 폭군의 가면을 쓸 때도, 벗었을 때도, 상선은 궂은일도 마다하며 오로지 언만을 위해 일했다.

“큰형님에 비하면 참 성에 차지 않을 군주였을 터인데. 내 부디 자네에게 너무 큰 실망이 되지 않았기를 비네.”

본래 세자 아래에 있던 자였다. 언은 큰형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잘 알았고, 그 아래에 있던 자의 눈에 자신이 꽤나 부족했으리라 생각했다.

“승하하신 세자저하께서는 훌륭하신 분이셨지요. 누구보다도 소신이 잘 알고요. 하나.”

마지막까지 고마웠다는 말을 한 번 더 전하려 할 때, 상선이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더 뛰어나신 군주셨습니다.”

상선의 한마디가 언의 가슴을 찌르르 울렸다. 그는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고마웠네. 진심으로. 부디 휼에게도 내게 해 주었던 것처럼 마음을 다해 주게. 내 소원일세.”

“예, 전하. 명 받잡겠습니다.”

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침전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문이 열리고, 언이 한 발자국 내디딤과 함께 거사가 시작됐다.

슬픈 밤이 될 터였다. 궁에 피바람이 부는, 지독한 밤.

* * *

“자, 마음껏들 들게. 내 오늘 영상을 위해 이리 성대한 연회를 만들었으니, 다들 사양 말고 들도록 해. 전부 영상의 덕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해가 진 뒤 여러 개의 불이 궁을 밝힌 순간, 성대한 연회가 시작됐다.

여느 때처럼 기생과 의녀가 화려하게 춤을 추고, 악공들이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고, 언은 큰 의자에 널브러지듯 앉아 술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직접 본 자들이 궁 밖으로 나가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기에 양반이 아닌 자들도 몇몇 궁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궁의 화려한 모습에 입을 떡 벌리면서도, 굶어 죽어 가는 제 가족과 친지를 떠올리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언을 바라봤다.

‘그래. 나를 향한 분노가 쏟아져야 한다. 그래야 휼이 더 힘을 얻을 수 있어.’

언과 영의정이 이곳에서 포박되어야 했다. 누구 하나 도망치는 이 없이, 모조리 잡혀야 했다.

언은 그래서 연회를 열었다. 모든 증좌는 이미 흑의적을 통해 휼의 손안에 있었다. 죄인들만 온전히 잡힌다면, 심판은 수월하게 진행될 터였다.

술에 취한 척 눈에 힘을 푼 언이 영의정과 그의 일행을 살폈다. 확실히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여느 때라면 그저 연회를 즐기기 바빴을 터인데, 이판을 비롯해 많은 이들의 표정에서 긴장이 비쳤다.

‘언제일까. 반역의 시발을 알리는 신호가 영의정의 몫일까 아니면 내 몫일까.’

분명 약속한 시간이 있을 터였다. 언은 그 순간이 언제인지 알고자 했다.

휼을 비롯한 흑의적이 준비를 마치고, 편전 앞으로 쳐들어오기 위한 위치에 도착하면 하늘 위로 연기를 피어오르게 하기로 했다.

‘슬슬 때가 되었을 텐데.’

도착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마침 새하얀 연기가 연회장 너머로 피어올랐다.

언은 크게 숨을 고른 뒤, 영의정을 찾았다.

“영상. 자네를 위한 연회인데 어찌 그리 술을 마시지 않는가? 이리 흥을 깰 게야? 내 기껏 자네를 위해 힘을 써주었는데 이리 나오면 섭섭하지.”

언이 일부러 영의정에게 말을 걸자 영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언을 향해 섰다.

“이것이 어찌 소신을 위한 연회이겠사옵니까, 전하.”

영의정이 한마디 던지자 갑자기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출입문이 모두 잠겼다.

악공들의 음악이 멈추고, 기생들의 가무가 멈추고,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였군. 내가 말하면 그때 영상이 일어나고. 일이 시작되고.’

어떤 흐름으로 흘러가게 이야기를 짜 놓았는지 훤히 보였다.

“소신은 이제 더 이상 돌아가신 선왕 전하와 종묘사직을 욕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전하.”

“…….”

“밖에서는 백성들이 죽어 가고, 지독한 흉작으로 풀뿌리마저 다 말라 가는데, 금사가 수놓인 면복을 입으신 전하께서 이리 술과 고기를 탐하시다니요! 백성들이 가엽지도 않으십니까, 전하!”

참으로 가증스러운 이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여전했다.

“소신의 죄입니다. 어린 아들들이 왕위에 오를 테니 잘 돌봐 달라 하셨던 선왕 전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소신의 죄입니다.”

“…….”

“하니 소신이 도려내겠사옵니다. 그게, 소신이 선왕 전하께 면구스럽지 않을 유일한 길입니다.”

언은 계속해서 아버지를 들먹이는 영의정을 보며 분노했다. 감히 그의 입에서 거론될 사람이 아니었다.

마침 그 순간, 영의정의 손짓과 함께 지붕 위로 궁수들이 대형을 갖췄다.

“꺄아아악!”

“바, 반역이다!”

화살이 쏟아질 준비를 마치자 영문을 모르던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굳게 잠겨 있어 누구도 열 수 없었다.

영의정이 한 번 더 손짓하자 궁수 대부분이 언을 겨눴다. 이경이 떠난 후로 호위청도 완전히 영의정에게 넘어간 탓에 언의 곁에 서 있는 금군 중 누구도 그를 보호하려 들지 않았다.

“곱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전하.”

씩 웃은 영의정이 화살을 쏘라고 마지막으로 손짓했을 때, 화살은 아래로 쏟아지지도, 언을 향해 날아오지도 않았다.

“뭐야!”

그러자 영의정이 포악한 얼굴을 드러내며 언성을 높였다.

“이, 이게 무슨…….”

분노했던 건 찰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영의정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화살이 쏟아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지붕 위의 궁수가 모조리 베였기 때문이었다.

붉은 옷을 입은 영의정의 군대를, 새까만 옷을 입은 다른 병사들이 모조리 쓰러뜨리고 그 자리 위에 올라 그들의 화살을 겨눴다.

“누, 누구…….”

모두가 혼비백산하고 있을 때, 엄청난 발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자들마저도 모두 고개를 돌려 문 너머를 바라봤다.

“흑, 흑의적이다!”

흑의적의 증표를 알아본 건, 궁 밖에서부터 들어온 백성들이었다.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라며 문을 넘어오는 자들을 바라봤다.

흑의적을 비롯한 어마어마한 수의 병사가 연회장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휼이 있었다.

“죄인 이언과 한용희는 민심의 심판을 받으라!”

휼이 크게 외치며 칼을 든 순간, 엄청난 함성이 쏟아지며 병사들이 칼을 꺼냈다.

“아, 아니, 대감!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 우리는 분명 전, 전하만…….”

“상평 대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에 영의정이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옆에서 이판이 무슨 일이냐며 호들갑을 떨고, 어찌해야 하냐며 이를 딱딱거리면서까지 떠는데, 영의정은 그런 이판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휼만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상황을 깨닫고는 언을 바라봤다.

‘네놈 짓이구나. 네놈을 미끼로 쓰고, 또 너를 잡으려는 나를 다시 미끼로 썼어. 그래서 상평에게…….’

영의정의 이가 빠드득 갈렸다.

이판은 지금 안 도망가면 죽는다며 문을 향해 달려가고, 영의정은 분노에 휩싸여 검을 쥐고서 언이 서 있는 단상을 향해 달려갔다.

언은 평온한 얼굴로 그에게 달려드는 영의정을 바라봤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 네놈이 감히 나를 이리 속이고!”

언은 영의정이 휘두르는 검을 너무 쉽게 막아 냈다. 오히려 영의정을 지키기 위해 언에게 달려드는 호위청의 병사들을 쳐 내는 게 더 어려웠다.

언이 단숨에 넷을 베어 넘기자 영의정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언을 바라봤다. 사방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는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언과 영의정이 서로를 마주했다.

“어찌…….”

“기분이 어떠한가? 꼭두각시라 믿었던 왕에게 베이는 기분이?”

“으아악!”

언은 망설임 없이 영의정의 오른팔을 베어 냈다. 영의정이 어마어마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는 눈. 차가운 분노가 가득 서린 눈으로, 언이 영의정을 바라봤다.

오른팔. 영의정에게 가장 먼저 희생된 어머니가 그의 독에 취해 가장 먼저 잃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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