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68)

60화

“……중전.”

이곳에서 이렇게 규연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그리지 못한 언은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는구나. 알았구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규연을 본 순간, 언은 규연이 모든 진실을 알아냈음을 깨달았다.

“왜 약조하셨습니까? 신첩이 죽는 꼴은 볼 수 없어 그리하신 겁니까?”

눈물 젖은 목소리가 언을 향했다. 언은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규연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지, 무어라 설명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믿었습니다, 전하. 불안할지언정, 정말 믿었습니다. 분명 제 곁으로 돌아오신다 했으니 그 약조만은 지킬 것이라고 믿었어요.”

원망 섞인 목소리가 언을 흔들었다. 규연에게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구슬픈 음성이었다.

이경으로부터 언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규연은 하염없이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시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버티고 버틴 끝에 오늘 이 초가로 올 수 있었고, 마침내 언을 만났다.

오랜만에 마주한 언은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약조를 어기고 떠나려던 사내가 무엇이 예쁘다고 상한 얼굴부터 눈에 들어왔다.

편히 지내겠다고 했으면서. 건강히 잘 있겠다고 했으면서. 그러다 돌아오리라고 이야기했으면서.

언이 지킨 약조가 하나도 없었다.

“규연.”

쏟아지는 눈물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언이 규연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닿자 규연의 가슴이 더 아팠다. 이 목소리를 규연으로부터 영원히 빼앗아 가려 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야속했다.

“나는…….”

언이 말을 꺼내려 애쓰는데, 좀처럼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한숨만 차오르고, 새하얗게 지워진 머릿속은 이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엉엉 울고 있는 규연이 가여워 미치겠는데, 지금 손을 뻗어 눈물을 훔쳐 주는 것조차 규연에게는 상처가 될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내가 미우리라는 것 압니다. 괘씸하리라는 것도, 야속하리라는 것도 다 알아요. 계속 그렇게 약조해 놓고, 그대를 떠나려 했으니 배신감이 든다는 것도 압니다.”

“…….”

“하나 나는 그대가 죽는 걸 볼 수 없고, 그렇다고 지금까지 내가 달려오며 지켜낸 계획을 바꿀 수도 없어요.”

언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왜 바꾸지 못하십니까? 바꾸실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그냥 숨기면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말이 샐 겁니다. 세상에 온전한 비밀은 있을 수 없어요. 특히 왕의 권력에 닿아 있는 비밀은.”

언이 규연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죽은 척 숨어도 언젠가는 들키고 말 겁니다. 그리고 휼에게 위협이 되겠지요. 내 존재를 알고 접근해 오는 자가 있다면, 흑의적의 배후가 누구인지 아는 자일 테니까. 흑의적의 신망을 휼이 가져간 것일 뿐, 휼이 흑의적을 만들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이용하려는 자일 테니까.”

수도 없이 생각했다. 규연에게 돌아가겠노라 몇 번씩 거짓으로 약조하는 날이 이어지는 동안, 사실 언도 그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다.

규연을 안고 있을 때 찾아오는 행복이 너무 벅차서, 품에 안은 여인의 웃음을 영원히 지켜 주고 싶어서, 몇 번이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폐단을 끌어안은 자의 역할은 죽음이라는 마침표를 찍어야 완성됐다.

“그대를 그렇게나 괴롭게 하면서까지 이루려 했던 일입니다.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규연.”

“…….”

“어마마마도, 아바마마도, 두 형님도, 모두 영의정 손에 바스러졌습니다. 내가 돌봐야 할 나라 역시 그 입김이 닿는 곳마다 썩어 문드러졌고요.”

“…….”

“이게 내가 짊어질 운명입니다. 끌어안고 사라져야만 해요.”

망설이던 언은 결국 손을 뻗어 규연의 눈물을 훔쳤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닿자 규연의 마음이 더 무너져 내렸다.

“신첩이 그 앞에 올 수는 없는 겁니까.”

가만히 언의 말을 듣고 있던 규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전하의 운명보다도, 전하의 나라보다도, 신첩이 먼저 올 수는, 정녕 없는 것입니까?”

“…….”

“그냥 저와 함께하는 미래 하나를 위해서 살아 달라고. 일어나지 않을 상황을 걱정하지 말고, 그냥 저와 함께할 미래만 생각해 달라고. 그리 청해도 들어주지 않으실 거예요?”

언을 기다리는 동안, 규연 역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왜 언이 그리 죽으려 하는지. 규연을 향한 마음을 차마 감추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면서 왜 자꾸 떠나가려 하는지.

연신 고민해 보니 답은 하나였다. 언에게는 이 나라를 뒤엎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의 어깨에 매달린 가족의 무게가,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의 무게가, 언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신첩을 조금만 더 생각해서 살아 달라고 하면.”

“…….”

“그리 청해도 들어주지 않으실까요?”

이제는 이리 청할 힘도 떨어져 간다는 듯, 다 닳아 버린 목소리가 언의 귓가에 닿았다.

차오르는 감정을 참아 내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있던 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가엽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짊어지고 고통만 떠안다가 이렇게 떠나셔야 하는 전하도, 그런 전하를 사랑해 함께 아파하다가 홀로 남을 저도.”

규연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애달프게 말했다. 완전히 지친 규연은 한없이 공허한 눈으로 언을 바라봤다.

언은 이제 거짓으로도 규연의 곁에 남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눈앞의 여인이 가여워 미치겠고, 한없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흘러넘치는 게 보이는데, 지금까지 지켜온 그의 계획 역시 바꿀 수 없다는 단호함이 가득했다.

보성사에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규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언을 설득하리라 다짐했다. 지난번처럼 은장도를 목에 들이대는 일이 있더라도 살리고 말겠다고.

그런데 떠나가야 하는 이유를 말하면서 언의 눈에 번진 고통을 본 순간, 그 마음이 사라졌다.

규연이 매달린다고 바뀌는 건 없는데,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의 고통만 더해지는 게 보였기에.

마냥 가엽기만 했다. 언도, 그런 언을 사랑해 이리 아파하고 있는 규연 자신도.

그저 가여웠다.

“미안해요.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더 미안합니다.”

언 역시 울음을 참아 내느라 잠긴 목소리로 그의 진심을 전했다.

애달픈 마음이 시선을 타고 서로에게 닿은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언과 규연 모두 갈급하게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자연스레 옷가지가 바닥으로 내던져지고, 끝도 없는 열기만 방 안에 퍼져 나갔다.

이제는 둘 모두 끝을 알고 있는 밤이었다. 서로를 안을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이제는 규연마저도 알았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뜨거운 숨도 멈추지 않았고, 여느 때보다 격렬한 몸짓도 좀처럼 쉬지 않았다.

규연이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고 나서야 밤이 끝났다. 규연은 점멸하는 시야를 느끼며 언에게 부탁했다.

“아침까지 제 곁에 계셔 주세요. 지금 떠나가지 말고. 이 청은 들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그리하겠습니다.”

언이 규연에게 가볍게 입 맞추며 대답했다.

“그리고 하나만 더. 딱 하나만 더 들어주세요.”

규연은 점점 감기는 눈에 가까스로 힘을 주고,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간절히 청했다.

“만약 전하의 끝이 바뀔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만에 하나라도 그 기회가 온다면.”

“…….”

“그 기회마저 저버리지는 마세요. 그리된다면 살아남아서 제 곁으로 오세요. 이건 약조해 주실 수 있잖아요.”

겨우 멎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 순간, 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할게요. 약조하겠습니다.”

규연은 부디 그 기회가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규연.”

아침까지 함께 있어 달라는 청이 있었기에, 언은 규연 곁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데 쏟아지는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떠 보니, 규연이 그의 곁에 없었다.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보자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 규연이 앉아 있었다.

먼저 깨어난 규연은 곤히 잠들어 있는 언을 보니 차마 그를 보내 줄 수가 없었다.

놓아줘야 한다고, 그냥 보내 줘야 한다고 분명히 생각했는데, 막상 아침이 오니 그럴 수 없었다.

“규연.”

“가지 마세요. 그냥, 그냥 우리 여기에 있어요.”

문 앞을 막아선 규연을 보는 언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겼다. 그는 규연 앞에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약조, 지키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회가 생기지 않으면 떠나가신단 말씀이지 않습니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언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시선을 내리며 한숨을 삼켰다.

“가지 마세요.”

규연이 간절한 바람을 전하며 언의 품에 파고들었다. 언은 그런 규연을 꽉 끌어안았다. 규연의 등을 토닥이던 그는, 자유로운 손으로 넓은 소매 틈에서 꺼낸 작은 환을 하나 입에 머금었다.

“그냥 여기 이렇게……. 제발…….”

이제는 더 이상 흐를 눈물도 없을 것 같건만. 눈물이 또 규연의 얼굴을 적셨다.

언은 부드러운 손으로 규연의 눈물을 훔쳐 내고는, 천천히 입을 맞췄다.

따듯한 입술이 닿고 그 너머의 틈이 생겼을 때, 언이 머금고 있던 환이 규연에게로 넘어갔다.

얇은 막이 터짐과 동시에 규연의 입 안에 가루가 퍼졌다.

화들짝 놀란 규연이 콜록거리며 가루를 뱉어 내 보려 했지만, 이미 목구멍을 넘어간 뒤였다.

“미안합니다.”

거사를 앞두고 지독한 불면과 싸우고 있는 언은 먹으면 잠드는 독한 약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규연이 이리 막아설 것임을 예상했기에, 언은 이렇게라도 규연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원망과 간절함이 담긴 눈이 서서히 감기고, 규연이 언의 품으로 쓰러졌다.

언은 금세 잠들어 버린 규연을 꽉 껴안고 규연의 온기와 향을 오래도록 머금었다.

이젠 정말, 이별이었다.

0